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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20.09.13.주일예배설교<눅10:25~37.영생, 그리고 이웃>

by 설렘심목 2020. 10. 5.

2020.09.13.주일예배설교<눅10:25~37.영생, 그리고 이웃>

한평생 살면서 좋은 이웃을 만난다는 것은 어떤 복보다도 값진 것입니다. 그런데 좋은 이웃을 만나고 싶어도 바램과는 전혀 다른 만남 앞에 우리들은 종종 좌절하게 됩니다. 보통 유유상종이라서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게 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어서 어떤 때는 인생전체가 망가집니다.

좋은 사람이 악한 사람만나 불행하게 되기도 하고 천한 사람이 귀한 사람만나 우아한 인생을 열어가기도 합니다. 본문은 주님 앞에 어떤 율법교사가 꼬투리를 잡으려는 질문으로 시작해서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하게 됩니다. 율법사는 영생을 질문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율법을 되묻습니다. 율법사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했느니라.”며 신명기 말씀으로 대답합니다. 여기서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할 이웃이 과연 누구냐고 묻는 율법사의 질문에 주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된 한 사람을 발견한 것은 세 종류의 사람들입니다.

첫 번째는 제사장이었고 두 번째는 레위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끝으로 다 죽게 된 피해자를 보고 구해낸 사람은 저주받은 동네, 사마리아사람입니다.

급박한 위기를 당한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친 두 사람은 안타깝게도 성전에서 일하는 자였고 쓰러진 사람을 일으켜 상처를 치료하고 돌봐준 사람은 사람들이 눈도 안 마주치는 저주의 땅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말씀에서 우리가 찾는 진정한 의미의 좋은 이웃에 대해 이 시간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 25~28절입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사랑을 행하는 자는 이미 영생을 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즉,

 

1. 영생이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이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일점의 오류도 없는 하나님의 말씀인줄 믿습니다. 물론 인간의 필사오류로 일부 살필 부분이 있으나 이것도 신중에 신중을 기하게 됩니다. 특히 예수님이 친히 하신 말씀 속에 숨겨진 중요한 의미를 찾아서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기대보다 훨씬 더 깊고도 감동어린 영혼의 기쁨과 품격 있는 신앙인격을 생활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이 언급하신 영생은 구원을 말합니다. 즉 구원받은 자는 영생을 얻은 것이고 구원받아 거듭나 영생가운데 속한 하나님의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교사의 대답입니다. “율법에 이르기를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말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나님과 이웃을 극진히 사랑하면 그는 이미 그 사랑 안에 구원이 이루어져서 영생을 보장받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평소 생활로 헌신하는 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우린 잘 알고 있습니다. 구원과 영생은 인생이라는 울타리 밖에서 오는 계시의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일도 우리 밖에서 열리는 일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기는커녕 멱살만 잡지 않아도 그 사람 썩 좋은 이웃입니다. 황당한 일을 당하고 보면 정말 나나 남이나 모두 말씀처럼 연자 맷돌에 목을 매고 깊은 바다에 던져져야 할 죄인들이 아닌가 늘 절망하게 됩니다.

 

사랑은 결점을 덮고 이해하며 좋은 점을 높여주고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기다려준다는 것은 그 기다리는 사이에 그를 위해 기도해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분노한다면 상대방은 변하지 않고 상처만 입게 됩니다. 오히려 있는 모습 그대로 받으신 주님 앞에서 우리도 이웃을 그대로 받아주면서 기도해준다면 필경 그는 놀랍게 변하고 서로 감동하면서 끌어안아 화목할 줄 압니다. 그래서 좋은 이웃을 기다리기 보다는 차라리 내가 먼저 좋은 이웃이 되려고 노력하는 편이 훨씬 더 효과적인 관계의 승리를 이룬다는 말씀을 여러 차례 전한지 오래 됩니다.

약이 없어 병드는 거 아니고 교훈이 없어서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네 입에 가까이” 있다는 신명기말씀처럼 입에 붙어있는 하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희생하고 양보하고 사랑하는데 매우 서툴고 실패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분노합니까? 도무지 납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왜 부정적으로 보느냐는 겁니다. 답답해서 밤새도록 잠도 안 옵니다. 분노는 그 후유증이 매우 오래갑니다. 많은 시간과 정열과 에너지를 허비하게 합니다. 분노에 노예가 됨으로 잃어버린 것들이 그 사건자체보다 훨씬 더 크고 무겁다는 데 다시 화가 납니다. 문제는 우리 내면에 그 분노를 삭힐만한 다른 기쁨과 감동이 분노보다 크질 못하기 때문입니다. 영생이 크고 놀랍지만 당장 일어난 분노의 불을 끄기에는 너무 멀리 느껴진다는 건 마치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어둠을 쫓는 권세요, 능력입니다.

 

꿈은 멀리 있고 현실은 눈앞인데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웃을 사랑함으로서 증거되는 구원의 표지는 언급한대로 사실상 우리가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우리 영혼이 죽지 않고 영생에 이르는 구원의 영적능력과 권세는 우릴 위해 쉬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찾는 일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감동케 하심과 열정과 능력을 주셔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주께서 능력주시는 분이심을 확신하고 소망하며 기뻐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전적인 몫이요, 면류관입니다. 능력은 위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받아들이는 그릇의 크기와 깊이는 우리 믿음에 상당부분을 맡겨주셨다는 것을 잊지 않게 되길 축복합니다. 우리에게도 선한 사마이라인의 잠재력은 있습니다. 33~34절입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구원받은 영생의 사람 곧, 좋은 이웃은

 

2.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거룩한 성소에서 일하는 종교지도자들은 쓰러진 중환자를 피해서 모른 척 지나쳐버렸으나 천박해 보이는 사마리아인은 강도에게 맞아 죽어가는 사람을 불쌍히 여겨 그를 보살펴줬습니다. 상처를 싸매고 천막에 데려가 편히 뉘였습니다.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주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을만한 고운 마음씨입니다. 성도여러분, 남을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가여운 사람보다 마음이 더 넉넉하고 크기 때문에 갖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 안에 불쌍한 사람이 들어와 녹아버리고 이후에는 그 사람이 밉지 않게 됩니다. 세상에 불쌍한 사람을 때리거나 할퀴는 사람은 없습니다. 괘씸해서 때리지 가여우면 때리지 못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도 그러니 용서해달라는 겁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안에 자비가 담겨있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속에 미움은 자리를 잡지 못합니다. 반면 서운한 마음과 분노는 기대가 무너졌을 때 나타나는 일입니다. 기대는 말 그대로 기대어 의지하는 마음으로 시작됩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과 분노가 큽니다. 기대는 내게 뭔가 도움이 되는 것을 바라는 마음인데 이는 나보다 크거나 풍요로운 자에게 바라는 겁니다. 나보다 부족하거나 왜소하고 허약한 존재에는 기대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기대하지 말고 불쌍히 여겨게 됩니다. 그러면 나에게 죄를 짓고 불쾌한 사람까지도 어떻게 하면 불쌍히 여길 수 있을까? 그것은 그 사람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부족 깊숙하게 들어가서 그의 아픔을 느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상대방 안에서 상대방 자신도 어쩔 수 없는 허물과 부족과 열등감과 수치가 있음을 보게 될 겁니다. 그것은 마치 내 안에서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그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그것, 거듭나기 전의 옛 모습, 우리 모두 아파하고 있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 부끄럽고 부족하고 못난 자아가 우리로 하여금 좋은 이웃이 못되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인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내려다보십니다. 굽어 살피십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들은 위에 계신 하나님을 우러러 뵙니다. 싸운 뒤에 누가 먼저 손을 내민다고 했습니까? 먼저 된 자, 큰 자가 먼저 손을 내밀게 됩니다. 사랑은 잘잘못의 문제를 이미 떠나서 불쌍히 여기고 이해하는 큰 자로부터 출발하는 생명의 시그널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쟁투하고 갈등하면 항상 하나님이 져주시는 것을 믿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들의 범죄에 즉각 반응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기다려주십니다. 그것도 사랑하기에 져주시듯 기다리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인간처럼 옹색한 분이라면 우리는 그 앞에서 살아남을 자가 없습니다. 35절.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다음, 좋은 이웃은

 

3. 희생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입니다.

 

세상에 돈 아깝지 않은 사람 없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이웃을 불쌍히 여겨 돕는 일에 돈을 들입니다. 그리고 비용이 더 들면 자기가 부담한다고 합니다. 세상에서도 행동하지 않는 양심을 위선이라고 하고 행동하는 양심을 지성이라고 합니다. 교회의 지성은 신앙인격입니다. 신앙인격의 완성도는 주의 사랑을 깨닫는 대로 행동에 옮기는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자기 것을 값없이 드림으로 섬김과 희생의 본을 보인 진정한 지성이었습니다.

다만 지성이라고 위장한 어리석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자칫 마귀를 도와 더 힘 있는 마귀로 성장시키는 교회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적과 아군을 모르면 망합니다. 이는 선이 아니라 악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옷을 입으신 후 최고의 지성과 이웃으로 우리에게 오셨고 지금도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좋은 이웃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손을 내밀고 내가 먼저 좋은 이웃이 되어 선한 승리로 주께 칭찬받고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 저와 여러분이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