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31.주일예배<마6:33. 먼저 구할 하나님의 나라>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너무 잘 알려진 산상교훈, 그중에서도 꽃인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설교의 주제인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팔복강해(심령이 가난한 자<천국>, 애통하는 자<위로>, 온유한 자<땅>,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배부름>, 긍휼히 여기는 자<긍휼>, 마음이 청결한 자<하나님>, 화평케 하는 자<하나님의 아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천국>)를 통하여 꾸준히 우리에게 전해진지 오래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가 팔복가운데 쉽게 들어가지 못하고 늘 세상살이에서 힘들어하는 것은 무슨 이유겠습니까? 우리 육신이 아직도 말씀을 따라 선뜻 나서지 못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천국의 순수한 우리말입니다. 마태복음 5장 팔복 가운데 천국이란 단어가 나오는 것은 “심령이 가난한 자” 부분과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 두 군데인데 그것을 받쳐주는 온유와 함께 살펴보기로 합니다. 우리가 먼저 구해야 할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이루어 갑니까? (5:2)
1. 심령이 가난해야 합니다.
본문 5:2절에서 심령이 가난하면 천국을 소유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심령이 얼마나 부자입니까? 가득차서 넘칩니다. 무엇으로 가득 찼습니까? 없어도 될 욕심입니다. 염려입니다. 의심입니다. 이기심입니다. 자아집착입니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들은 이야기와 정보로 가득합니다. 모르는 게 없습니다. 지혜는 없는데 학습과 학습에 의한 지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즉 아는 것은 많은데 그것을 선하게 사용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부엉이집입니다. 천국을 차지하기에는 어린이가 더 유리합니다. 어린 사람일수록 창고에 끌어들인 것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이것저것 분별없이 모두 가져다 쌓아둡니다. 눈에 뵈는 것 모두 자기 것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고 사용합니다. 대부분 죄를 더하는데 쓰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예민합니다. 심령이 가난하면 그 안에 복잡한 이론이나 계산이 없습니다. 잘못된 정보체계는 속히 삭제하고 창고를 언제나 깨끗하게 청소해 둡니다. 가난한 심령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자신의 삶으로 천국을 드러내게 됩니다. 따라서, 5:2절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심령이 가난해짐으로 문이 열립니다.
그러나 마음을 비우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살펴보면 내가 나에게 얼마나 집착하고 있는지 놀라게 됩니다. 나를 버리는 것은 욕심을 비우는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나라는 존재를 정의해야 합니다. 나는 내가 생각해온 그 나가 아니어야 합니다. 내가 생각한 자신이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신 자신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을 찬양하다가(사43:21)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존재(전12:7)입니다. 이 본래의 뜻에 합당치 않은 목적과 모습은 모두 버리는 것이 가난한 심령입니다. 사람들이 종종 마음을 비웠다는 표현을 하는데 실상을 보면 제대로 비우지 못한 이유로 인해 늘 아무도 모르게 괴로워합니다. 마음을 비워 본 사람은 마음을 비운 뒤 오는 평온함을 압니다. 뭔가를 꽉 붙잡고 있다가 아무 미련없이 그냥 놓아버리는 겁니다. 놓았는데 아직도 내맘에 미련이 남아있거나 아쉬우면 그건 아직 놓은 게 아닙니다. 전혀 아깝지 않아야 합니다. 후련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놓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비전가족 여러분. 진정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심령이 가난해지기 바랍니다. 텅빈 깨끗한 창고가 되기 바랍니다. 거기 말씀으로 채우는 역사가 일어나도록 하나님께 순결한 영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의미의 부요한 인생이 시작됩니다.
우리가 먼저 구해야 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두 번째 덕목은(5:5)
2. 온유함입니다.
마5:5절에서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먼저 구해야 할 하나님의 나라에도 나라의 기본요소는 주권과 국민과 영토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엔 문제가 없고 하나님의 백성도 있는데 하나님의 영토는 온유함으로 확장된다는 사실입니다. 온유함은 부드럽고 유순함을 말합니다. 사실 온화한 성품은 언제든지 많은 이들을 사로잡습니다. 그런데 사로잡히는 자가 기분이 나쁘질 않아요. 온유는 모든 것을 이겨냅니다. 대단한 능력이 부드러운 말과 부드러운 눈빛과 부드러운 몸짓에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를 말할 때 겸손을 떼어놓고 말할 수 없습니다. 겸손은 남을 나보다 훌륭하게 여기며 나를 낮추는 공손함입니다. 겸손은 성도의 매력 중에 가장 아름다운 매력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기억 속에 늘 훈훈하게 남아있습니다. 많은 사람들 기억 속에 아름다움으로 남아있는 저와 여러분이시기 축복합니다.
잠3:34절을 비롯한 성경 곳곳에서 겸손한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고 증거합니다. 또한 시22:26에선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라고까지 증거하고 있습니다. 겸손한 자에게 영육간 풍족하게 채우시는 하나님이신 줄 우리가 믿습니다. 한경직목사님도, 죤 칼뱅도, 어거스트 등 많은 선지들이 외친 겸손입니다.
이렇듯 겸손은 성도들에게 백번 주장해도 부족한 으뜸가는 덕목입니다. 그러나 이 귀한 덕목을 자칫 오용하면 교만이 될 수 있습니다. 결단이 무너져 게으르고 용기가 없음이 겸손을 가장하면 교회 안에서도 일체의 사역을 피하게 됩니다. 겸손이 지나치면 교만입니다. 또 한편 주의해야 할 일은 겸손해야 한다며 비굴해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몫으로 남겨진 책임을 이리저리 피하고. 나서야 할 때 숨어버리는 비겁함입니다. 때와 장소에 맞는 겸온함과 담대함을 우리에게 주실 주님을 찬미합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자에게 반드시 찾아오는 것이 있습니다.(5:10)
3. 의를 위하여 받는 핍박입니다.
본문 10절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합니다.
의를 위하여 받는 박해란 신앙을 잘 지키려다가 만나는 모든 고난입니다.
바울사도는 골로새교인들에게 편지(골1:24)하기를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했습니다. 신앙과 연결되는 모든 고난과 핍박을 바울은 기뻐했습니다. 무엇이 우리와 다릅니까? 교회를 위한 핍박과 고통들이 바울에게 있어서는 결코 헛되지 않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다가 혹 참기 어려운 어려움이 있습니까?
현장에서 함께 하시며 보셨고 들으셨고 불쌍히 여기시는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벧전 2:19-20절에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오.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답다고 합니다. 사람이 살면서 여러 가지 이유로 박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금방 읽은 베드로전서 2장 19-20절에 의하면 아무 이유도 없이 억울하게 받는 고난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생각하며 잘 견디면 이는 하나님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이라고 합니다. (아름답다 : 그 안에 꾸짖을 게 없이 흡족하여 감동을 준다.)
또 데살로니카에서 핍박받는 성도들에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살후1:4~5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고난 앞에서 하나님을 생각하며 참으시기 바랍니다. 이를 갈며 이 원통함을 내가 무엇으로 갚을까 하며 분개한 마음이 우리가운데 없을 줄 압니다.
함께 예배하는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의 행불행은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통치가 어디까지 이뤄지고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재단하고 책임지려는 일은 무모한 일입니다. 모든 삶의 크고 작은 문제들을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의뢰하시고 자신을 살피기 주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함으로 여러분 심령 안에 하나님만을 간절하게 구하는 가난이 이뤄지기 바랍니다. 마음을 비우되 아무것도 없어서 오직 하나님만을 구하는 심령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온유하고 겸손함으로 주의 다스리심을 기뻐하세요. 온유한 자는 아무도 그를 어찌할 수 없습니다. 참자유가 온유한 자에게 있습니다.
끝으로 여러분이 당하는 모든 괴로움을 주님의 불같은 눈동자 앞에서 토로하시기 바랍니다. 그분이 늘 여러분 곁에서 지켜보고 계십니다. 어떠한 고통도 우리 좋으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잘 참아내세요.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며 깊이 사모하는 가운데 당하는 고통은 우리를 놀라운 신앙의 경지로 이끌어 갑니다. 삶은 영적전투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에 진력을 다하는 복이 넘치시기 기대합니다. 아멘.
'주일강단'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1.11.14.주일예배<벧전1:23~25. 낙엽의 계절, 가을> (0) | 2021.11.16 |
---|---|
2021.11.07. 주일예배<눅19:28-31. 어린 나귀> (0) | 2021.11.07 |
2021.10.24. 주일예배(히12:3-10. 연단과 평강) (0) | 2021.10.24 |
2021.10.17. 주일설교(렘9:23~24. 자랑할 일) (0) | 2021.10.17 |
2021.10.10. 주일예배(요4:39~42. 찾아오셔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0) | 2021.1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