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16. 주일예배설교<창25:21-26. 모태에서 편이 갈린 쌍둥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15:6)” 여호와께선 당신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로 아브라함을 의롭다하신 뒤 훈련의 세월들을 거치게 함으로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 때 25년을 기다려 얻은 아들이 이삭이고 이삭은 다시 자녀를 얻는데 20년이 지나 60세에 쌍둥이를 낳게 됩니다. 그런데 본문 21절에는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잉태치 못하여 간절히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리브가가 임신하여 자녀를 얻었다고 밝힙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일뿐더러 그 줄기를 타고 메시아가 탄생하게 될 그리스도의 뿌리가 된 족보의 시조입니다. 그리고 이삭은 그 첫 열매였습니다. 그런 이삭이 아비처럼 또 20년을 기다려서야 간신히 기도 끝에 쌍둥이를 얻게 됐다는 겁니다. 남들은 결혼하면 들어서는 생명이 언약의 주인공인 아브라함에겐 왜 이렇게 천신만고 끝에 주시는 걸까? 가슴 부푼 결혼이 자녀가 없음으로 인해 위기감을 느낀 지 이미 오래였습니다. 여기서 이삭의 무던함과 리브가의 신속함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만일 리브가는 무던하고 이삭이 신속했다면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또 후처를 구하는 실수를 저질렀을 것입니다. 모래알같이 무수한 백성을 약속하신 그 민족의 시작이 이렇게 끊길 듯 위태로운 대를 잇게 하신 하나님의 깊으신 뜻은 단 하나,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사이에 반드시 유지되어야 하는 예배의 승리입니다. 인간에게 어떠한 성공도 기도와 예배 없이 이뤄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탐내선 안 될 영적인 함정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해야 할 믿음의 백성들이 이런 영적인 무지가운데 자녀를 얻고 키우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긴 세월 기도하고 인내함으로 자녀를 간신히 얻어 소중한 믿음의 대를 이어가도록 하신 겁니다. 값을 지불한 것만 내 것이란 말씀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이렇듯 믿음으로 구한 것이 생각보다 매우 더디 응답되는 것이 일상생활에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는 기다리는 오랜 동안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 깊은 관계가운데 신실한 주의 자녀로 양육하시는 특별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아울러 그것을 증거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더 좋은 것, 더 많은 것을 주시기 위하여 더 성숙하기 원하시는 주님은 종종 우리를 인생채찍과 사람막대기(삼하7:14)로 치셔서 만족할만한 믿음인격에 이르게 하시는 것을 감사하시기 축복합니다.
22절입니다.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긴 세월 힘들게 기도해서 간신히 얻은 뱃속의 쌍둥이가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한배에서 생명을 얻어 곧 세상의 빛을 볼 형제가 서로 싸우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세상엔 언제나 두 법이 존재하고 있다는 겁니다. 언제나 우리는 이것인가 저것인가 사이에서 갈등하며 주저합니다. 하나님의 법인가 세상의 법인가? 하나님께선 야곱을 택하셨고 에서는 안타깝게도 야곱의 맞은편에서 항상 야곱을 믿음의 사람으로 키우시는데 조력자로 사용하십니다. 본문이 주는 교훈이 가볍지 않습니다. 어딜 가 봐도 의견이 갈려 내편 네편 편을 갈라 국가가 싸우고 단체가 싸우고 개인이 싸우고 태어나 죽기까지 인생은 싸우다가 갑니다. 아이들이 놀아도 편먹고 겨뤄야 재미가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고 에덴에서 추방되면서부터 인생은 편먹고 싸우기입니다. 큰 테두리에서 볼 때 저와 여러분은 무엇과 또 누구와 싸우며 누구의 편입니까? 그렇지요. 예수 편에 들어가 그리스도를 방해하는 자들과 적이 되었고 정의 편에서 불의와 맞서서 싸우는 거룩한 군사들입니다. 주변을 보세요. 적으로 가득합니다. 때로는 자신도 모르게 이적질을 합니다. 피아식별 못하면 자살골을 넣게 됩니다. 낭패입니다.
“곧 모든 불의, 추악함, 탐욕, 악의가 가득함,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대는 자요. 비방하는 자.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 능욕하는 자, 교만한 자, 자랑하는 자, 악을 도모하는 자, 부모를 거역하는 자, 우매한 자, 약속을 어기는 자, 무정한 자, 무자비한 자라. 그들이 이런 자들은 사형에 해당된다고 하나님이 정하신 것을 알고도 자기들만 그리하는 게 아니라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고 하느니라.”-롬1:29-30.
여호수아서 끝장 24절을 읽어보시면 여호수아가 은퇴하면서 마지만 교훈을 내리는데 14~15절은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고 하면서 15절에서 “만일 그게 싫으면 너희 조상들처럼 강 저쪽 신들이나 아모리족속이 섬기던 신을 섬겨라. 오늘 너희가 섬길 신을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그랬더니 백성들이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겠사오니” 찬송 오늘 부른 찬송가 586장으로 우리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1)어느 민족 누구에게나 결단할 때 있나니 참과 거짓 싸울 때 어느 편에 설 건가. 주님 주신 새 목표가 우리 앞에 보이니 빛과 어둠사이에서 선택하며 살리라 (2)고상하고 아름답다 진리 편에서는 일, 진리위해 억압받고 명예이익 잃어도 비겁한 자 물러서나 용감한 자 굳세게, 낙심한자 돌아오는 그 날까지 서리라. (3)순교자의 빛을 따라 주의 뒤를 따라서 십자가를 등에 지고 앞만 향해 가리라. 새 시대는 새 사명을 우리에게 주나니 진리 따라 사는 자는 전진하리. 언제나 (4)악이 비록 성하여도 진리 더욱 강하다 진리 따라 살아갈 때 어려움도 당하리. 우리 가는 그 앞길에 어둔 장막 덮쳐도 하나님이 함께 계셔 항상 지켜 주시리.
오늘 주신 하나님의 말씀엔 뱃속에서부터 두 백성이 나뉘어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게 될 것이고라 하십니다. 눈에 보이는 사이즈와 진정한 통치는 전혀 무관함을 말합니다. 세상에선 권력을 쥐고 목소리 큰 자가 이긴다지만 성경에서 가르치는 진정한 승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통치는 유약한 야곱, 쩨쩨해 보이는 야곱을 택했습니다. 멋진 사나이 터프가이, 털보에게 장자권 곧 예배자의 자격이 내려가지 않습니다. 히브리인의 하나님은 못나고 흠이 많은 야곱을 찍어 매섭게 훈련한 뒤 그를 사용하십니다. 이후 선택받은 야곱은 이스라엘로 변하며 겸손해지고 모든 자들을 다 품는 큰 사람으로 변해갑니다.
25-26절에서 먼저 나온 아들은 온몸이 붉고 털로 덥혀있어서 이름을 에서라하였고 후에 나온 아들은 에서의 발꿈치를 손으로 잡고 나와 이름을 야곱이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이름처럼 이렇게 날 때부터 얍삽해 얕은꾀로 남의 딴지를 걸어 넘긴다는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아마 개인적으로 지금 여기 이 두 사람이 나타난다면 여러분은 십중팔구 에서와 더 가까이 지내고 싶을 겁니다. 에서는 활달한 청년이었으며 소심하지 않아 작은 일에 묶이지 않아요. 털보청년 에서가 이것저것 뚝딱거려 사냥무기를 만들어 들판을 헤집고 다녀 짐승을 잡아오면 아버지 이삭은 그날 훌륭한 요리로 너무 행복합니다. 아버지는 사내다운 에서를 그래서 좋아했고 엄마는 다정하고 부드러운 야곱을 사랑했습니다. 야곱은 언제나 엄마치마폭을 떠나지 못하는 마마보이였는데 하루 종일 엄마랑 소곤소곤 다정해서 늘 끼고 살았습니다. 벌써 편이 갈린 겁니다. 40에 결혼하여 20년씩이나 기다렸던 기도의 응답 쌍둥이 아들이 서로 다른 모습으로 뱃속에부터 싸우더니 이젠 엄마아빠가 따로 아껴서 편이 갈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디든 그래서 세상이 두 쪽으로 갈려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사는 동안 어느 편엔가 서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게 참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에덴에서 선악과를 따먹어 범죄한 이래 인생은 이렇게 분열의 영이 끊이질 않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곳에는 언제어디서나 악한 영이 지배권을 갖습니다. 하나님은 하나 됨을 좋아하시지만 사탄은 끝까지 흩어놓기를 멈추질 않습니다. 악이 지배하는 곳에는 등 돌려 갈라서고 슬픔과 저주와 눈물과 한숨과 탄식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 땅은 아직 사탄이 상당부분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성도와 교회들은 끝내 하나님의 영을 공급받아 하늘의 거룩한 능력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유약하고 겁 많은 야곱을 택하신 하나님은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십니다. 택자, 선택받은 이들의 모임, 하나님의 교회는 야곱같은 우리들을 부르셔서 이스라엘의 승리를 증명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말합니다.
모태에서부터 두 나라가 갈리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말씀, 교회는 아직 어려서 갑옷도 무거운 다윗과 같은 자여도 태산처럼 보이는 골리앗, 세상이란 큰 자를 꾸짖으며 다스린다는 약속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다스리고 세상은 작은 자 교회를 섬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리브가의 태처럼 우리 안에 두 법이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이 싸움은 육신의 끝 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영과 육신의 법이 늘 마주쳐서 으르렁거림이 그치지 않습니다. 그 둘 사이에서 우린 날마다 하나를 택하고 책임져야 합니다. 어느 쪽을 택하느냐? 그게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어 행과 불행이 갈라집니다.
여러분에게 간곡히 권고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녕 아름답고 진실하고 복된 삶을 영원히 살기 원하시는 여러분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올바른 성경을 선택하라고 권고합니다.
성경적 선택이란 편한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을 택하는 겁니다.
야곱이 성난 형, 에서를 피해 외삼촌 라반에게 도망친 것은 엄마의 지도로 살기위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런데 보니 인간의 몸부림 뒤편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다는 것, 당시 야곱와 리브가는 몰랐지만 우리가 이제 성경을 보니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기 위한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에 입을 다물게 합니다.
치마폭에 쌓인 야곱으로는 곤란했던 하나님의 유업, 결국 얍삽한 외숙 라반의 종살이, 모진 고생 20년이 지나 얍복강의 기도로 마무리됩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얍복강은 주님의 골고다였습니다. 모든 약속은 고난의 골고다를 통과하면서 성취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몸으로 깨닫지 않고 말씀듣고 깨닫게 하옵소서. 꼭 그렇게 기도하셔요.
백번 강조해도 부족한 말씀, 깨닫는 복이 복 가운데 으뜸의 복입니다.
복습합니다. 복 중 최고의 복은 소유가 아니라 관계의 복, 관계의 복에서 으뜸의 복은 그 관계로 인해 깨닫는 복, 깨달은 복은 깨달은 것 실천으로 이어져야 눈에 보이는 복이 됨.
예배자 여러분. 온실 속에서 내다보는 바깥세상은 내 것이 아닙니다.
맨발로 뛰쳐나와 피땀으로 일군 땅만이 자신의 소유로 인정받게 됩니다. 아멘.
어느 쪽 땅을 택해야 합니까? 눈에 보기 좋은 소돔과 고모라를 택한 롯처럼 하지 말고 척박해보여도 내가 택하면 내 믿음을 보시고 그 땅을 기름지게 하시는 하나님의 땅을 택하기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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