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04. 주일예배설교<갈6:17. 예수의 흔적>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세상도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세상도 인간도 태고부터 지금까지 달라지지 않았다. 나남 없이 모두들 살아남기 위해 불편한 모든 것은 적으로 간주하며 싸운다. 때로는 내가 나의 적이 되어 곤고한 육신 눕힐 때 깨어나지 않는 아침을 소원하기도 했다. 돌아보니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한 것은 세상도 이웃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 나도 남처럼 내게는 있고 남에겐 없는 것이 있다. 그리고 남에겐 있는데 내겐 없는 것도 있다. 그래서 내가 남이 되지 못하는 그것으로 인해 때론 즐겁고 우쭐하고 때론 아프고 서러웠다. 누구의 절규처럼 20년을 노력해도 고쳐지지 않는 것이 있다. 도저히 잘라내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내 살이 된 고름이다. 딱딱하게 굳어서 살처럼 보여도 고름은 냄새가 난다. 인격의 향이 사라진 거짓 살이다. 도려내지 못할 고름이라면 차라리 인정해주고 가까이 지내야 한다. 그것을 강점으로 끌어내는 특화로의 재구성이 필요하다. 경박한 인격이라면 명랑한 에스파뇰과 브라질리아로 가야하고 실망의 두려움으로 만나기 싫다면 혼자서도 충분한 행복의 나라로 가야 한다. 장막을 걷어라. 내 좁은 눈을 떠 이 세상을 다시 보자. 창문을 열어라. 춤추는 산들바람을 한번 더 느껴보자. 가벼운 풀밭 위로 나를 걷게 해주세, 온갖 새들의 소리 듣고싶소
사도바울은 예수님이 친히 찾아오셔서 소유 삼으신 특별한 하나님의 사명자로 평생 혼자 살며 갖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가장 구체적으로 소개한 이방인의 사도입니다. 그는 신약의 ⅓이상을 기록했고 삼층 천을 경험한 그야말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었던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 흔적, 즉 스티그마(stigma)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여기 사용된 스티그마는 고대당시 노예, 반역자 등 중죄인의 몸에 인두로 짖어 표시를 내는 화인, 불도장자국을 말합니다.
바울사도를 가장 힘들게 했던 건 바울의 사도성에 대한 회중의 불확실성이었습니다. “내 몸에 예수의 낙인이 찍혔으니 더 이상 날 괴롭히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님 생전에 곁에 따라다니던 열두제자와는 달리 당시 바울은 가말리엘의 수석문하생으로 율법에 헌신된 유대교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흩어져 산불처럼 번지는 신생 예수교신자들을 매우 위험한 이단으로 봤습니다. 공회의 명령을 받아 열심히 추적하던 중 다메섹길 위에서 주님의 일방적인 임재와 음성으로 청년사울은 그때까지의 생각과 행동의 정반대로 출발합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사도된 바울은..”에베소서의 시작입니다. 본서 역시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나 사도 된 바울은..” 그렇게 시작합니다. 모든 바울서신은 하나같이 자신의 사도성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출발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는 항상 자신의 사도성을 변론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만큼 열두제자와 다른 입지의 자신을 스스로 변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사도의 사도성은 끊임없이 무지한 대중들에게 의심받았습니다. 본문은 이런 고통과 아울러 율법을 아예 폐기하자는 율법폐기론자들의 주장에 맞서 종종 논쟁 속에 휘말리고 있는 교회를 향해 자신의 사도성에 대해 잘라 말합니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바울사도의 몸에 찍힌 불도장은 어떤 낙인인가?
1. 십자가의 남은 고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당하는 예수의 흔적입니다.
“바울을 과연 열두제자와 함께 그리스도의 사도로 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바울은 말합니다.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분명한 불도장에 찍혀서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종이요, 사도라는 것을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20)”는 자기부인의 말로 확정합니다.
바울사도 안에 있는 예수의 흔적은 순간마다 일어나는 죄성과의 싸움에서 분명한 예수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인데 그것은 아픔이요, 동시에 능력이었습니다. (고후11:23~31)
다메섹 길에서의 빛과 음성, 그리고 사흘간의 눈뜬장님으로부터 시작해 주리고 매 맞고 목마르고 헐벗고 천막 깁고 갈 데 없고 파선 당해 죽을 고비 넘기고 돌로 맞고 그렇게 모든 위험을 당한 몸, 육신가운데 그 흔적들을 바울은 주께서 “넌 내꺼”라며 인두로 지진 낙인으로 알아 그것을 영혼의 기쁨으로 삼아 꾸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사도의 몸에 찍힌 불도장 예수의 흔적, 두 번째 스티그마는 무엇입니까?
2. 주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육체의 죽임, 죄 죽임의 낙인입니다.
지극히 사소한 죄와 나쁜 생각에도 밤새워 회개하며 눈물로 기도했던 죄 죽임 영성의 거장 죤오웬이 생각납니다. 죄에 예민하고 다른 이의 실수와 부족에는 너그럽고 둔감하고 좀 미련한 바보가 되는 아름다운 저와 여러분이길 기대합니다. 바울사도의 고백처럼 모든 싸움 중 가장 힘든 건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롬7:22~25절입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는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바울은 그래서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고전9:27)시키려 노력했고 또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고 했습니다. 롬8:5~8절입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은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갈5:19~23절입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바울에게 찍힌 그리스도의 노예낙인은 곧 이런 영의 전투를 위해 순간마다 확인해야 하는 감정과 육체의 절제였습니다. 이어지는 바울의 고백입니다. 갈5:24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십자가에 정욕과 탐심을 못 박았다면 그 낙인은 못자욱일 것입니다. 영적승리를 위해 힘을 쓸 때에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신 십자가의 승리와 이제로부터 영원히 도우시는 증표들이 구원의 못자국인 것입니다. 바울사도의 몸에 새겨진 예수의 흔적, 세 번째 스티그마는..
3. 교회를 염려하며 세워가는 산고의 흔적입니다.
고후11:27~28절을 함께 읽습니다.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바울사도의 고뇌와 수고와 아픔과 절망과 기쁨과 소망은 모두 교회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는 오직 주의 나라를 위하여 온 몸을 기울였습니다. 그의 관심은 온통 그리스도의 통치와 기쁨에 쏠려 있었고 자신이 다녀와 분명히 알고 있는 세 번째 하늘, 하나님의 나라만이 유일한 인류의 희망인 것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고후12:2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14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이어 4절입니다.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주님은 바울에게 셋째 하늘, 삼층천의 비밀을 보여주셔서 그리스도의 노예로서 확신가운데 일하도록 이미 14년 전에 낙인찍었습니다. 이 놀라운 경험은 바울로 하여금 어떤 고난도 이길 분명한 근거가 되었고 흔들리지 않는 증거의 믿음으로 확고한 복음의 선포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중요한 걸 짚고 갑니다. 믿음이란 뭘까? 바울이 경험한 것 나도 경험하고 믿어야 하나? 수많은 이들의 놀라운 간증들, 내가 겪기 전엔 믿기 어려운 성경의 많은 사건들, 성경은 분명히 일러줍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나니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9:17)” 내가 겪지 않고 눈으로 못 봐도 듣고 신뢰함으로 믿는 이 믿음이 순도 100%의 믿음입니다. 아멘.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들은 모두 크고 작던 우리 개개인을 구원하시고 도우시며 살려주신 놀라운 증거들이 가득합니다. 그 증거들은 모두 “내가 날 위해 널 구원한 증거요, 넌 내 소유된 백성”이라는 불도장인 것입니다.
육체가 있는 한, 지워지지 않고 지울 수 없는 낙인, 세상이 미워하는 예수쟁이의 낙인, 천국인의 증표를 받은 저와 여러분의 공동사명은 교회를 세워가는 일입니다. 교회를 세우는 이, 그 가정을 주님이 세우실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는 이, 이 특권을 받은 우리들, 그 후예 후진들을 주님이 키우시고 보호하실 줄 믿습니다.
스티그마, 십자가의 남은 고난, 예수의 흔적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감당하는 수고입니다.
예수께서 우리 몸에 찍은 낙인, 예수쟁이란 이름으로 죄와 싸워 이기며 경건 중에 받을 복을 다 받아 믿음의 귀한 가문들이 다 되시길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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