위에서 잠시 살펴보았습니다만 보편적으로 인정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진리일 수 있고, 반면 보편적으로 인정되지만 진리가 아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사람들이 언제 어디서나 그리고 그 어떤 심리적인 상태하에서도 의심없이 항상 보편적 진리로서 받아들여 질 수 없는 내용들은 그것이 아무리 위대한 진리라고 하여도 그리고 그것을 진리로 믿는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지만 결국 "내가 믿는 진리는 이렇다"라고 상대적으로 격하시켜 말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것이 절대적 진리일찌라도 그 사실을 믿지않는 사람들에게 전달되어지는 과정에서 어쩔수 없이 상대적 진리로 전락되는 것입니다. 특히 그 문제가 죽음과 관련되는 사후의 세계에 관한 영적 내용이거나 절대자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관한 문제일 때 더욱 그렇습니다.
이 역시 모든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 하지만 본질상 과학적 증명의 대상이 아니며, 또한 그 궁금증을 속시원히 풀어줄수 있는 과학적인 방법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러한 문제는 믿음의 문제로 귀착될 수 밖에 없습니 다. 그렇다면 이 믿음은 결국 문제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니고 차선의 방법이라고 평가절하 당해도 달리 도리가 없습니다. 과학적 방법이 아니기에 원시적이고 미신적이며 저급한 논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매도되어 버리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말하는 내용은 그것이 아무리 중요하고 놀랄만한 삶의 문제의 본질일지라도 본질 자체의 중요성과 신빙성과 신뢰성이 많이 저감(低減)되는 운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에는 항상 핍박과 멸시와 천대가 따르며 때로는 죽음까지 불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분이 바로 스스로를 진리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결국 세상 진리는 깨닫고 믿는 것이지만, 영적진리는 믿고 깨닫게 됩니다. 공자님의 생부지 사역부지(生不知 死亦不知)라는 말씀은 다른 말로하면 세상적인 것도 다 모르는데 어떻게 영적인 것 즉, 하늘에 속한 일을 알 수 있겠느냐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제한된 사고로서는 인간 현실 영역 밖의 것은 하늘로부터 계시된 것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 계시라는 것이 참인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또 일어 납니다. 따라서 믿음이란 것도 결국은 선택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사람은 아는 것 만큼 믿고 믿는 것만큼 실천하며 살아가는 영장류입니다. 그것을 참인 것으로 믿던 믿지 않던 자신이 선택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선택의 기회와 자유가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 도 범죄할 자유가 있었으며, 근세의 철학도들에게는 '신은 합리주의의 이성 밑에서 얼어 죽었다'고 신의 사망을 선언할 자유도 있었으며, 지금 우리에게도 이 모든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는 자유가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선택은 자유지만 결과는 필연이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중요한 문제를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아무런 기준도 없이 마치 복권에 당첨되는 것처럼 운에 맡기는 도리밖에 없다는 말인가? 즉, 선택해야 할 인간들이 진리를 깨닫고 옳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아무런 내적기능도 주어지지 않은채 선택이라는 운명앞에 방임되어 있다는 말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 속에는 양심의 법이 있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빛나는 이 성의 도덕율이라던가 인간 삶 속에 숨겨진 사랑의 비밀이라던가 대자연의 신비로움이라던가 의사들이 느낀다는 인체의 신비라던가 인간 생명체의 유기적 관계라던가 년년세세 흘러가는 역사 속에서 얻는 여러가지 교훈이라던가 세상 만물의 합목적 운행 질서라던가... 이 모든 것들 속에 하나님의 신성이 잘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죄로 인하여 영성이 많이 훼손된 인간은 그런 분명한 증거들을 깨닫는 일에 많이 둔감해 졌을 뿐입니다. 좀더 정직하게 말한다면 이러한 진리의 세계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거나 인간 보편적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강력하게 암시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 사도바 울은 로마서 1장 20절에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를 접할 수 없었던 시대를 살면서도 조문도석사가의(朝聞道夕死可矣 :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 에 죽어도 좋다는 뜻)라고 말한 공자(BC552~BC479)님의 애타게 진리를 구하는 마음 속에서도 인간본래의 영성을 발견하게 됩 니다. 어떤 청년이 너무 괴로워 자살을 하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저녁에 죽으려고 약을 먹으려는 순간 신이라는 존재, 하나 님이라는 존재가 있으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자살을 잠시 뒤로 미루고 무릎을 꿇고 간 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였습니다. "내가 자살을 하룻밤 연기하겠으니 만약 하나님이 계시다면 내일 아침에 일어날 때 내 마 음에 평화가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마음속에 놀라운 평화가 깃들어 있음을 발견하였다는 실 화도 있습니다. 결국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는 말입니다.
자신이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던간에 인간은 모두 반드시 한 쪽을 선택해야 할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사실 모든 의식이 마비된채 식물인간으로 살아가지 않는 한 모든 인간은 하루 하루 자신이 선택한 길을 이미 가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당신의 자유의지로 선택하지 않으면 죽은 후에 당신 의지와 상관없이 자동으로 선택이 됩니다. 영생을 선택을 하지 않으면 영벌이 자동으로 선택된다는 말씀입니다. 생각 좀 해 보십시오. 당첨되던 안되던 철저히 망하는 투기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말도 안되 는 이런 투기에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맡길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데 이런 투기가 실제로 있습니다. 불신자들과 무신론자 들은 바로 이런 투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믿는대로 사후의 세계가 없다는 사실이 맞으면 완전 소멸되어 영원히 무(無;nothing)가 되고, 사후의 세계가 있다면 그 때는 영벌을 받게되기 때문입니다.
호텔에 난 큰 화재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진화후 조사팀이 비상계단으로 올라가 어느 철문 열었더니 그 문 바로 안 쪽에 10명이 뒤엉켜 처참하게 타죽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철문이 잠겨있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바로 열기만 하면 비상계단을 통해 모두 살아서 나올 수 있었기 때문에 조사팀은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한참을 조사한 끝에 좁은 복도끝 에 있는 그 문은 안으로 당겨야 열리는 구조였는데 사고당시 사람들은 밖으로 나오려고 앞으로 밀기만 하다가 결국 참변을 당 했다는 웃지못할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80년대 서울에서 실제로 있었던 실화입니다. 영적무지도 바로 이런 것과 흡사 합니다. 영적인 지식은 세상 학문과 지식과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 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5:24)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 가 없느니라 (요14:6)
-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 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 라 하신대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요한복음18:37-38)
그렇다면 이런 진리를 먼저 깨달은 자가 상대방에게 그 진실을 전달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요? 특히 요즘처럼 불신의 풍조가 심화된 사회속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죄(罪)에 오염(汚染)되어 왜곡(歪曲)되어 진리를 분간할 수 있는 영성이 많이 훼손되었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말하는 사람의 마음도 그리고 그 진실을 듣는 사람의 마음도 함께 왜곡되어 사물을 있는 그대로 깨닫는 능력이 많이 저하되었 다는 말입니다.
죄에 오염된 심성을 가진 인간들에게 진실을 전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드는가하면 이 땅위에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예 수 그리스도조차 사람들에게 진실을 전하다가 끝내 그들의 손에 의해 무참하게 처형당한 사실에서도 너무나 극명(克明)하게 잘 나타나 있습니다. 진실을 말하여도 도무지 믿으려하지 않는 세상을 향해 너무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시던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자들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처하는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 손에 의해 순교당하신 것입니다. 다만 로마제국 통치하에 식민지 백성으로 살았던 유대인 스스로는 죄인을 처형할 권한이 없었기에 총독 빌라도의 세상 권력을 잠시 빌렸을 뿐입니다. 진실을 전하 기 위해서는 때로는 이와같이 목숨까지 버려야 할만큼 힘든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승천직전 이 땅 위에서의 마지막 유언으로 제자들을 향해 '세상에 나가 내 증인이 되라' 고 분부하셨습니다. 여기서 증인이라는 용어는 영어의 순교자라는 용어와 어원이 같습니다. 죽음을 각오하라는 의미가 포함되 어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초대교회 시절 로마제국처럼 예수 믿는다고 또는 예수 믿으라고 전도한다고 죽이지 않습니다. 그러 면 어떻게 순교하라는 말일까요? 바로 산 순교를 말합니다. 부정과 부패와 비리가 들끓는 세상에서 밑지고 손해보고 억울하게 당하더라고 목숨걸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이 이 세대가 요구하는 진정한 순교요 전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만으로 사람의 본심을 전달하려고 합니다. 이는 발상부터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 사람들 속에 나 자신도 포함되어 있음을 인정하기에 이 사이트를 통해 전하는 진리의 내용도 많은 제한을 받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작성된 것 입니다. 단순한 지식은 말만으로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삶의 방향을 변화시키는 진실은 말만으로는 간단하게 전 달되지 않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자식은 머리로 부모에게 효도하지만 부모는 가슴으로 자식을 사랑합니다. 가슴으로 사랑한다는 말은 삶으로 사랑한다는 말이 됩니다.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말없이 묵묵히 모든 것을 희생 하며 자식을 사랑할 때 자식이 그 사랑을 가슴으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이혼율이 3번째로 높다는 우리의 현실을 봅시다. 일년에 약 30만쌍이 결혼합니다. 그 많은 사람이 서로 사랑하지 않은채 마지 못해 결혼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 다. 그런데 그 중 절반이 이혼을 합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이 잘못된 것입니다. 희생과 인내와 관용이 전혀 없는 본능으로 사 랑하기 때문입니다. 참된 사랑에는 희생이 필수적으로 따르며, 이 과정에 인내와 관용이 필요한 것입니다.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 니라 (요한복음12:24)
하나님조차 진실을 전하기 위해 그 진실을 받아들여야 할 인간들의 손에 의해 죽어야 했는데 사람이 사람에게 진실을 전하려 하면서 죽지 않는다면 벌써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렇게까지 하시고 끝내 그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에 심판을 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진리를 진실되게 전하려먼 먼저 전하려는 사람의 자아가 죽어 희생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더러 복음의 진리를 전하려면 죽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살아있는 순교자가 되는 것이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자아가 철저히 죽어야 합니다. 죽는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따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열매가 없다고 말씀 하십니다. 현대기독교가 하늘의 진리를 가지고도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는 것은 크리스천들이 죽지않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