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10. 주일설교(요4:39~42. 찾아오셔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한 후 수도였던 사마리아는 앗수르의 강제 이주와 혼혈정책에 따른 아픈 역사는 병자호란에서 환향녀의 유래처럼 차마 다 하기 어려운 많은 사연이 있습니다. 훗날 바사왕 고레스에 의한 바벨론 포로귀환 후 성전재건이 이뤄지는데 이때 동참을 원하는 사마리아를 혼혈족이란 이유로 거부하자 사마리아는 성전건축 반대를 비롯해 모든 유대정책에 반대하며 사마리아와 유대는 원수처럼 지냅니다.
너희에게 시온이 있냐? 우리에겐 그리심 산이 있다. 너희에게 헤롯이 지어준 성전이 있냐? 우리에겐 야곱의 우물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여긴 아브라함이 첫발을 디딘 약속의 땅 세겜이라는 겁니다. 너흰 우릴 무시해도 우린 야곱의 축복을 대대로 누리고 있는 선민중 선민이라는 거지요. 그쪽을 보곤 침도 뱉지 않는 사마리아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사마리아의 자존심, 야곱의 우물에서 한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다.
깊은 상처로 인해 아무도 나오지 않는 정오에 나온 여인, 지칠 대로 지친 그는 자신의 인생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다 줄 한 놀라운 분을 만납니다. 수치의 땅, 오욕의 역사를 품고 불명예의 땅으로 전락한 사마리아, 아무도 들어가지 않고 돌아가는 그 땅에 주님은 찾아가셨습니다. 우물가에서 물길러 나온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건넵니다. 당시 관습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파격적인 일입니다. 진리는 언제나 인간의 관습과 제도에 매이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신 후 그 여인이 전하는 주님의 소식에 동네 사람들이 모두 구원받는 전도장면을 소개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을 구원한 주님은 어떤 분입니까? 본문 39절에 “여자가 말하기를 -내 모든 과거 행적을 그가 정확히 다 알고 있다.-고 하자 그 동네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1. 인생을 밝히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자신의 과거를 모두 밝히자 여인은 놀라 동네로 달려가 이 소식을 전합니다. 그들은 어떤 분이 자신의 모든 과거를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는 놀라운 한 여인의 말에 모여듭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는 더욱 많은 이들이 주님을 믿고 그 말씀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이 얼마간이라도 동네에 머물기를 원합니다. 거기서 이틀을 묶게 됩니다.
히브리서 4:13절을 봅니다.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그렇습니다. 만물이 주님 앞에 드러나지 않은 것이 없는데 한 인간의 속내를 어찌 모르시겠습니까?
시편기자는 139:13에서 이렇게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인생은 하나님 앞에 설 때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을 밝히 아시는 주님 앞에 놀랍니다. 그리고 주님의 진리 앞에 크게 감격했습니다. 여인은 변했습니다. 사람을 피하던 자가 사람 앞에 달려나간 겁니다. 숨어살던 자가 소리치며 달려가 전합니다.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복음은 사람을 감동으로 흥분하게 합니다. 본문 28절입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물동이를 버려두고 달려간 겁니다.
복음은 모든 것을 뒤로하고 진리 앞에 순복하게 합니다. 그리고 전하게 됩니다. 왜냐면 복음이 나를 밝히고 너를 밝히고 세상을 밝히면 그간 모르고 견디어온 죄악의 날들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죄악과 수치의 함정에서 구원하여 의의 길, 영생의 길, 기쁨의 예루살렘길로 인도합니다.
예수그리스도는 복음이십니다. 복음이 친히 저주받은 땅, 슬픔의 땅, 금기의 땅, 사마리아까지 친히 복음이 되어 찾아가셨습니다. 오늘 복음이신 주님이 여러분의 메마른 심령 안에 찾아주신 줄 믿기 축복합니다.
두 번째 사마리아에 찾아오신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계3:20절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 먼저 찾아오셔서 친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 먼저 찾아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이렇게 언제나 우리에게 먼저 찾아오십니다. 죄인이 있는 곳이라면 주님은 주저하지 않고 방문해 주십니다. 막2:17절에서 주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십니다.
죄인인 우리는 늘 우리를 찾으시는 그분의 음성에 즉시 반응해야 합니다. 사마리아여인은 “물을 좀 달라.”(요4:7)는 예수님의 주문에 즉시 반응했습니다. 부끄러워 피하거나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진리의 선포를 받고 구원받는 큰 영광을 얻게 됩니다. 말씀 중에 찾든지, 환경을 통해 찾으시든지, 관계를 통해 찾으시든지, 환상 중에 찾으시든지, 고통 중에 찾으시든지 주님이 찾으실 때 머뭇거리거나 피하지 않는 우리 모두이기를 바랍니다.
2) 언제나 스스로 증명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본문 34절에서 주님은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 주님의 양식은 인간처럼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님은 당연합니다. 주님의 양식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며 이것은 십자가 대속의 사역과 교회운동을 통한 복음선포입니다. 그리스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그분은 말씀으로 스스로 증명하시고 선포합니다. 입술로 말씀하셨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언약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아들로 만천하에 증거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주님이 이 땅에서 하실 일을 모두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주님은 끝없이 샘솟는 사랑으로 늘 우리 곁에서 우리를 지켜주시며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분의 한결같은 바람은 우리가 속히 돌이켜 주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마리아를 찾아주시고 말씀하신 영생의 주님 앞에 우리가 해야 할 우리의 몫은 무엇입니까? 본문 41~4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3) 들은 자는 믿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소식을 전한 것은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처음엔 여인의 말을 듣고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여인의 말은 복음을 전한 소식이지 복음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친히 하시는 복음을 듣고 비로소 그가 세상의 구주인 줄 알게(42절) 된 겁니다. 영생을 알고 영원한 새 생명을 받았으며 심판에 이르지 않는 구원에 이른 겁니다. 구원이라는 말은 도움의 손을 내밀어 구해냈다는 것이고 구원받은 자는 당연히 함정이나 구덩이에 빠졌다는 걸 말합니다. 인생들은 모두 선악과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을 알지도, 볼 수도 없는 죄 가운데 놓여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에덴의 실수는 선악과의 내용이 아니라 말씀 앞의 불순종이란 사실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고전13:12절에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 바울사도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주신 예수님을 우리 모두 머지않은 장래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반드시 얼굴에 얼굴을 직접 마주하며 뵙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비전인 여러분. 진리를 듣고 믿는 자는 사마리아인들처럼 항상 주님을 개인의 구원주로 영접해야 합니다. 주님은 세상과 역사의 주관자시며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지금은 그 모든 것 가운데 교회를 통해 구원 사역을 이끌어가고 계십니다. 구원 사역의 주체는 복음이요. 복음은 예수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설교 선포는 곧 자신을 드러내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세계사가 무엇에 이끌려갑니까? 정권입니까? 이념입니까? 경제-군사력입니까? 고매한 철학입니까? 짧게는 그렇게 보입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복음이 이끌어갑니다. 복음은 교회를 통해 선포되고 선포된 복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것입니다. 아들을 주시고 구원하신 십자가의 사건이, 결국 인류사를 통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세계사뿐 아니라 저와 여러분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었던 자가 새로 태어나서 새 생명으로 하나님을 노래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영생을 받은 자만의 기쁨입니다.
시대와 공간, 시공을 초월하시는 주님이 2000년 전 사마리아뿐 아니라 오늘 저와 여러분을 방문하십니다. 뛰는 가슴으로 맞으시고 주님이 열어주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경험하시기 주님 이름으로 예배자 여러분을 다시한번 축복합니다. 아멘.
주여, 우리도 사마리아 여인처럼 더는 야곱의 우물을 자랑하거나 의지하지 않고 주의 입에서 나오는 생명샘에 의존하여 깊고도 영원한 생명을 구하게 하소서. 자신과 주변을 자랑함으로 자신의 수치를 가리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우리의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살펴 돌이키고 온전한 주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소서.
모두에게 외면당해 뜨거운 정오에 물을 구하던 여인처럼 메마른 세상에서 갖가지 장애를 버거워하며 여기까지 온 당신의 가여운 영혼들이 오늘도 이렇게 예배합니다. 우리를 말씀의 생수로 오늘도 구원하시는 주여, 주님의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어 세상 평안과 위로 내게 없어도 예수 오직 예수뿐임을 고백하오니 크신 계획 다 볼 수도 없고 작은 고난에 지쳐도 주께 묶인 나의 모든 삶 버티고 견디게 하소서.
순간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수치스럽고 악한 죄인임을 발견하게 하소서.
우리의 모든 것 다 주께 맡겨드리니 참된 평안과 위로로 우리를 지켜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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