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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21.04.25. 주일설교 (창3: 8-21(8-13봉독). 에덴추방과 관계회복)

by 설렘심목 2021. 4. 26.

2021.04.25. 주일설교 (3: 8-21(8-13봉독). 에덴추방과 관계회복)

오늘 듣는 말씀은 기독교리의 중요한 기초라서 두 배 집중하면 좋겠습니다. 인간에게 죄가 들어오는 과정과 그 죄의 결과, 그리고 죄 용서를 통한 회복의 결과로 예배하는 교회가 탄생하게 됩니다.

 

1. 범죄로 인한 하나님과의 관계파괴.

이미 언급했듯 하나님께서는 순종 외에 일체 허락되지 않은 로봇과 같은 인간에게 받는 신앙고백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 알겠습니다.” 외에 다른 어떤 말도 하지 못하게 되어있는 여종을 주인아들이 마음에 든다고 일방적으로 안방에 들여 아내로 삼았다면 기쁨이 있을까요? 멋진 청년이라면 그녀를 해방시켜 자유자로 놔준 뒤에 자주 찾아가 사랑을 고백하여 스스로 자신을 받아들이도록 노력하여 결혼해야 합니다. 자기의지로 거절할 수도 있는 여인에게 받는 사랑의 고백이 감동 아닙니까?

 

하나님을 닮아 자유의지와 선택과 거기 따른 책임까지 감당하는 온전한 인격체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렇게 배신할 자유의지와 선택의 능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따르고 찬미하는 인간과의 격조 높은 교제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교묘히 이 자유의지에 호기심을 넣어 유혹해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사람사이는 파괴되어 정상적인 교제가 불가능해진 것입니다.

8절에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나무사이에 숨은 아담과 하와를 볼 수 있는데 이는 영적 죽음을 말합니다. 이어 질책하시는 하나님께 12-13절에서 두려움으로 인한 핑계를 댑니다. 아담은 그 범죄의 이유를 하나님께 돌리고 다시 하와는 뱀에게 돌립니다. 아담에게, 하와에게 왜 그랬는가 묻지만 뱀에게는 바로 벌을(14-15) 내리십니다.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밀착)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14)” 이 구절은 모든 가축과 짐승들이 이미 저주를 받은 상태라는 것을 알게 하는 구절인데 그 중 뱀이 가장 저주를 받아 배로 기어 다니고 흙을 먹고 산다고 했습니다. 흙으로 만들어져 흙에서 살다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의 육성, 그 육성을 먹이로 삼는 마귀의 본질이 밝혀지는 구절입니다. 육성의 반대말은 뭡니까? 그렇지요. 영성입니다. 흙집을 지키려는 본성이 육성이고 하늘을 뜻을 따라 영생을 향해 힘을 쓰는 정신력과 의지는 영혼의 힘과 성정인 영성입니. 영성이 상당부분 계시에 의존한다면 육성은 자기의지와 본능에 의지합니다. 그리고 영성의 다른 말은 제자도입니다.

 

2. 범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와 자비와 언약.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들보다 더 저주를 받은 뱀이 흙, 곧 육성(肉性)에 밀착되어 흙에 관련된 죄의 성향을 먹으며 평생 살게 된 사탄의 이야기가 14절입니다. 먼저 모든 육축 짐승들이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전제로 뱀의 저주를 다룹니다. 짐승의 저주는 무엇입니까? 영입니다. 짐승은 아무리 지능이 뛰어나 감동을 주어도 영이 없습니다. 감각과 본능에 의해 살아갑니다. 여기 하와를 유혹해 선악과를 먹게 한 뱀,, 뱀이 받은 형벌은 모든 짐승 중에 가장 불행한 저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배고픈 천사와 배부른 마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즉 배부른 불신세상의 사악한 자들과 순결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가난한 예수쟁이를 우리는 보게 됩니다. 성경은 악한 자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그와 함께 있지도 말라고(24;1) 충고합니다. 비록 여기서 궁색해도 정직하고 선하게 살면 영원한 곳에서 아름답고 빛나는 풍요의 삶을 하나님이 보장하시니 오직 하나님 잘 믿고 말씀대로 살라는 생명의 지침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에 보이는 승부는 참 승부가 아닙니다. 진정한 승부는 보이지 않는 것에서 결정됩니다. 그러나 세상은 보이는 것으로 평가한다는 데 우리의 냉철한 분별과 믿음이 요구됩니다.

 

15절에선 여인의 후손과 원수가 되는 뱀의 후손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머리가 상할 사탄의 후손과 발꿈치를 물릴 여인의 후손의 모습은 우리에게 큰 힘을 주는 내용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사탄이 아무리 방해하려해도 이미 우리는 저 간악한 뱀의 머리를 짓뭉갠 여인의 후손, 그리스도의 자녀입니다.

발꿈치를 물려 걷기는 불편해도 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이미 주님께서 머리를 짓뭉개서 이긴 싸움을 우리가 뒤따라 싸우는 것이며 이는 십자가의 부활로 승리가 보장받았음을 의미합니다.

 

이제는 징계 받는 인간이 얼마나 큰 복 가운데 살게 되는지를 살피기로 합니다.

16절에서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라.”고 합니다.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 받게 된 하와가 나옵니다. 여러분, 고통당하며 출산하는 엄마가 저주입니까?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20)여자로 태어나 엄마라는 이름을 받는 것은 최고의 영광이며 복된 일입니다. 물론 엄마의 영광에는 고통이 따르고 양육의 부담이 있지만 엄마의 영광스런 이름은 성경이 명령한 여인의 최선과 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17절에 아담으로 인하여 저주받는 땅과 결국 흙으로 돌아가게 되는 인간의 대표 아담이 등장합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인간이 타락하니 애꿎은 땅이 저주를 받습니다. 성경은 시공을 초월한다고 들었습니다. 지금도 땅과 바다를 오염시키는 주범은 인간입니다. 그래서 평생 고생해서 그 소산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는 수고해도 수고한 만큼 손에 돌아오지 않고 배고픈 민초가 너무 많은 불평등한 세상입니다. 19절에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 것이라고 합니다. 얼굴에 땀을 흘리는 남자는 행복한 남자입니다. 그리고 19절 끝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모든 피조물이 저주받고 인간은 죽어 다시 흙으로 돌아가도록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죄인의 신분으로 살면서 죽지도 못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직한 일입니다. 여기 저기 구석구석 등 굽고 한 많은 노인들의 무리들이 어딜가도 옴닥옴닥 얼마나 큰 문제입니까?

어린이공원을 지나며 보니 하릴없는 노인들이 잔뜩 모여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다 피해 갑니다.

괴로운 인생들, 죽을 권리조차 빼앗긴다면 그것이야 말로 저주 중 최고의 저주일 것입니다.

21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3. 가죽옷을 입히신 하나님의 사랑.

이제 드디어 하나님의 정체성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21절에 죄악을 용서하기 위하여 희생제물을 마련하시고 가죽옷을 입힘으로 아담부부와 화목을 이루신 하나님을 한번 묵상했다면 이 장면에서 놀라게 됩니다. 끝내 사랑이신 우리 하나님. 그 하나님은 비록 하와와 한편이 되어 하나님의 지시를 어겨 죄를 지은 아담이지만 그를 끝내 복으로 채우시며 징계를 마치십니다.

죄를 물어 야단치신다는 것이 알고 보면 고단하여도 보람을 느끼도록 아기자기한 삶을 마련하신 겁니다. 끝으로 무화과 나뭇잎과 가죽옷을 잠시 살펴봅니다.

먼저 무화과 나뭇잎과 짐승의 가죽은 피가 흐르는 것과 흐르지 않는 것, 다음 고통을 통과했다는 점과 고통이 없다는 것의 큰 차이를 봅니다. 희생의 고통과 피에서 현격한 차이입니다.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용서함이 없느니라. -(9:22)”

아담부부가 앞을 가린 무화과 나뭇잎은 스스로 가린 수치의 가림막이지 죄 용서와는 무관한 것이었습니다. 그 광경 성경은 어떻게 말합니까?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7)” 선악과를 먹고 눈이 밝아진 결과 벗은 것을 알고 앞을 가렸다는 것입니다. 선악과 범죄 전에 몰랐던 수치가 느껴진 것입니다. 선악과가 몰랐던 수치를 알게 했다? 무슨 말입니까? 선한가? 악한가? 손해인가? 이익인가? 내편인가? 적인가? 인간에게 어떤 잣대가 들어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돌려 핑계하는, 이상한 회피의 이기적인 잣대부터 작동합니다. 선악과의 결과물입니다.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범죄한 아담하와에게 하나님은 죄 용서의 희생물을 잡아 피를 흘려 용서하시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일단 죽음을 면하고 회복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선악과 범죄로 아담부부는 에덴에서 추방됩니다. 이 후 인간에게 진정한 에덴, 곧 낙원, 기쁨은 사라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에덴의 회복, 낙원의 복구는 가능한가를 살펴야 합니다. 성경에는 가죽옷이라고 했습니다. 가죽옷? 짐승이 희생제물로 바쳐졌다는 증거가 우리의 수치스런 죄범을 가린다는 것입니다. 제사에서 희생제물은 보통 어린 양입니다. 신약에서 희생제물 어린 양은 누굽니까? 어린 양 예수그리스도십니다. 죄 없는 어린 양 예수께서 흘리신 무죄한 보혈 그 피가 우리의 원죄를 덮고 있기에 죄인의 오명을 벗고 이제 예배하게 된 우리는 인간이 받을 수 있는 복 중에 최고의 복을 받은 것입니다.

결국 예배라는 과정을 통해 에덴에서 깨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회복되는데 예수보혈이 필수인 것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아끼겠습니까? 먼저 시간과 중심을 드리세요. 신앙은 그렇게 시작하고 성장해 갑니다. 투자 중 가장 확실한 최고의 투자는 하나님께 투자하는 겁니다. 순간 지나는 것을 드려 영원한 것을 보장받는 것만큼 지혜로운 일은 없습니다.

비록 버거운 삶의 무게라지만 우리 힘을 내어 하나님을 향한 소망으로 최선을 다하고 성실하게 주를 섬기십시다. 부족해도 일편단심, 언제나 나무라지 않으시고 품어주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열심을 내십시다. 모든 우리 삶의 지름길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기도합니다.

나뭇잎으로 가렸던 수치는 얼마 가지 않아 서로를 할퀴는 것으로 나타나 또 다른 수치가 되는 세상에서 진리로 오신 주여, 주는 우리의 죄를 덮기 위해 피흘려주신 가죽옷의 표징이십니다. 수치로 덮인 이 땅의 육신 끝나는 그날까지 주여, 주님보혈로 덮인 붉은 열정 온 가슴에 가득해 두려움 없이 주님나라 위하여 나아가게 하옵소서. 한없이 유약하고 비겁해도 주는 우리의 산성이시오, 창과 방패시니 두려움이 변하여 노래되게 하시고 수치가 변하여 찬송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