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모든 사물에는 반드시 진실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더욱이 만물의 영장으로서 영적존재인 인간이 그 삶을 마감하고 맞이하는 죽음이라는 문제에 진실이 없을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것 처럼 사람은 죽으면 한 줌 흙으로 돌아가버리며 결국 모든 것이 소멸되어 영원히 끝나버린다는 것이 진실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영혼이 있어 죽으면 심판을 받게되며 모든 육체가 다시 부활한다는 것이 진실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아니면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살아 생전의 선악간의 행실에 따라 사후에 다른 생명체로 거듭 태어나게 되어 윤회한다는 것이 진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느 것도 모든 사람이 조금도 의심없이 보편적으로 받아들 수 있도록 과학적으로 증명된 경우는 없습니다. 영적인 세계는 과학의 대상이 아니며 오직 신앙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존재의 본질에 관한 문제로서, 존재의 근원에 대한 동경과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그 안에 들어가 있는 영적산물인 것입니다.
-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시편53:1)
모든 사람은 진실을 알기 원합니다. 그렇다고 이 말이 곧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알고 산다는 말은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리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진리와 진실에 관한 개념을 간단하게 정리해 봅니다.
진리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즉, "'어떤 명제(命題)가 사실과 일치하거나 논리의 법칙에 맞는 것' 또는 '언제나, 또는 누구에게나 타당하다고 인정되는 인식의 내용'을 진리라고 한다" 입니다. 그리고 '어떤 명제(命題)가 사실과 일치하던 하지않던 즉, 진리이던 허구이던 있는 그대로의 참인 상태'를 진실이라고 정의해 봅니다.
진리의 문제에 관해 이러한 정의가 맞는지 그렇지 않는지 학문적인 논쟁은 철학자들의 몫으로 돌리고, 여기서는 보편적인 상식으로서 이해할 수 있는 진리의 개념으로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보편적인 상식으로 보편적이지 못한 문제를 생각해 본다는 것 자체가 이미 모순을 안고 들어가는 것이라고 반박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보편적이지 못한 문제'라고 말하는 것도 결국은 인식의 소산물일 뿐이지 그 문제자체가 보편적이지 못한 것은 아닐 수 도 있다는 점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다소 복잡하고 혼란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이러한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은 자신이 믿는 것을 추구하고 살아 가기 때문입니다. 하루 하루의 삶도 그렇고 일생도 또한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어떻게 믿고 사느냐는 바로 그 사람의 삶의 방향과 질을 좌우하는 중요한 문제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생과 내생을 결정짓는 참으로 중요한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누가 "지구는 둥글다"라고 단언할지라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눈으로 지구의 실체를 직접 보지 않고 사진만 보았고 전해 들었고 상식적으로 유추해 보았을 뿐인데 아무도 그 사실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습니다. 사실 인공위성을 타고 지구전체의 둥근 실물 모습을 눈으로 직접 본 사람은 전 세계적으로 단 세 명 밖에 없습니다. 1969년 7월 20일에 달에 착륙한 달 탐색선인 아풀로11호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중 두 명은 달 표면에 착륙해서 지구를 보았고 나머지 한 명은 모선에 탄채 달궤도 주위를 선회하면서 지구를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보지 못한 모든 사람들조차 아무도 의심하지 않고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과학적으로 분명하게 증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과학이 발달 되지 못하였던 고대에는 땅이 평면이며 저 넓은 바다 끝까지 가면 거기에는 낭떨어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두 사람이 흰색 종이 한 장을 놓고 토론을 벌린다고 가정해 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그것을 검은색이라고 말하고 또 다른 한 사람은 흰색이라고 주장한다면 결말이 어떻게 나올까요? 두 사람만으로는 결론이 나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속된 말로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두 사람의 주장과는 전혀 관계없이 그 종이의 색상은 토론 전의 것과 전혀 변함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즉, 진실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토론자가 열린 마음으로 정직하게 진심으로 정답을 알기 원하는가 하는 인식주체의 심리적 상태의 문제입니다. 보고 싶은 것을 보려고 하는가 아니면 진정 보이는 것을 보려고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만이 진실일까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인정할 것입니다. 우리는 가청주파수 이외의 소리는 듣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소리는 분명히 있습니다. 또한 가시광선 이외의 파장의 빛은 보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빛은 분명히 있습니다. 부모 가 자식을 사랑하지만 그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자녀는 철들 때까지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현대과학이나 심리학이나 그 어떤 방법으로도 해석되지 않는 많은 신비와 미스테리가 존재 한 다는 것도 그런 것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리학의 세계뿐만 아니라 정신세계에도 이러한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고 또한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입니다. 더욱이 그것이 우리가 익숙치 못한 영적인 문제일 경우 더더욱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 중에 대상무형(大象無形)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형태나 형상이 큰 것은 보거나 깨달을 수가 없다는 말입 니다. 동일한 맥락으로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인간 세상사와 차원이 다른 영적인 세계에도 그런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입 니다. 결국 모든 사람이 추호의 의심도 없이 "아! 그렇구나"하고 받아 들일 만큼 보편 타당성있는 과학적인 증거를 제시할 수 있는 것만이 진리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학시대의 인간이 빠지기 쉬운 가장 큰 미신은 과학적으로 인정되는 사실만을 진실로 받아 들이려고 한다는 사실입니 다. 세상에는 아직도 과학적으로 밝혀지지 못한 많은 사실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복음8:32)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리주의와 과학주의에 길들여진 우리는 보고 듣고 만지기를 원하며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기를 원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경험한 것 만을 믿으려 합니다. 그리고 현대과학과 상식적인 범위내에서 보편타당이 있고 모든 사람들 이 추호도 의심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만을 진실이라고 말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범주에서 벗어난 어떤 사실은 그 것이 아무리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정직하게 말하면 "이것이 진리다"라고 단언할 수 없으며 다만 "내가 생각하고 믿는 진리는 이렇다"라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결국 언제라도 변할 수 있으며 현재의 인식의 범위내에서 옳다고 믿을 수 밖에 없는 상 대적인 의미만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정.반.합의 변증법적 논리도 그래서 생겨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결론적으로 이 우주 삼라만상에는 많은 진실이 숨겨져 있으며 인간은 그 중 지극히 제한된 부분만 알 수 있으며, 그 이외의 부 분은 믿음이나 가설(假設)이란 수단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밖에 없는 진실도 많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죄에 오염되어 왜곡(歪曲)된 인간의 심성(心性)이란,
- 보이는 (보아야 할) 것을 보지 않고, 보고 싶은 것을 보며,
- 들리는 (들어야 할) 것을 듣지 않고, 듣고 싶은 것을 들으며,
- 해야 할 것을 하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하며,
- 믿어야 할 것을 믿지 않고, 믿고 싶은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러한 잣대로 세상과 모든 사물을 바라보게 됩니다. 바로 죄로 인해 인간에게 주어진 원래의 영성(靈性)이 많이 훼손되어 눈으로나 지식으로나 이성으로 보이고 해석되며 증명되는 것만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그 외의 것들 - 특히 영적인 사실들은 전혀 진실로 받아 들이지 않으려는 증세들입니다. 너무도 주관적이고 폐쇄적이며 이기적인 존재로 퇴보하였다는 말 이 됩니다. 이것은 남녀노소 빈부귀천 동서고금 그리고 학문의 깊이와도 전혀 상관없는 인간의 보편적 성향입니다. 성직자도, 대학자도, 인생의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본 도인도 그리고 길거리의 범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크리스천들도 이에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물론 나 자신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당신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자신의 심성이 본래의 모습에서 많이 변질되어 이러한 성향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선뜻 그리고 쉽사리 인정하기 힘든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죄의 해악(害惡)은 이처럼 전염성이 강하며 끈질기고 깊은 것입니다.
- 성서에도 이런 말씀이 있읍니다. "올바른 사람은 없다. 단 한 사람도 없다. 깨닫는 사람도, 하느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모두가 비뚤어져 쓸모없게 되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단 한 사람도 없다. (공동번역=로 마서3:10-12)
죄에 오염되어 왜곡된 인간 심성(心性)으로 인해 발생된 역사상 특별한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당대의 제일가는 성직자들, 지금으로 말한다면 유명한 목사나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기독교 원로급 지도자들과 관련된 사건입니다. 그 사건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사건입니다. 예수가 세상에 오기전 기록된 성경 여러 곳에 구체적 예언들이 나타나 있지만 그들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그들의 직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시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지도자계급이었던 종교지도자들을 향하여 분노하신 이유도 결국 '믿어야 할 것을 믿지 않고 믿고 싶은 것을 믿으려는 그들의 완악함에 대한 질책'이셨습니다 . 그 분은 감히 인간이 상상도 못할 많은 기적을 행하기도 하고 성경에 있는 예언의 말씀들을 지적하면서까지 바로 자신이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신 그리스도임을 믿으라고 간절하게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은 채 분기충천(憤氣衝天)하여 세상권력을 빌려 마침내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처형하는 우주 역사상 전무 후무한 무서운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믿고 싶었던 메시아는 백마를 타고 백만대군을 호령하며 로마제국의 식민지가 되어 신음하던 조국을 해방시키고 모든 사람들이 열광하며 흠모할만한 그런 힘과 위엄과 풍채를 지닌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달동네 출신의 초라하고 촌스러워 볼품없는 시골 청년이 수천년간 조상 대대로 간절히 바라고 바랐던 메시아라고는 도무지 상상할 수도 더더욱 인정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믿고 싶은 것을 믿는 행위'는 사람의 이생과 내생을 좌우하는 중대한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잘못된 발걸음을 되돌려 바른 길 즉, 믿어야 할 것을 믿도록 인도하시고자 계시의 말씀 즉, 복음을 주신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고 끝까지 '믿어야 할 것을 믿지 않고, 믿고 싶은 것만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도 어찌 하실 수가 없어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