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06.주일예배(히12:1~4. 힘겨운 길, 예수를 바라보자.)
이 땅에 몸을 입고 나와 한 평생을 살아도 사람마다 마음과 생각에 따라 각기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을 보면서 사람의 내면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됩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믿어 신앙인이 되었다는 것, 놀라운 은총입니다. 한 지붕아래 한 솥밥을 먹고 살면서 분명한 역사적 사실을 전해도 믿지 않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것을 볼 때 참 안타깝습니다. 이렇게 인생들이 저마다 가는 길이 달라도 한 가지 같은 것은 모두 고통과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겁니다.
육신을 지니고 살아가는 인생길에 어차피 당할 고통, 어차피 맞이할 죽음이라면 믿음의 주요, 영생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주를 위해 살고 주를 위해 살다가 당하면 모든 일, 그게 가치요, 보람이며 그렇게 살다 떠나면 그 죽음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생명길인 줄 믿습니다. 본문 한절씩 함께 읽으면서 주신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1절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1.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이 있습니다.
예수 따라 가는 길은 사실 외로운 길이 아닙니다. 앞서 간 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있습니다. 기독교사에 빛나는 많은 선진들의 실화는 감동을 줍니다. 그리고 성경의 인물들도 대개 모진 학대와 핍박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승리한 사람들입니다. 그들도 처음 시작은 매우 부족해서 우리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고난은 대단한 승리의 영광으로 마무리를 합니다.
본서 11:16에 믿음으로 승리한 이들을 증거하는데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어떤 고난이 와도 여기는 잠시지만 곧 너무 아름답고 좋은 나라에 내가 곧 들어가게 된다는 사실을 사모하니 억울함도 두려움도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오직 주를 위해 고난을 잘 참는 자를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그들의 하나님이심을 자랑하시고 또 그들을 위해 한 성을 준비하셨다고 합니다. 이른 바 시온성입니다. 시온성은 여기처럼 부조리, 부패, 불평등과 거짓과 모함술수가 판을 쳐서 화딱지 나는 곳이 아닙니다.
시온성은 완전하신 주님이 직접 다스리시는데 인간 왕처럼 모습을 보여 나타나지 않고 마음을 주장하셔서 모두 평온하고 거룩하고 행복한 곳입니다. 지금 상상이 어렵다면 그게 정상입니다.
그리고 본문은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피하고 참으며 믿음의 길을 갈 때에 누구를 바라봐야 한다고 합니까? 2절을 함께 읽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2. 우리를 온전케 하셔서 바른 신앙인이 되게 하시는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허다한 많은 믿음의 증인들이 있고 말씀을 세세히 풀어주는 선지자가 있어도 믿음을 키우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지극히 인격적이십니다. 온화하십니다. 그러나 불의와 악이 쌓여 진노할 땐 소멸의 불이되어 모든 것을 태워버립니다. 군더더기와 불결을 태운 뒤 거기 남겨진 정금같은 신앙인격으로 온전한 믿음을 키워 가십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를 바라보자고 한 본문의 권면은 믿음을 주장하시는 주님의 주권에 성도의 성실한 노력을 올려드림으로 믿음의 성숙을 열어가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숙한 믿음으로 이겨낼 수 있는 힘든 여정인 십자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우리와 같은 육체로 십자가를 받으실 때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십자가를 참으실 때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해 그러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등산해보신 분들은 정상에 오르기 전 보통 깔딱 고개 두어 개는 항상 통과해야 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곧 죽을 것 같이 숨이 깔딱 넘어가서 붙여진 도봉산 어느 고개입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선물을 받으려면 일단 어깨에 짐을 메고 언덕을 넘어 선물 줄 데로 가야 합니다. 숨이 깔딱 넘어가는 깔딱 고개가 도봉산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삶의 굽이굽이 능선마다 우릴 기다리고 있지요. 그런데 깔딱 고개는 죽으라고 있는 게 아니라 그 고개만 넘으면 기막힌 선물이 날 기다린다는 시그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이 가신 길은 평강과 영광과 영생의 가장 정확한 길인 줄 우리가 믿습니다. 그 길은 어떤 길이라고 성경은 말합니까? 10:20절에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놓으신 새로운 살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들의 육체마다 주어진 십자가의 몫을 두려워 피해선 안 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영광으로 가는 길목에 피할 수 없는 과정이요, 꼭 필요해서 허락된 길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하나님보좌 우편에 앉는 길이 십자가를 통과하는 것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 앞에 놓인 어떤 십자가도 주님의 영광과 더 나은 사역과 삶을 위해서 거쳐야 하는 필수훈련제목인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절입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3. 용서할 수 없는 자를 용서하신 예수를 생각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어둠의 세상에 빛으로 오신 주님을 세상은 깨닫지 못하고(요1:5) 영접하지도 않았다고(요1:11)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결국 메시아로 오신 주님을 십자가에 달아 죽이는 엄청난 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용서를 빌었습니다. 이 역시 우리가 본받고 따라야 할 기독신앙의 중요한 덕목입니다. 고통을 당하되 고통을 가한 가해자를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은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에겐 버거운 부담이 아니라 기쁨으로 따라야 할 모본입니다. 어떻게 기쁜 마음으로 해악을 끼친 자를 용서합니까? 어떤 형태로든 보상하시는 주님이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고 주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용서하기 힘든 자를 용서하고 믿음을 온전케 하는 일은 오직 예수님의 실존 앞에 깊은 교제를 통해 자신이 주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있다는 영적 사랑의 포만감이 있어야 합니다. 배부른 자가 양보한다는 말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그러면 피곤해서 낙심하지 않을 수 있다고 본문은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여러분, 진정 우리가 낙심치 않고 거역한 자들을 참고 기다려 준 적이 있는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4절입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않고”
4. 죄와 싸우는 일은 전적으로 우리들의 몫입니다.
성도와 교회의 사명 중 눈에 뵈지 않는 가장 중요한 사역은 여전히 자신과의 싸움이며 죄와의 싸움이며 세상과의 싸움입니다. 그리고 동시 전도입니다. 본문의 지적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맞서지 않았다고 합니다. 피는 제단에서 희생제물이 흘리는 피, 희생의 피입니다.
즉 희생이 없다는 겁니다. 희생의 피가 없이는 죄의 용서도 없습니다. 중요한 건 죄를 해결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대가를 치르지 않고 구하는 것은 결코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합니다. 거저주신 믿음과 구원에도 최소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말씀을 사모함이 있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성도와 교회가 죄와 싸우기는 하는 데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승리의 기쁨이 적습니다. 희생하기를 싫어해 피를 흘리기까지 싸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씨를 뿌리되 비료를 주지 않고 돌보지도 않으며 풍작을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죄와의 전투도 다른 전투와 같이 전략과 기량이 필요합니다. 계획과 훈련 없이 전장에 나가면 백번 패하게 됩니다. 이기려면,
먼저 1) 죄의 정체를 알아야 합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에 백번을 이긴다는 말은 맞는 말입니다. 죄란 하나님을 등진 채 형성된 모든 것들입니다. 가치관과 기준과 취향과 기뻐하는 것들이 하나님을 빼고 이뤄진 것이라면 다 죄입니다. 간단하게 정리한다면 어느 일이든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보아서 하나님이 과연 이것을 기뻐하실까하는 깊은 성찰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는 내가 문을 열어주기 전까지 맥을 못 추지만 일단 문을 열면 그때부터 내안에 들어와 나를 지배하기까지 쉬지 않습니다. 코앞에 다가온 죄라도 정체를 바로 분석하면 대책을 세우기 쉽습니다. 죄는 내가 가장 간절히 구하는 것을 통해서 접근합니다. 결코 쉽지 않은 상대긴 하지만 이길 수 있다는 믿음만 있다면 얼마든지 이길 힘을 주님이 주셔서 넉넉히 이기게 됩니다.
2) 한번 무너져도 실망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싸워야 합니다. 내 힘으로는 어느 것 하나도 죄와의 싸움이 만만치 않지만 말씀이 앞장선다면 충분히 이깁니다. 주님도 광야시험에서 사단을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자신의 의지보다 말씀이 앞서 죄를 다뤄야 합니다. 말씀은 불변하는 하나님의 불이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3) 죽을 각오로 싸우면 반드시 이길 수 있습니다. 죄와의 싸움은 영적전투라서 예수 안에서 죽고 거듭날 결단하나면 족합니다. 그 결단, 그 믿음으로 이기는 겁니다.
엡6:12절에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고 했습니다. 내면의 전투이기에 무서운 결단하나로 족합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진다는 것은 차라리 죽느니만 못하다는 각오로 죄 앞에 선다면 그 믿음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바로 이 결단이 피를 흘리기까지의 영적전투인 것입니다.
예배하는 여러분. 남은 생애 오직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고 믿음을 부축하시는 예수그리스도만을 바라보기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를 제대로 의지한다면 용서도, 믿음도, 죄와의 싸움도 모두 승리로 이끄시는 예수님을 찬송합니다. 이 말씀 의지하여 힘차고 복된 신앙의 새로운 문이 오늘 열린 줄 믿으신다면 제가 기도할 때 오른 손을 높이 드시기 바랍니다. 함께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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