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11.주일설교<몬1;10-12. 저는 내 심복이라.>
초대교회 당시 로마시대 노예의 생명은 거의 주인에게 달려있었습니다. 본문의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노예였습니다. 빌레몬은 골로새에서 노예를 두고 사는 부자였고 오네시모는 주인인 빌레몬의 재산에 손해를 끼치고 대도시 로마로 도망쳐 숨어 살고 있었습니다. 오네시모는 바울의 전도를 받아 모든 과거를 바울에게 고백하고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바울은 예리한 영적통찰력으로 자신의 과거를 밝힌 오네시모의 영혼과 인격을 보고 가까이 두고 가르친 후에 형제요, 동역자요, 아들같이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당시 관습과 법으로는 도망친 노예를 보호하는 일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도 돈을 훔쳐 달아난 노예입니다. 다행히 오네시모를 용서해야 할 오네시모의 주인은 바울과 가까운 동역자 빌레몬이었습니다. 놀라운 인연이요, 하나님의 계획이 아닐 수 없는 일입니다.
바울은 이미 늙어(9절) 존경받는 목자였고 빌레몬은 젊고 성실하며 믿을만한 제자였습니다. 바울의 어떤 결정에도 따를 준비가 돼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편지는 겸손한 말로 제자 빌레몬의 의견을 존중하며 오네시모의 용서를 대신 구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바울의 예수 닮은 매력과 신앙의 고매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대목이 절마다 드러나고 있습니다. 빌레몬서를 읽으면 다정한 주님의 음성이 바울을 통하여 온 마음을 촉촉이 적시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한절씩 읽습니다.
1-2절.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자 아킵보와(2절)” 교회사역의 군대개념입니다.
바울사도는 병사된 동역자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합니다. 그리고 군사에겐 사생활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딤후2:4)는 말씀으로 사역을 군대생활에 빗대 역설합니다. 이는 개인의 모든 사사로운 취미, 즐거움과 고민과 갈등조차 미련 없이 내려놔 그것들과는 무관한 군인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5절. “주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빌레몬을 어떤 사람이라고 말합니까? 예수님과 교우들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좋은 성실한 성도로 칭찬하고 있습니다.
7절에서는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스승을 기쁘게 하는 제자의 아름다운 신뢰와 덕을 우리는 봅니다. 귀한 사람입니다. 건물이 커서 대형교회가 아니라 빌레몬 같은 성도가 많은 교회가 건강한 교회고 큰 교회입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8-10절.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니” 늙은 바울은 빌레몬을 아들처럼 사랑하기에 명령할 수 있었고 또 바울의 명령 앞에 절대복종할 빌레몬입니다. 그러나 9절에 사랑으로 부탁한 것은 명령보다 사랑의 권면으로 피차 기쁨으로 용서하고 용서받기를 바울이 원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조심스러운 말로 영적아들 빌레몬에게 오네시모의 용서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11-14절. 12절에서 오네시모를 뭐라고 소개합니까? “그는 내 心腹이라.” 심복(복심)은 심장과 배를 말하는데 생명처럼 요긴한 자를 말합니다. 목회자가 그는 내 심복이라고 말하는 분 다되시기 축복합니다. 목회자의 심복은 그리스도의 심복이니 주께서 보호하십니다.
13절 뒤쪽엔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바울사도는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하면 빌레몬의 일을 오네시모에게 시키겠다는 겁니다. 즉 오네시모를 용서하여 그에게 바울 섬기는 일을 물려주면 빌레몬에게는 더욱 귀하고 중차대한 일을 맡긴다는 것입니다. 섬김의 공유를 통해 과거 주종의 관계를 지워버리려는 바울은 주 안에서 모두 한 형제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이 자원하는 마음과 기쁨으로 이뤄지도록 스승인 바울사도가 제자에게 허락을 받고자 하는 아름다운 장면이 14절입니다.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않으니”
예배하는 여러분. 얼마든지 명령할 수 있는 제자를 바울은 강제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승낙을 청합니다. 빌레몬의 마음이 어땠을까? 어차피 오네시모가 과거에 자신에게 끼친 손해를 깨끗이 잊고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줘야 합니다. 그것도 과거에 부리던 노예가 아니라 동등한 입장의 동지와 사랑하는 후배로 받아야 합니다. 쉽지 않은 이 일에 바울의 편지 한 줄은 난감한 빌레몬을 행복하게 한 것입니다. 빌레몬으로 인하여 바울과 동역자들은 늘 하나님께 감사하고 행복했다고 4절에서, 그리고 7절에서는 많은 기쁨과 위로와 평안함을 얻었다고 고백합니다. 목자와 양은, 스승과 제자는, 아비와 자녀는, 아내와 남편은 이렇게 많은 기쁨과 위로와 평안을 얼마든지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15절. 여기서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서 도망친 것을 바울은 잠시 떠난 것으로 표현합니다. 이러한 구사력은 단순한 은사가 아니라 바울의 깊은 사랑에서 나온 배려의 언어입니다. 죄를 짓고 도망친 게 아니라 부득이한 일로 죄송해서 잠시 몸을 피했다는 겁니다. 초병 둘이 보초를 서다가 교대로 자기로 했고 하나는 누워 자는데 들켰습니다. 징계하는 상관은 그를 누워 잤다는 말 대신 길게 기대어 깜박했다고 상부에 보고해서 벌을 면하게 해줬습니다. 감동한 병사가 누이를 소개해서 결국 처남매부가 되었습니다.
16-17절. 12-13절에서 그를 내 심복이라고 소개한 뒤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려 한다”는 말로 이미 한 형제인 점을 제시한 바울은 과거에 종이었고 손해를 주고 달아났던 오네시모를 용서할 뿐 아니라 형제와 동역자로 받으라고 권합니다. 더욱이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하라고까지 합니다. 무거운 부탁입니다. 바울의 이 큰 부탁의 근거는 오네시모의 철저한 회개와 빌레몬에 대한 신뢰입니다.
18절. 바울사도는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진 빚, 곧 손해를 끼치고 달아났던 당시의 금전문제를 자신이 대신 갚아주겠다고 합니다. 그 돈을 탕감하라는 것입니다. 빌레몬이 바울에게 그 돈을 받을 리 없습니다. 빌레몬은 복음으로 낳은 바울의 영적아들입니다. 그리고 대신 빚을 갚아주는 대속의 은총은 바울이 먼저 그리스도께 받은 대속은총의 결과입니다. 19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오네시모의 빚은 우리가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복음의 빚에 비하면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을 합니다.
20-21절. 빌레몬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오네시모의 확실한 회심으로 인해 바울사도의 자신감 넘치는 권유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동역자 사이에 이러한 신뢰는 자신감과 능력이고 아름다움입니다.
22절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처소마련과 기도를 요청합니다. “너희 기도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게 해 주시게 하라.”는 것은 빌레몬 측의 동지들이 바울을 위해 기도함으로서 기쁜 마음으로 서로 만나 편안히 있을 처소를 마련하라고 합니다. 이는 기도로서 모두의 심령이 하나로 오네시모를 영접하고 다른 신분으로 함께 화목할 것을 촉구하고 단정 짓는 바울의 결론적인 당부입니다.
모든 말끝에 여전히 기도의 당부로 마무리하는 바울은 사람의 노력위에 하나님의 선하신 결론만이 모두를 평강과 기쁨으로 인도한다는 것을 덧붙입니다. 너희가 기도한다면 오네시모의 일을 비롯한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잘 되어 내가 기쁜 마음으로 편안하게 너희를 만나러 가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바울, 바울은 서신의 끝 23-25절에서 동지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론합니다.
예수 안에서 함께 갇힌 자, 에바브라는 바울의 고통에 몸으로 동참했던 귀한 믿음의 동지입니다. 에바브라의 고통은 하나님의 교회 앞에 거룩한 영광이었습니다. 모든 동역자 중에서 함께 갇힌 에바브라의 이름이 제일 먼저 나오는 이유도 이러한 고난의 영광 때문입니다.
마가요한은 나이가 어려 제자에 들지 못했고 철이 없어 바울이 2차 전도여행에서 떼어놓고 갈 정도였습니다. 바울이 거부하자 마가는 바나바를 따라 키프러스로 갑니다. 후에 그의 행적은 11-2년 정도 기록이 없지만 후에 로마에서 바울의 고난에 동참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올 때 마가를 데려오라”고 하면서 “그는 내게 유익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가를 “동역자” “나의 위로”라고 표현합니다. 바울이 죽은 후 마가는 베드로를 섬기는데 베드로가 “내 아들 마가”라고 할 정도로 마가는 신실한 주의 종이 되어있습니다. 주변에 아직은 믿음이 연약한 지체를 볼 때에 마가복음을 남긴 이 마가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역시 바울과 함께 갇혀 고난에 동참한 신실한 종 아리스다고, 다음데마입니다.
딤후4:10에 보면 바울의 두 번째 투옥 때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떠난 배신자로 이 데마는 바울의 친구며 동역자였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좋아 신앙과 친구를 떠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본문에선 “내 동역자”라는 말을 삭제하지 않고 있습니다. 성경은 한번 받은 구원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해 취소됨이 없다고 가르치는 한편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고 히6:4-6에서 증거함으로 구원의 예외적 소멸성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이 언제나 인간의 부족으로 소멸된다는 한구석 예외규정을 두고 경계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우리는 본문의 데마를 “내 동역자”라고 부르는 바울사도의 고백가운데 그의 상처를 봐야 합니다. 등을 돌리고 세상으로 떠난 이를 보면서 사역자들은 많은 상처를 받습니다. 데마는 세상 끝날까지 사라지지 않는 교회의 가시로 지금도 어디서든 발견되는 필요악입니다. 데마로 인하여 교회는 긴장하여 기도하며 돌아보게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데마가 태어나는 것은 교회와 사역자의 부족이라는 점을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의사출신 누가입니다.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에서 “누가만 나와 함께 있고”라고 한 것은 그가 로마에서 곤욕을 치를 때 끝까지 곁에서 함께 한 귀한 동지였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누가는 그 의술로 바울의 건강을 성실하게 돌보았습니다. 누가복음의 필체를 보면 읽는 이로 하여금 그 아름다운 문체와 탁월한 관찰력에 놀라게 되는데 누가의 훌륭한 문장보다 더 돋보이는 것은 소외당한 자 히브리인을 향한 그의 애정입니다. 여러분. 우린 오늘 짧은 빌레몬서의 20여개 성경구절을 하나하나 살피며 주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나름대로 몇 개정도의 귀한 생명의 떡을 취하신 줄 압니다.
요약해봅니다.
우리는 오네시모처럼 용서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누군가를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네시모처럼 복음으로 인해 죽을죄에서 구원받아 복음에 빚진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거저 받은 이 복음을 힘 있게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네시모처럼 그리스도의 심복으로 부름을 받았지만 심복이 된 이도 있고 아직 종으로 있는 이들도 있습니다. 심복은 주인을 생명으로 섬기며 기뻐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충성과 전적인 헌신은 기쁨을 창출해내는 최선의 삶이라는 것 잊지 않기 바랍니다.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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