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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21.10.24. 주일예배(히12:3-10. 연단과 평강)

by 설렘심목 2021. 10. 24.

2021.10.24. 주일예배(12:3-10. 연단과 평강)

믿음의 장이라고 하는 히브리서 11장은 오직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영혼이나 육체나 여러 능력과 기쁨을 쟁취하고 그 자손들과 함께 하나님의 기업이 된 믿음의 선지들의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들이 어떻게 그러한 모진 고난가운데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고 승리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믿음의 원리적인 부분 일부를 짧게 살펴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 3절을 함께 읽습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오직 주의 영광에 동참키 위하여,

 

1. 피곤해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피곤해도 영원하신 하나님의 실존 그 자체를 먼저 생각한다면 상당부분 참아낼 수 있습니다. 금방 본문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의 패역한 죄악들을 용서하신 것에 비한다면 우리가 참는 것은 백사장의 모래알맹이보다 작을 겁니다. 얼마나 많이 참아주셨습니까? 하나님이 세우신 자를 돌로 치고 톱으로 썰어 죽이고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죄악속에서 이스라엘은 죄를 범했지만 하나님은 그때마다 참고 기다려주셨습니다. 그렇게 죽어간 순교자들은 알고보면 하나님의 전령들이었습니다. 사신들입니다. 한 나라의 사신이 본국의 왕이 전하는 서신과 선물을 갖고 이웃 나라에 가면 마치 왕이 온 것처럼 특별한 예우를 하게 돼 있습니다. 그 사신을 멸시한다는 것은 왕을 멸시해서 국교를 단절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끝내 우리를 보살피셔서 악한 것들로부터 보호하고 죄악에 물들지 않도록 날마다 이모저모로 인도하고 계신 끝없는 사랑이십니다. 이 생명의 하나님이 변함없이 당신의 대사들을 보내고 계십니다. 많은 선지자들이 있었고 왕들이 있었고 일꾼들이 있었습니다. 저들은 물론 피곤했습니다. 인생살이 어디 있어도 피곤하기는 같지만 세상은 죽음을 향한 불안과 곤고요, 주안에 있는 피로는 성화를 이루며 주의 나라를 일으키는 수고입니다. 먼저 자신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노력입니다. 피곤이란 피로에 지쳐서 늘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늘어지면 만사가 성가싫고 오직 누워 쉬고 싶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피곤해도 낙심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피곤이 영원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속히 지나가는 겁니다. 피곤이 지나가면 주의 영광과 거룩함을 만나게 됩니다. 피곤하면 낙심하게 된다는 등식을 우리 생각 안에서 모두 지워버리기 바랍니다. 피곤은 단순히 피곤할 뿐 하나님의 기쁜 날들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가로막거나 멈추게 할 순 없습니다. 7~9절을 함께 읽습니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하지 않겠느냐.” 오직 주의 영광에 동참키 위하여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은,

 

2. 징계를 잘 참아 주의 기쁨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길을 가다가 어떤 모르는 소년이 담배를 물고 길거리에 침을 뱉고 후질구레한 친구들과 낄낄대면서 가는 걸 봤다면 여러분 가슴이 그렇게 메어지도록 아픕니까? 그냥 누구네 아이인지 몰라도 안됐다 싶은 정도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게 바로 내 아들이라면 그건 세상이 무너지는 충격입니다. 당장 모든 계획을 취소하고 아들을 어찌 바로 계도할 것인가 고민하며 결판을 내려 합니다. 그 부모는 자녀교육의 실패를 눈으로 본 현장에서 말로 할 수 없는 절망과 위기를 느낍니다. 자녀를 붙들고 진실한 눈물을 흘리며 호소할 겁니다. 미혼모보호소에서 16살짜리 어린 딸을 데려오려고 가서 딸의 손을 잡고 말없이 한참이나 울먹이는 부모의 모습을 TV에서 봤습니다. 이게 부모입니다. 그렇게 자녀를 붙잡고 눈물을 흘려서라도 바른길로 가게 하는 게 부모입니다. 아들은 훗날 당시 아버지의 회초리와 눈물을 기억하고 더욱 부모님을 공경할 겁니다.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해도 공경했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하지 않겠느냐.” 11절 함께 읽습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3. 징계로 인한 연단을 잘 받으면 의와 평강에 이릅니다.

 

값을 치른 것만이 내 것이다.” 제가 좋아하는 말입니다. 징계는 에덴에서 추방된 이후 죄성을 품고 태어난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부족과 허물에 대한 피할 수 없는 대가입니다. 그런데 징계로 연단 받으면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는다고 본문은 증거합니다. 또 롬5:3절에서도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안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징계로 인한 연단은 그 출발이 자신의 불찰과 허물에 있음을 우리가 겸허히 인정한다면 주신 말씀대로 잘 참아서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어야 주님 기뻐하실 줄 압니다. 의는 세상의 속되고 헛된 것을 멀리하여 이뤄가는 경건입니다. 그리고 평강은 환경에 무관하게 믿음으로 유지하는 편한 마음입니다. 먼저 연단을 잘 견디어 낸 자신이 이런 의와 평강을 누리고 있어야 이를 주변에 전하고 나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평생 지어져 가는 하나님의 집 교회들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딤전3:15b절에 밝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처소에 의와 평강이 유지되는 일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려면 우리를 바르게 하시는 채찍을 피하지 말고 연단을 잘 이겨내 그로 인한 성숙과 성장이 의와 평강으로 드러나는 일에 우리의 몸을 드려야 합니다. 14절에도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특별히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주변에 심어놓아 주님은 우리를 키워 가십니다.

8절에 징계없는 아들은 친아들이 아니라 사생아라고까지 밝힙니다. 이유야 어땠건 우리가 받는 징계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인 줄 믿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이 부르시고 소유삼으신 하나님의 집, 의와 평강의 집입니다. 세상에선 나그네요. 교회에선 기업을 받은 장자권의 친아들이 의와 평강의 집이 되기 위해 여러 가지 허물로 인한 연단은 유업자, 유산상속자가 되는 과정입니다.

성도여러분. 제자리로 돌아감으로 비로소 가능한 것이 샬롬이라는 것 우린 압니다. 교회중심, 예배중심, 성경중심의 삶이란 곧 샬롬을 말합니다. 제자리로 되돌아가는 운동은 한 개인이 처음에 가졌던 주님향한 첫 마음과 그날 품었던 비젼, 그리고 한 단체가 처음 하나님께 올렸던 서원의 깨끗함을 다시 찾자는 것입니다. 이는 무너진 에덴의 원형을 찾는 운동입니다. 힘든 일은 피곤하지만 그로인해 낙심하는 일이 없을 줄 압니다. 교회는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찾는 위로여야 합니다. 지쳐있는 지체들을 주의 마음으로 위로하는 영광이 있길 축복합니다. 이제 말씀을 받았으니 그러므로 피곤과 낙심이 아무 상관이 없는 여러분의 믿음이 되었습니다. 날로날로 영글어갈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도리어 피곤함이 복의 시작이 되고 피곤할수록 낙심대신 자신과 이웃을 위로하여 주의 나라와 소망이 샘솟는 우리 모두인 줄 믿습니다. 아멘대로 될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