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23. 주일예배 <갈2:20.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어느 맹인부부가 자선단체의 도움으로 눈 수술을 마치고 붕대를 푼 뒤 첫마디를 합니다. 남편이 “처음 뵙겠습니다.”하자 아내가“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그렇지요. 눈을 뜨고는 처음 뵙는 것입니다. 감았던 눈이 열리면 새 사람을 만나는 겁니다. 예수모르고 살다가 예수만나 영의 눈을 뜨면 전혀 다른 시각으로 아내를 보고 남편과 또 이웃들을 보게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율법은 서로 사랑하라(요13:34)는 새 계명, 주님의 복음으로 정리되고 마무리해야 하는 은혜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율법에 매여 살던 유대인들은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대적하며 예언대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이 후 유대교의 율법적 가르침은 종종 교회 안에 침투해 복음을 방해했습니다. 반면 일부 택한 자들과 그 동안 죄인취급을 받던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되는데 하나님께선 계획대로 바울을 부르셔서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십니다. 그는 충성스런 유대교청년의 한사람이었습니다. 교회를 핍박하고자 다메섹으로 향하던 중 부활예수를 만나 복음을 위해 온 삶을 드리게 됩니다. 세월이 지나 사도가 된 바울은 3차 전도여행 중 유대교의 거짓교사가 교회를 흔들고 있는 것을 염려하고 본 서신을 기록합니다. 본문은 십자가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란 말로 성도들의 믿음과 헌신에 도전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란 성도의 인생에서 뭘 의미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내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라는 주제로 함께 새로운 헌신의 결단을 기대합니다.
내안에 사셔야 하는 그리스도, 그분을 말하기 전 먼저 왜 그분이 내 안에 사셔야 하는지부터 그 절실한 이유를 살펴봅니다.
첫째, 내 안에 있는 나는 누군가에 의해 형성된 자아입니다. 빈 그릇을 구해 거기에 뭔가를 계속 담아 이뤄진 항아리로 보면 이해가 됩니다. 보석을 담으면 보석항아리요, 쌀을 담아놓으면 쌀독이고 된장을 담그면 된장항아리가 됩니다. 나면서부터 스승이 없고 나면서부터 사형에 처할 죄수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져 가는 것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둘째, 그것은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작업, 곧 자아완성이란 과정으로 평생을 거쳐 이뤄져 갑니다.
셋째, 평생 자신의 내면이 누구에 의해 무슨 이유로 살아야 할지를 결정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몸 안에 기생충보더 더 징그럽고 나쁜 일이 지금 우리에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분연히 일어나 결단하게 합니다. 안 그러면 그는 자신을 팽개쳐 방치하는 범죄자라고 해야 합니다. 우린 종종 “그냥 내비도”라는 말로 자신을 지켜갑니다. 다 간섭하면 내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엉뚱한 것이 나를 차지하고 엉뚱한 데로 끌고 가는데 내버려두면 그 결과는 자신이 책임져야하고 결국 비참한 인생이 됩니다. 복중 최고의 복 관계의 복은 그래서 “누군가의 나”인가를 묻습니다.
1. 나를 사랑하셔서 대속의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의 나입니다.
주님이 오신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막 10:45절에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되 더 이상의 표현이 없는 극단의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그렇지요. 대신 죽어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 앞에 사람들은 아무 것도 아끼지 않습니다. 주께서 그렇게 우리 개인 개인을 사랑하십니다. 이제 주님께 무엇을 망설입니까? 주님은 창조주 하나님, 오직 한분이신 유일신이십니다.
여러분 경제파탄에 이른 사람에게 누가 파산대금이나 회생비용의 전액을 대신 갚아준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빚이 많을수록 감동은 클 겁니다. 우리들의 부채는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영혼이 하나님을 떠나 죽은 채로 하나님을 등지고 살다가 결국 지옥불의 영원한 심판을 면치 못할 큰 죄인들이었습니다. 은혜란 자신이 큰 죄인이었다는 예리한 각성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음을 잊지 않으시기 축원합니다.
명성황후가 일본자객의 칼에 처참하게 살해당한지 1년 후 1896년 어느 날 황해도 치하포 한 여관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납니다. 조선인으로 변장한 한 일본인을 조선청년이 명성황후 시해범으로 확인하고 때려죽인 겁니다. 청년은 국모를 비겁하게 무참히 살해한 자를 죽인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포고문을 붙이고 자신의 거처를 밝히고 체포되어 사형언도를 받았습니다. 사형집행 하루 전날 저녁 청년은 일본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석방되어 생명을 구합니다. 승지원의 상소로 고종의 급한 명령이 인천감리 이재정에게 전화한통으로 내려진 것입니다. 청년의 이름은 김창수, 사형언도를 받고 이제 밤이 지나 교도관들 출근하면 형이 집행 된다는 절박한 가운데 고종의 어명은 청년 김창수에게 복음이었습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것을 기념, 이름도 구사일생에서 따온 아홉 구(九)로 바꿉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사형수들이었고 그렇게 사형직전 생명을 구한 특별사면자들, 즉 구사일생들입니다. 우리대신 예수님이 죄 값을 당신의 생명으로 치루셨기에 가능한 구사일생의 인생들, 그래서
2. 내 안에 사셔야 하는 부활예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어디 계십니까? 본문에서 증거합니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할렐루야. 내가 나를 주장치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영광된 승리의 삶을 사실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 드려야 할 줄 압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온다.”고 마태복음 15:18절에서 증거합니다. 우리 안에 주님이 계시면 악한 모든 것들이 쫓겨 나갑니다. 주의 권능이 머물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 안에 성령으로 함께 계심으로 변화 받을 수 있는 우리의 삶은 어떠한 삶입니까?
1)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는 삶입니다.
누가복음 9:23절에서 주님은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것은 심한 고통을 수반한 죽음을 말합니다. 이 죽음은 단순히 숨이 끊어지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모진 고통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자존심의 죽음입니다. 각종 문물과 정서의 죽음입니다. 가치관과 철학과 습관과 취미의 죽음입니다. 세속적 정욕의 죽음입니다. 이른 바, 복음의 맞은편에서 복음을 훼방하는 모든 것들의 죽음입니다. 죽지 않고는 결코 다시 태어날 수 없습니다. 없애지 말고 과녁을 바꾸면 됩니다. 그간 소유했던 문물의 목적이 십자가의 진리를 목표로 재정리되면 됩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께서 먼저 십자가에서 사랑의 본으로 보인 죽음과 부활, 이젠 우리 것이 되어야 합니다.
2) 죽고 다시 사는 거듭남의 삶입니다.
아시다시피 마알러의 2번 교향곡 부활은 약 90분이 가까이 되는 긴 곡으로 매우 구성이 치밀하고 웅장하며 내용이 깊은 곡입니다. 그 부활이란 곡 악보의 표지에는 이런 부제가 달려 있습니다. “부활, 다시 태어나려면 먼저 죽어야 한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스스로도 가끔은 정말 자신이 싫은 게 인간입니다. 딱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싫은 부분을 말하라고 하면 외모를 말합니다. 외모가 아니라 내면이어야 합니다. 어찌하든 다른 모습이길 원하는 겁니다. 진정 다시 나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가슴에서 끓어오른다면 그때는 여지없이 주님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죽고 다시 사는 십자가의 능력을 제게 부으소서.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는 부활의 메시지를 품고 우리 곁에 늘 서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우리가 복음을 붙잡고 권세와 능력이 넘치는 삶을 살려면 부활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거기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못 박는 죽음이 필요합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어드리고 따른다면 우리의 죽음과 거듭남이 결코 어려운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가운데 못 박히는 고통없이 영광의 부활만 소원하는 자가 없을 줄 압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여러분. 십자가는 십자가로 구원받은 우리가 마땅히 바라봐야 할 믿음의 길입니다. 거기 주님이 당한 고통과 피 흘리심이 있고 죽음을 이기신 부활의 찬란한 영광과 참기쁨의 영생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다시 사신 그 주님이 함께 하시면...
(1) 영적이며 성결한 삶이 시작됩니다.
(2) 진리가 내주하심으로 복음을 따라 살게 됩니다.
(3) 복음의 능력으로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자신과 현실을 이깁니다.
(4) 먼저 받은 구원과 복음을 온 땅에 선포하며 전하는 고품격의 삶을 살게 됩니다.
한마디로 줄인다면 내가 생각하고 소망하고 기뻐하는 모든 것이 주님 기뻐하시는 것으로 바뀌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안에 가득한 예수님을 증거하고 표현하는 것이 권세이자 능력이고 가장 선하고 거룩한 삶입니다.
확실히 죽고 확실하게 다시 살아 거듭남의 권세로 이후로는 정녕 세상에 끌려 다니지 않고 세상과 자신을 꾸짖어 결박하는 영적승리의 삶을 사시기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합니다.
제자 된 우리는 주님의 뒤를 따라 주님의 영광뿐 아니라 십자가의 못 박힘까지 따라야 할 줄 아오니 주여 우리에게 풍성한 영의 권능을 내리셔서 오늘 먹이신 말씀으로 죽음을 이기게 하옵소서.
나를 사랑하셔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내 죄를 대신 속하신 그리스도시여, 부활하셔서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며 능력되시니 이제 우리가 더 무엇을 바라리오. 다만 믿음으로 살게 하소서. 예수님 우리 안에 늘 계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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