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20. 주일설교 <창11:26-32. 가난한 데라의 유업>
아담이 130에 셋을 낳았고 이후 그 후손들은 65에서 187세 모두 9대를 거쳐 아들을 낳았습니다. (창5:3-32) 그런데 노아는 몇 살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습니까? 500세에 첫 아들 셈으로 시작하여 세 아들을 낳았습니다. 말하자면 그 때에 장가를 들었다는 것입니다. 셈의 후손입니다.
셈의 후예(창11:10-32)는 아브라함에 이르기까지 역시 9대였는데 아르박삿부터 나홀까지 7대는 29세에서 35세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70세에 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습니다(창11:26). 그리고 아브라함은 몇 살에 이스마엘과 이삭을 낳았습니까? 이스마엘은 86세에 낳았고(16:16) 이삭은 100세에 낳았습니다(21:5). 그렇다면 노아의 믿음과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인해 의롭다 칭함을 받은 것과 이러한 늦은 나이의 결혼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는 저들의 살림살이가 장가도 못들만큼 매우 가난했다는 것이 믿음과 상당히 깊은 관련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노아는 풍요를 못 이겨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고 자다가 그것을 소문낸 가나안을 저주하는 실수까지 합니다. 한편 아브라함은 가난하게 시작했지만 훗날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인하여 거부로 살며 믿음의 조상다운 큰 규모의 살림을 살아갑니다.
아브람의 아비 데라는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수24:2-3) 우상목각을 깎아팔며 살았습니다.
장자 셈의 후예였지만 가난한 삶에 견디다 못해 저들의 신에게 굴복한 데라는 결국 그 가난을 면치 못하고 막내아들 하란을 잃는 낭패를 겪게 됩니다. 롯은 하란의 아들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날 때 함께 데리고 나온 조카‘롯’은 바로 죽은 막내 동생의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데라가 아들의 이름을 부친의 이름과 같은 나홀과 고향 하란으로 지었다는 것은 새겨봐야 합니다. 나홀은 데라의 아버지 이름이고 하란은 과거 조상들의 영광스럽던 시절의 땅 에볼라왕국이 있던 곳의 지명입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가난에 밀려 우상의 땅 갈대아우르까지 왔지만 그는 아버지시절과 조상들의 영화로웠던 때를 그리워하며 아들들의 이름을 나홀과 하란으로 지었던 겁니다. 그리고 아브람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의 본래이름의 원뜻은 “나의 아버지는 고상하다” 또는 “크신 나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데라는 아버지시대를 그리며 가난한 자신의 한을 아들들의 이름으로 부르며 달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가난하고 한이 서린 인생인지 모릅니다.
데라는 조상들처럼 평탄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가난했습니다.
다른 윗대들은 모두 30세 초반에 결혼하였지만 데라는 70세에 결혼하여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습니다.
거기에 막내아들 하란은 젊어서 아비보다 먼저 죽음으로 아비 데라의 큰 아픔이 됐고 장남 아브람은 자녀가 없어서 늘 적적했습니다. 너무 가난하여 먹고 살기 위해서 거주지를 옮겨 갑니다.
뭐하나 변변한 것이 없는 집안이었습니다.
1. 택한 그리스도의 족보에 가난이 있었다.
히브리인의 하나님은 윤택한 족속을 버리시고 가난하고 찌든 족속을 택하셔서 위대한 구원의 동역자로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풍요의 주님이셔서 언제나 그 손의 부요를 베풀며 드러낼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가난과 질병과 고난과 설음은 위로와 끝없는 사랑의 주님이 찾으실만한 대상들입니다.
진정한 풍요는 가난을 경험한 자에게만 가능함을 믿으십니까? 저와 여러분, 넉넉한 가운데 늘 빈곤을 느끼는 욕구를 진정 멀리 떠났습니까? 인생의 가난이 하나님을 만나는 촉진제가 된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까?
어린 시절을 가난하게 보내며 갖은 설움을 당하며 자란 아브라함은 그 가난한 가운데 하나님을 믿는 일에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가난한 어린 시절의 삶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을 사색하며 믿음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게 한 것입니다.
20세기 초 세계의 지휘자 토스카니니. 그는 원래 첼로 연주자로서 심한 근시로 인해 악보를 모두 외워서 연주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연주회를 앞두고 그 악단의 지휘자가 갑자기 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누군가 지휘를 해야 할 입장이었습니다. 그때 악보를 모두 외우고 있던 토스카니니가 선발돼 임시 지휘를 했던 것이 계기가 되어 세계적 대 지휘자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토스카니니가 심한 근시안이 아니었다면 그는 한낱 많은 첼로 연주자 중에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시력이 나빠 악보를 모두 외워야 했고 그것이 그를 세계적인 지휘자로 우뚝 서게 했던 것입니다. 사람이 고통을 당한다는 것은 괴롭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고통은 더 큰 능력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려울 때 힘 되신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좋은 환경이 아니라고 해서 불평하지 말자. 좋은 환경만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 아담은 에덴동산과 같은 좋은 환경에서도 타락하지 아니했는가. 눈물에 대해서도 감사를 드리자. 눈물 있는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볼 때 더 똑똑히 바라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려울 때일수록 우리에게 가까이 오셔서 우리를 보호해주시고 힘이 되어주신다.”
심한 근시가 토스카니니를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지휘자로 만들었고 극심한 가난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었습니다. 노아를 의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삶 한가운데서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많은 일 앞에 이제는 어제와 다른 믿음의 눈으로 다가서야 합니다. 세상이 바뀌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순박한 소망입니다. 모든 문제의 답은 우리들 안에 있습니다. 죽음조차 아무 상관없으신 부활의 주님이 여러분 안에 함께 하시는 한 우리들은 풍부나 비천에도 요동치 않고 좋은 일들을 꾸준히 해낼 것입니다.
연어가 알을 낳기 위해 물 맑은 상류로 올라올 때 온 힘을 다해 물살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반면 죽은 고기는 물살 따라 두둥실 편안히 떠내려갑니다.
영혼이 건강한 믿음의 사람은 환경과 싸워 더욱 높은 곳을 향하여 달려가 소망의 삶을 쟁취합니다. 영혼이 시들어가는 사람은 환경 따라 편안한 대로 몸을 맡겨 결국 패배자가 됩니다. 연날리기는 바람을 안고 해야 합니다. 비행기도 바람을 안고 떠오릅니다. 환경은 정면 돌파해야 합니다. 두려워 등을 돌리면 끝입니다. 믿음은 환경이라는 거센 물살이 인생을 시험할 때 죽음조차 이기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굳센 의지와 강한 인내로 주의 영광을 반드시 드러내고야 말겠다는 일사각오로 정면대항하는 사람에게 승리의 면류관을 씌워줍니다. 놀라 두려워 떨면 하나님이 안보입니다. 세상만 보입니다. 베드로가 주님보고 늠름히 걸어가다가 출렁이는 파도를 보고 놀라 물에 빠졌습니다. 파도를 볼 때 주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주님만 바라보면 파도는 기회가 됩니다. 절대신뢰로 주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30절입니다.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2. 택한 그리스도의 족보에 자식 없는 불행이 있었다.
아브람이 자식없어 외로운 가운데 그를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고 그리스도의 족보에서 귀한 씨를 잇게 된다는 것은 이삭의 출생이 하나님의 개입이라는 충분한 근거가 됩니다. 하나님은 사라의 완전한 포기와 절망위에 놀라운 계획을 하고 계셨습니다. 내 몸으로 난 자녀보다 영적인 후손에 대한 풍요와 사랑으로 값진 의무와 기쁨을 원하고 있습니까? 앞으로 그런 자녀양육계획을 갖고 있습니까? 그것이야말로 가장 값진 전도요, 주님나라의 확장에 온전한 헌신을 이루는 길인 것을 잊지 않기 당부합니다. 31절입니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3. 택한 그리스도의 족보에 고향을 등지는 아픔이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고향을 그리며 또 떠나지 않으려 합니다.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실로 많은 위험과 서투름과 낯 설음을 각오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대한 하나님의 동역은 옛것으로부터의 철저한 분리를 요구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많은 희생을 감내하며 자신을 포기한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는 영광을 봅니다. 본토친척 고향의 가문을 떠난 아브람이 그랬고, 모세가 그랬고, 다윗이 그랬습니다.
저와 여러분, 주님의 위대한 일꾼이 되기 위해서 포기할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익숙한 것으로부터의 이별은 새로운 주님의 프로젝트에 들어가는 첫 순서입니다. 불편한 환경은 언제나 놀라운 기회를 제공합니다.
문제는 언제나 내 안에 있고 주께 무릎 꿇어 내가 나를 이길 때 세상이 내게 무릎을 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입니다. 내안에 모든 정답이 있습니다. 그 문제 내가 스스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을 신뢰함으로 그분께 나를 맡겨드리는 신앙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 받고 오직 믿음으로 승리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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