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05.주일예배<히13:9-15. 영원한 도성 우리의 노래 예수>
본문은 예배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있으며 본질이 아닌 걸 보며 우왕좌왕하는 교인들에게 조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올라가신 골고다언덕과 구약당시 성소에 올려진 제물이 영문 밖에서 태워진 사실을 대비하며 설명합니다. 한 절씩 봅니다.
9절 :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심령을 복음으로 간수해야지 무슨 음식 먹는 관습이나 율법으로 개선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10~11절 :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제단의 제물처리과정입니다. 피는 성소로 대제사장이 갖고 들어가고, 죄 용서를 위한 제물은 백성들의 죄로 채워져 저줏거리가 됐기 때문에 먹지 않고 그 육체를 영문밖에 갖고 나가서 태워 없앱니다. 12절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제사법에 의해 속죄의 어린양으로 오신 주님도 영문 밖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건 죄에 묶인 인간들이 사슬을 풀고 놓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엄숙한 제사의 순서였습니다. 13절에선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고 합니다. 예수를 개인의 구주로 모신 사람들은 그의 영원한 생명뿐 아니라 수치와 곤욕까지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어디서? 영문 밖입니다. 감동으로 찬송하고 행복하게 성찬의 떡을 떼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으로 나가 우리 몸을 불살라야 합니다.
롬8:18절에서 바울의 고백을 들어봅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끝내 믿음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받을 천국의 기업과 영생을 어떻게 믿어 드리냐가 이 땅을 살아가는 능력입니다. 믿음에 깊이가 없으면 고난은 그냥 무의미한 고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어 분명히 알고 있듯이 천국에 대한 열망과 끊임없는 기쁨이 신앙 체질이 되면 어떤 고통도 견딜 이유와 힘을 얻습니다. 우리는 12제자에게서 그 증거를 봅니다.
열두제자가 열두 사도로 바뀐 건 마가다락방의 성령체험이 직접적인 동기였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일을 했고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눈으로 똑똑히 본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순교는 그래서 어찌 보면 당연한 겁니다.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에 오르신 주님을 따라가는 건 극히 당연한 거였고 그게 극심한 고통일지라도 자신들이 장차 받을 영광에 그야말로 감히 비교할 수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초대교회 300여 년간 속사도 시대까지 그 믿음과 교회부흥은 절정을 이룹니다.
서머나 교회의 감독 폴리캅은 화형장에서 의연하게 예수이름을 크게 외쳤습니다. 또 안디옥교회 감독 이그나티우스는 마지막 짐승의 밥이 되기 위해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폴리캅을 비롯한 친구에게 편지를 손에 쥐어줍니다. “그대들은 나를 위해 타협 말라. 또 내가 풀려나기도 바라지 말라. 나는 밀알이 되고 짐승 이빨에 가루가 되어 하나님의 깨끗한 빵이 되길 원하노라. 그리스도를 위해 벌을 당하고 또다시 살아나 그리스도로부터 자유를 얻을 줄 믿노라. 그리스도를 소유할 수 있다면 불 가운데서나 십자가 위에서나 짐승의 아가리에서 뼈가 가루가 되어도 손과 뼈가 잘리더라도 아무것도 두려워할 게 없노라. 내겐 오직 그리스도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굶주린 사자들이 으르렁거리는 형장으로 들어가며 기쁜 얼굴로 또 이렇게 말합니다. “난 온 세상을 다스리기보단 차라리 그리스도를 위해 죽겠노라.”
굶주려 으르렁거리는 사자들, 순교자 이그나티우스, 잠시 기도하고 설교 계속합다.
“우리에게도 세상과 육체와 죽음을 이길 믿음을 주소서. 귀한 믿음의 선진들이 간 용감한 믿음의 길에 주님 함께 하신다면 못 이길 게 없는 줄 믿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풍요에 찌들어 나태하고 비겁하며 왜소해진 영을 말씀으로 일으키소서. 이 땅에 미련을 둔 자들이 아니라 하늘에 소망으로 모든 것 이기는 말씀의 영, 하늘에 속한 자들이 다되게 하소서.”
성도 여러분. 우리 잠시 나그네로 이 땅에 왔습니다. 날짜는 달라도 우린 다 하나님 앞에 갑니다. 거기 놀라운 하나님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손으로 짓지 않은 기가 막힌 집으로 가는 겁니다. 잠시 지나는 게 이 세상입니다. 너무 심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주의 영광을 위해서 피할 수 없는 고난이라면 죽음이라도 이길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세요. 이길 힘은 오직 주님께만 있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모진 고통으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40일간이나 12제자와 오백여 사람들 앞에 분명히 부활을 증명했습니다. 그리고 또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구름에 싸여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는가? 너희 가운데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할렐루야.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붙잡아야 할 진리,
14절입니다.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1. 다시오실 예수님은 우리의 영구한 도성입니다.
이 땅에는 영원한 도성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도성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살 집은 예수님의 품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셔서 모든 것을 지금 통치하십니다.
주께서 약속하셨습니다. 반드시 속히 다시 오시마고 성경 곳곳에서 수없이 말씀하십니다. (계22:20절)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번엔 본문 15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2. 찬미의 대상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입니다(15절).
왜 찬미의 대상은 오직 예수 한 분입니까? 우리의 구원이 예수 외에 어떠한 다른 이름이 없다고 성경(행4:12)이 밝혔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단언합니다. 15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3. 찬미의 본질은 증거입니다.
예수찬미는 예수증거의 고백적 표현이요, 가장 거룩한 예술적 표현입니다. 시와 노래와 찬미로서 주님을 고백하는 일은 얼마나 감사하고 품위있는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양의 노래들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심을 만방에 기쁨으로 공표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건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만약 우리 예배 중에 찬양이 빠진다면 어떻겠습니까?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북한 지하교인들은 모여서 예배를 드릴 때 들키지 않기 위해서 찬송을 입술로만 부르고 소리를 내지 못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세계기독교역사 중 가장 좋은 환경에서 예수믿는다는 사실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노래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십니다. 언젠가는 불언간 기도할 수 없고 노래할 수 없는 날이 오기 전에 부지런히 찬송하고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갑시다. 기도와 노래가 멈추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주님은 영원한 도성으로 날마다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도성이신 좋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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