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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21.11.07. 주일예배<눅19:28-31. 어린 나귀>

by 설렘심목 2021. 11. 7.

2021.11.07. 주일예배<19:28-31. 어린 나귀>

오늘 말씀은 주님이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시려고 작은 나귀를 풀어오게 하시는 장면인데 좀 특이합니다.

새끼나귀의 임자와는 상관도 없이 대뜸 가서 끌러오라는 겁니다. 일상적이지 않은 일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도 여전히 오늘 설교 말씀으로 우리를 깨우쳐 복된 길로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주의 영원불변하는 소원은 무엇입니까? 믿고 구원받은 당신의 자녀, 우리가 세상에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당신의 영광입니다. 오늘 본문도 우리에게 전하려는 귀한 생명의 소식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이 끌고 오라는 어린 나귀는 어떤 존재였습니까? 30절입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새끼나귀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1. 아무도 타보지 않은 매여 있는 새끼나귀입니다.

1) 등위에 사람을 태워본 일이 없는 나귀입니다.

이 어린 나귀는 아직 일을 해보지 않았습니다. 여물값도 못하는 어린 것입니다.

우리 가정에도 아직 어린 자녀들은 탈없이 잘 자라며 잘 배우는 게 일입니다. 일하고 돈을 버는 건 다 커서 하는 일입니다. 어린 나귀는 한번도 사람을 등에 태워본 적이 없습니다. 주님은 이런 어린 걸 찾으셨습니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은 누구나 두렵고 불안히며 서툴고 위험한 호기심만 있습니다.

2) 아직 어린 새끼나귀입니다.

어리다는 것은 미숙함은 물론 시키는 대로만 하며 배우는 때를 말합니다. 자신을 온전히 어른이나 주인에게 맡기지 않으면 안전과 장래를 보장받지 못합니다. 강아지나 애기나 무릇 어린 것들을 보면 다 살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얼마나 귀여움을 떨며 사랑받게 하며 매달리는지 모릅니다.

어린 것들은 누가 좋은 걸 주고 편하게 해준다는 걸 너무 잘 압니다. 그래서 마치 포도송이가 가지에 달라붙어 있듯이 성장합니다. 벧전 2:2절에는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합니다. 생명줄을 놓치면 어른이나 애기나 짐승이나 다 죽습니다. 성도에게 생명줄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복음뿐 인줄 믿으시면 아멘입니다.

3) 매여 있는 어린 나귀입니다.

아직 지각이 없어 스스로는 아무것도 못 하는 어린 나귀는 주인이 정해준 거기 잘 묶여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물속에 들어간 잠수부의 산소줄처럼 속박이 아니라 보호입니다. 풀어놓으면 위험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주인이 누구냐는 겁니다. 어린 나귀뿐입니까? 모든 인생이나 짐승이 임자 잘 만나야 합니다.

누구를 그리워하다가 누구를 만나느냐로 그 사람의 삶이 결정됩니다. 본문에는 어린 나귀의 주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없습니다. 나귀를 풀 때 어찌하여 나귀를 푸느냐고 임자들이 묻고 이어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자 일체 다른 말이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곧 생명의 명령입니다. 우리를 묶고 있는 여러 속박도 주께서 우리 안에 오시면 저항치 못하고 잠잠히 우리를 주께 내드릴 줄 믿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뭘 원하시면 이유를 묻지 않기 바랍니다. 주 앞에는 오직 아멘과 할렐루야와 찬송만이 우리의 몫입니다.

 

사랑하는 예배자 여러분. 저와 여러분 과연 어디 누구의 무슨 줄에 매여 있습니까?

주인도 중요하지만 묶여 있는 줄이 무엇이냐는 것도 상당히 중차대한 것입니다.

혹 주인이 가진 돈이란 줄로 매여 있을 수도 있으며 혹 주인의 명예나 권력의 줄에 묶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최고의 줄은 무엇입니까? 사랑으로 고백하는 믿음과 신뢰의 줄에 매이는 것입니다. 어떤 외적인 조건보다 그냥 그 사람 자체가 훌륭하여 매여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하고도 평화로운 관계의 줄입니다.

구약시대 기쁨의 해, 희년(喜年)7×7=49년이 지나면 매였던 종들을 풀어주는 기쁨의 해라는 겁니다. 그때 주인을 떠나기 싫어하고 주인 곁에 계속 머물기 원하는 종은 귀에 구멍을 뚫어 고리를 답니다. 당신에게 이렇게 꿰여 계속 묶이기 원한다는 충성과 존경과 애정의 표시인데 귀고리의 유래입니다.

주인에게 감동해 주인의 어떤 조건보다 그냥 주인어른이 좋아서 스스로 묶이고 싶은 겁니다. 혹 주인도 종이 흡족하면 종의 멍에를 벗기고 자녀의 신분을 주어 양자가 되기도 합니다.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부족해도 나무라지 않으시고 끝까지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께만 매이기 원합니다. 우리가 서러워할 때 말없이 다가오셔서 눈물을 닦아주시는 주님의 영원한 노예 이젠 자녀의 신분까지 주셨습니다.

주님이 풀어주지 않으면 아무 곳도 가지 못하는 행복한 노예,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되신 그리스도 외에 어떠한 것에도 묶이지 않고 자유롭습니다. 환경과 외모에서 자유롭고 명예와 물질에서 자유롭습니다. 특별히 유한한 육신의 100 평생 안에 갇히지 않습니다. 진정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겁니다.

 

빨강머리 앤, 어린 비발디는 기관지천식으로 늘 숨쉴 때 쇳소리가 났습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나 여기저기 귀족파티에 불려가서 그들이 원하는 곡을 연주해야 합니다. 중년이 되어 훌륭한 연주가가 된 비발디는 어느 날 큰 공연에서 감동의 연주를 합니다. 여기저기 찬탄의 브라보우가 터지는데 이런 말이 들립니다. “역시 악기는 비싸야 해.” 비발디는 바이올린을 바닥에 내던지고 발로 밟아 버립니다. 찬물을 끼얹은 듯한 객석을 향해 이 악기는 연습용입니다. 악기보다 정신이며 열정과 사랑입니다. 저는 바이올린과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고상한 척하던 부유층 관객을 압도한 건 악기가 아니라 비발디의 음악혼이었습니다.

그 부서버린 악기가 제 손에 들어오면 얼마나 불편한 소음이 날까 생각합니다. 누구 손에 붙잡히는가?

우리 인생이라는 악기, 예수 손에 붙잡히기 주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낼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이웃을 탓하기 전에 이웃이라는 악기를 연주하는 내 사랑과 인격으로 담아내는 연주를 연습해야 할 때입니다. 아내를 탓하기 전에, 남편을 탓하기 전에, 아이들을 탓하기 전에 역시 그들을 연주하는 자신의 덕을 살피면 좋겠단 생각을 해봅니다. 소리 잘나는 이웃 악기 탐낼 거 없습니다. 내 솜씨 바로 잡으면 됩니다. 솜씨 변변한 사람 있습니까? 주의 말씀이 내면에 파고들 때 드디어 사람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완벽한 솜씨를 경험합니다. 사랑이라는 묘약이 신약과 구약을 품고 우리 내면에 퍼져가야 합니다. 그것은 얼마나 놀라운 기쁨인지 모릅니다.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세요.

주님 내 안에 오셔서 관계의 아름다운 연주를 일으켜 주소서. 아멘.

 

여러분. 우리가 무엇에 매여 있든 주님은 상관치 않습니다. 그분이 쓰시겠다면 그거로 끝입니다.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2. 그리스도의 주권에 아무도 항변하지 못합니다.

 

매였던 나귀를 풀 때 임자들이 어찌하여 나귀새끼를 푸느냐고 묻습니다. 제자들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주께서 쓰시겠답니다.” 그게 끝입니다. 그냥 예수께로 끌어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등위에 걸쳐놓고 길에 펴 놓았습니다. 본래 진리 앞에는 반문이 없는 게 맞습니다. 진리 앞에는 그대로 따르는 것만이 답니다. 진리이신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으로 고요하게 다가오십니다. 조용히 다가오실 때 속히 맞아드려야 합니다. 외면하면 그분은 조금씩 소리를 내십니다. 작은 소리를 듣고 외면하면 점점 더욱 큰 소리로 다가오십니다. 큰 소리란 큰일이 일어날 때 들리는 소리입니다.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대통령께서 하와이로 망명길에 오르며 온 국민에게 한 말이 있는데 이 말을 유언이라고 하며 하신 내용이 뭡니까? “자유하라고 자유주셨으니 다시는 종(유물무신론을 근거한 공산주의)의 멍에를 지지 말라.” 5:1절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이신 주님은 진리십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냥 끌러오라고 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새끼나귀는 예수께 끌려 왔습니다. 능력도 없고 어디 묶여 있는지 주인이 누군지도 알지 못한 채 그냥 묶여서 주는 밥이나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가 어딥니까? 예수찬양하고 예배드리는 예배당 아닙니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의 구원이여. 우리의 노래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우리가 예수 믿은 거 우리의 노력도 아니요, 우리 뜻도 아닙니다. 어느 날 보니 예수 믿고 있습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에 우리의 공적이 없습니다.

여러분. 값없이 받은 것은 다 빚입니다. 우리는 모두 복음에 빚진 자로 살아갑니다. 복음에 빚진 자는 마땅히 전도자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만나 그리스도께 매여서 평생 저와 여러분 아름다운 신앙인, 선포하는 진리의 나팔수로 사시기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