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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20.06.07. 주일설교<고전1:1-3. 바울사도의 문안과 축복>

by 설렘심목 2020. 6. 12.

2020.06.07. 주일설교<고전1:1-3. 바울사도의 문안과 축복>

[삶은 사랑하는 것만큼 살아가는 것이며 사랑하는 것만큼 풍성해지는 것. 사랑은 내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분열은 주는 것만큼 원하기 때문이다. 갈등과 아픔은 아직도 받아야 할 것이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소망과 욕구의 경계가 모호해 괴로운 것은 항상 필요라는 잣대가 분깃을 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의 서신은 첫 인사를 한결같이 ①자신이 예수그리스도의 사도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과 ②서신을 받을 대상자와 그 신분 ③하나님아버지와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를 따라 입는 은혜와 평강의 축복입니다.

바울의 문안인사말을 이렇게 삼등분하면 바울의 기본적인 신앙고백이 정리됩니다. 본문 1절을 함께 읽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바울은 모든 편지 서두에 자신을 소개할 때 늘 이렇게 하나님을 앞세웁니다.

 

1. 하나님으로 시작하는 자신의 정체성입니다.

 

예배하는 여러분. 우리가 인간되고 내가 나 된 것, 하나님의 뜻에 따라 된 줄 압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랑이고 사랑은 거저주는 선물인줄 우리가 믿습니다. 짐승으로 태어나지 않고 사람으로 태어나 하나님 믿으니 죽어도 감사입니다. 그러니 비록 연약하여 종종 넘어지고, 부족하여 스스로 정죄하며 괴로워도 우린 하나님의 귀한 자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높이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를 생각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주님은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교회를 이루는 성도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는 우리들의 삶과 입술을 통하여 천국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일들이 많이 증거 되어야 할 줄 압니다.

 

바울사도는 제자출신의 다른 사도와 달리 예수님 살아계신 동안에는 교회를 핍박하는데 앞장섰던 정통 유대교 청년이었습니다. 부름받던 순간에도 바울청년은 유대교 앞에 나타난 예수의 추종자들, 신흥이단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정오쯤에 하늘에서 큰 빛과 소리가 들렸습니다. 바울은 땅에 엎어졌고 하늘에선 소리가 들리는데 예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바울사도는 기존의 열두 제자에 비해 정통성의 시비가 따를만한 세간의 시선을 늘 염두에 두어 그의 모든 서신 앞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이 예수의 사도로 부름 받았다는 인사를 잊지 않고 전합니다. 그렇게 바울은 항상 하나님의 뜻을 먼저 밝히는 것으로 자신의 신분을 선포합니다. 우리도 우리의 성도된 신분이 우리의 뜻이 아니라 오직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찾아오신 하나님의 뜻과 은혜인 것을 누구에게나 밝히기 바랍니다.

저나 여러분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그리고 믿기 위해 무엇을 했습니까? 바울은 내가 나 된 것은 오직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라고 밝힙니다. 우리가 한 일이라곤 범죄가운데 요나처럼 끝까지 반대쪽으로 도망치려 했던 것뿐입니다. 요나가 탄 배는 곧 물에 잠길 듯 되어 요나의 뜻은 좌절되었고 요나는 파도치는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큰 물고기의 뱃속에서 사흘간 죽음을 맛본 요나는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방향을 바꿔 니느웨로 갑니다. 자신의 생각과는 달라도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만이 살 길이요, 평화요, 풍성인 줄 믿고 아멘입니다. 2절입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바울의 문안 두 번째 내용은

 

2.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있는 상대방의 정체성입니다.

 

여러분, 나라는 존재, 곧 여러분 자신은 왜 소중합니까? 사랑해야 할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랑해주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고받는 사랑의 대상자가 없다면 우리는 아무 가치가 없는 존재들입니다. 편지의 수신자 고린도교회를 바울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첫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해지고 성도라 부름 받은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예수라는 구세주를 제대로 알면 누구나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고백은 당연한 것, 인정하고 아멘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살던 인생들 가운데 특별히 불러내시고 성도라는 이름을 주신 후 성도답게 구별된 삶으로 인도하시는 주님께 찬미를 올려드립니다.

성도가 되면 성도에 합당한 인격과 더불어 성결로 끊임없이 채워져 가게 됩니다. 그것은 평생을 통해 이뤄지는 구원 곧 거룩함으로 가는 길, 성화입니다. 세속적인 모든 옛사람의 악취가 떠나 가면 거기 무너졌던 하나님의 형상이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자기위주의 이기심, 시기질투, 수군거림, 조롱과 야유, 끝없는 욕심, 혈기와 분노, 교만, 어리석음과 게으름이 하나씩 사라져 갑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하늘에서 하나님의 성령이 부어주시는 놀라운 것들이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5:23)잠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살펴봅니다.

1)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13:4-7)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13:13) 연모라는 말이 없습니다.

2) 희락은 주님 때문에 어떤 정황에서도 기쁨을 회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3) 화평, 화목은 다툼과 갈등과 마찰이 있는 곳에 나타나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4) 오래참음으로 사랑을 실현하는 것은 성령의 일로서 성도의 큰 덕목입니다.

5) 자비, 신앙의 절개와 순결을 지키기 위해 때로 우린 단호하고 강직해야 하지만 성도는 언제어디서나 부드럽고 자비로운 주님의 마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6) 양선, 성령의 능력으로 선한 양심이 힘을 얻어 이웃을 적극적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7) 충성, 무슨 일에나 성실하며 온 마음을 다하게 됩니다.

8) 온유함은 겸손과 함께 성도의 강력한 덕목입니다. 언제나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9) 모든 일에 적절한 선을 찾아 마무리하는 아름다운 절제의 덕이 생깁니다.

이와 같이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변화하고 결국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하도록 주님이 친히 당신의 나라들을 만들어 가십니다.

두 번째, 바울의 문안과 축복을 받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이들(욜2:32/롬10:13/행2:21)이었습니다. 성도여러분. 주님의 이름, 예수그리스도의 거룩하신 이름을 부르며 살기 바랍니다. 그 이름 안에 여러분이 원하시는 모든 것이 있습니다. 특별히 그 이름 안에는 죽으면 다시 살아나는 부활이 있습니다. 안보와 평강과 힘이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세요. 사람이 누구를 부른다는 것은 그에게 뭔가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면 누구든지 구원하시는 주님은 신실하셔서 반드시 응답하는 분입니다. 3절입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3.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은혜와 평강의 고백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자신의 존재와 믿음이 오직 위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평강의 은혜가 하나님을 떠나선 불가능한 것임도 아울러 고백합니다. 오늘 문안인사에서도 그 부분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쟁취하는 기쁨과 보람은 한계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스스로 획득했다는 소득과 기쁨은 늘 상대적이어서 오래 못갑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것이 떠날 때 말할 수 없는 허망과 회의를 남깁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는 모든 이들에게 자신과 같은 하늘의 은혜와 평강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서두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한다.”고 밝힘으로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 외 다른 곳으로부터 오는 평강과 은혜가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인생의 모든 진정한 의미는 다시 사신 부활예수, 우리 주님으로부터만 오는 것을 믿고 아멘입니다.

이렇듯 서신의 발신, 수신을 하나님의 사랑가운데서 그 뿌리를 찾는 바울은 인생의 시작과 과정과 끝을 모두 하나님께 두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한 사람의 인생은 그 사람주변에 관계라는 열차를 타고 가는 긴 것 같지만 매우 짧은 여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관계라는 인생열차에서 저와 여러분이 예수로 인하여 분명한 자신의 색깔과 노선, 곧 정체성을 선언하기 원합니다. 그리고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그 이름을 부르는 이들에게 복을 비는 축복권으로 주변에 복음의 권세를 선포하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하는 축복은 예수 믿는 성도들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참고삼아 일러드리건대 축복(祝福)이란 말은 복을 기원한다는 말로서 성경에선 제사장, 곧 장자가 하나님께 복을 빈다는 뜻입니다. 즉 장자들의 특권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우리를 축복하여 주소서.”라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하나님위에 더 높은 존재가 없으니 하나님이 누구에게 복을 빈단 말인가? 하나님께는 “복을 내려주소서.”라고 해야 합니다.

이 축복권은 믿음과 사랑으로 할 때 남용이 없는 선하고 의로운 권세입니다.

마음놓고 사용하기 바랍니다. 이웃을 위해 언제나 감동주시면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기억할 것은 여러분의 권세가 아닙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하는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이뿐만 아니라 여러분에게 본의 아니게 실수로 손해를 입힌 이에게도 주님이름으로 축복하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누구를 미워할 때 주님은 안타까워하시고 이웃을 축복할 때 그 복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에게도 임한다는 것을 믿기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기도합니다.

아버지여, 바울은 성도를 향한 문안과 축복 속에 자신의 존재와 정체를 분명히 밝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렸습니다. 우리 말씀을 먹은 심령들 속에서도 역사하사 남은 평생 어디서 누구를 만나도 바울의 문안과 축복의 권세가 넘치게 인도하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