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31. 주일예배<창12:1-3. 하나님의 명령, 복>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만큼 믿음에 관한 한 우리에게 전형적인 인물이라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먼저 그를 찾아오신 하나님으로부터 그 뿌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우린 본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아브람의 믿음이 하나님 앞에 의로 인정받기까지는 많은 일들을 통해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를 깨닫게 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오늘 설교제목이 ‘아브람을 찾아오신 하나님의 명령, 복’입니다. 제목안에 설교내용이 담겨있습니다. 복음은 항상 복을 전하기 전에 복을 받기 위해 필요한 일과 명령이 나타납니다. 저와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의 삶과 저 세상에서 최고의 복인 것을 믿습니까? 그러면 그것을 깨닫게 하는 일은 어떻게 시작됩니까? 본문 1절을 함께 읽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1. 떠나야 할 본토 친척 아버지 집과 주님이 보여주실 땅의 약속입니다.
1) 떠나야 할 본토 친척 아버지 집입니다. 사람들은 안전한 곳에서 보장받는 삶을 원합니다. 물 건너 산 하나만 넘어가면 아름답고 인심 좋고 풍요로운 마을이 있다고 해도 낯선 곳을 지나야 하는 위험한 여행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살고 있는 곳이 가난과 살벌한 위험뿐이라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아브라함의 선조들은 아브라함의 할아버지 대까지 모두 30세 전후에 결혼함으로 가정에 큰 문제가 없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나이 70에 결혼함으로 데라 때부터 심한 가난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깎아 세운 듯한 절벽 틈바구니에 새끼를 낳아 기르는 독수리는 어떻게 독립을 시킵니까? 부드러운 바닥을 걷어내고 삭정지만 남은 둥지바닥이 따가워서 앉을 곳이 없게 합니다. 온통 삭정지투성이인 바닥이 불편해 엄마 등에 오르면 그 때를 놓치지 않고 밖으로 뛰어내려 활공을 시작합니다. 갑자기 엄마 등이 유일한 생명끈이 된 새끼는 엄마 등을 패이도록 잡습니다. 그러나 엄마는..중략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음성이 어느 때 어디서 가장 잘 들립니까? 예. 절박할 때에 잘 들립니다. 편안하고 등 따듯할 때엔 잘 안 들리던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평소 시계소리를 우린 못 듣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비우고 고요히 있으면 시계소리가 생각보다 매우 크다는 것에 놀랍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런 시계소리가 종일 안 들린다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일에 분주하면 세미한 주의 음성을 못 듣습니다. 문제는 관심입니다. 사정이 좋을 땐 아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절박하면 찾고, 찾으면 들리는 하나님음성입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절박한 사정이 주님음성을 듣는 최고의 기회인 것을 믿는다면 힘든 일조차 감사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무 일 없을 때 종종 모든 것 고요히 내려놓고 주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여 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람이 가난에 찌든 생활을 할 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본토를 떠나라고 하십니다. 오늘 이 명령이 저와 여러분에게 생명의 복음이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떠나야 할 고향친지 아버지의 집엔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피기로 합니다.
말 그대로 그동안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가문의 전통과 민속적 정서문물 등입니다. 특히 부모로부터 유전된 비성경적인 모든 것들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유교전통과 윤리관으로 성경적이지 못한 부분이 많습니다.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을 하고 있는 동시 분명히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한 몸을 이루는 것을 가정의 기초로 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부모의 그늘을 속히 벗어날 것을 지시합니다. 성경없이 시작한 우리민족의 유교적 전통윤리관은 아내를 버리더라도 부모를 노하게 해선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를 떠나야 가나안 복지가 보이는 성경말씀은 독립된 한 가정이 가문과 조상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함으로 열리는 놀라운 미래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우리는 사방에 민속이란 이름으로 위장된 무속문화 속에서 자라나 아주 자연스럽게 미신을 받아들이며 살고 있었습니다. 굿, 점, 푸닥거리, 토정비결, 사주팔자, 궁합, 그 외에도 얼마나 많은 오류 속에 살았는지 모릅니다. 극심한 남존여비사상아래 여자는 사람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어떤 분이 두 집 살림을 했습니다. 돈 되는 일은 무엇이든 했습니다. 아무도 욕하지 않았고 수완 좋은 사람이라고 부러워했습니다.
혼탁한 가치관의 범람, 어두웠던 조선시대끝자락에 복음이 등불이었습니다. 복음없는 민족이 외세에 눌려 36년간 신음할 때에도 기독교인들이 주축이 된 독립운동은 결국 기독교 독립운동가인 이승만박사를 앞세워 나라가 열렸습니다. 하녀와 다름없는 여인들을 일으켜 세웠고 문맹퇴치와 의료구제사업과 산업혁명이 따라서 일어났습니다. 술과 도박퇴치운동을 벌여 사회계몽이 일어났고 노예처럼, 짐승처럼 살던 사람들, 힘없이 비굴하게 살던 백성들에게 진정한 가치와 정의를 위해서는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성도여러분. 그동안 우리의 주변, 곧 본토친척 아버지의 가문은 이렇듯 온통 끊어내야 할 오류로 가득하다는 것을 누가 일일이 밝혀주겠습니까?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은 민족과 시대를 초월해 분명 복된 진리요, 빛입니다.
2) 주께서 보여주실 땅으로 가야 합니다. 땅은 활동반경이며 통치가 이뤄지는 곳을 말합니다. 땅값 비싼 부자동네에 살아도 마귀의 통치를 받아 우상숭배하고 오직 돈의 노예로 산다면 그곳은 불행한 지옥입니다. 주님은 분명, 물질과 하나님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섬길 때 물질을 주시는 것이지 물질을 섬기면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겁니다. 즉 돈은 내가 부리고 사용할 대상이지 섬기는 대상이 아닌데 안타깝게도 믿음 없는 인생은 하나님의 통치대신 물질의 통치를 받고 살아가게 됩니다. 주께서 보여주실 땅은 그러므로 주님이 다스리시는 곳을 말합니다. 거기가 작은 단칸방이어도 좋습니다. 본토에서 잘못 유전돼 끊어내지 못하고 끌려 다니면서 불행을 운명이라고 여기고 살아왔던 모든 것을 털어내고 일어나 새롭게 복음과 함께 출발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인 주님의 땅은 어디겠습니까?
그것은 이미 밝혔듯이 주님의 통치가 머물러 있는 모든 곳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어딜 가든 거기서 강렬한 주님의 간섭과 동행을 느낄 수 있다면 그곳이 바로 주님이 가라 명하신 곳이 되는 것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그것은 다분히 우리자신의 내면에 관한 것입니다. 성도는 항상 마음속에 주님을 모신 채 그분이 원하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결정해서 성경이 이른 대로 가는 사람들입니다. 오직 말씀을 따라 꿈꾸고 생각하며 몸을 움직여 행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는 새 하늘 새 땅, 신천신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모든 것 기울여 말씀에 순종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본문 2-3절을 함께 읽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2. 말씀을 따라가는 성도의 삶이 복입니다.
2절 앞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고”
1) 가문과 민족의 복입니다. 가문이 융숭해지고 민족이 일어납니다.
예수 3대째 믿는 가정들은 모두 자손이 복을 받아 만복의 근원 주님을 삶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대로 전도가 되는 줄 믿습니다.
그건 또 민족적으로도 한가지입니다. 교회가 기도하고 부흥하면 나라가 일어납니다. 영국에 교회가 들어오기 전엔 해적의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영국에 교회가 들어서고 교회들이 기도하고 부흥할 때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고 신사의 나라였습니다. 요즘 영국교회가 쇠퇴하자 이젠 과거 추억만 무성한 나라, 힘없는 나라가 돼버렸습니다.
2절 뒷부분입니다.“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2) 이름이 드러나는 성도의 복입니다. 이름이 드러난다는 것은 많은 무리들이 그를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름이 감춰지고 주님의 거룩한 이름만 드러나기 원합니다. 겸손한 성도의 복된 이름은 결국 주님의 명예입니다. 주님은 우릴 통해 당신의 이름을 만천하에 드러내시기 원합니다. 그때 드러난 성도와 교회의 이름은 그대로 주께 받은 복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가난한 아브람에게는 일찍이 부모를 여윈 조카 롯을 포함한 몇 명뿐이었지만 훗날 12지파를 통해 창대한 민족 이스라엘을 이루게 됩니다.
3절을 읽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3) 주변이 복을 얻는 복의 뿌리가 되는 축복권입니다. 본문 말씀에는 아브람을 축복하는 자가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누구든지 복을 받고 싶으면 아브라함을 축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브람을 저주하면 하나님의 저주가 임합니다. 두려운 그 권세, 복을 빌고 환영받는 대단한 권세, 하나님이 보장하신 축복의 권세, 저와 여러분의 권세입니다.
3절 말미입니다.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성도여러분, 우리 주변과 정황이 우리를 통해 화목하고 복을 얻기 원합니다. 다만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복과 눈에 뵈는 세상의 복에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복이란 단순히 잘 먹고 잘사는 게 아닙니다. 배부른 돼지가 복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궁극적 행복이란 인생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그분이 칭찬하실만한 삶을 살 때 비로소 인간은 복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복된 삶은 인간 스스로 창출해낼 수 없다는 것도 우린 경험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삶은 죄와 멱살잡이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아무리 고상하고 품격이 있다 해도 하나님의 뜻 안에 숨겨진 비밀의 격에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이제 아브람에게 약속하셨던 복을 정리할 때 가슴에 각인되는 귀한 사건이 되길 원합니다.
첫째,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복, 예배하는 복입니다.(7-8절 외 다수)
둘째, 말씀을 따라 사는 복입니다.(4절)
셋째, 은금이 풍부해지는 재물의 복, 물권입니다.(13:2. 26:13)
넷째, 주변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관계의 복입니다.(14:14)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신실하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이렇게 먼저 그 분 안에서 출발하여 우리들의 육체와 세상에서, 결과로 드러납니다. 지금 밝힌 네 가지 복은 분명 주님이 약속하신 것이니 안 지켜질 수가 없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복과 은혜와 언약은 새벽마다 변함없이 내리는 이슬과도 같습니다. 그렇게 주님은 모든 것을 베풀고 약속 지키실 준비가 완벽한데, 받는 우리가 게으르고 야무지지 못하여 다 받지 못하는 게 현실입니다. 약속하신 복과 그로 인한 열매들을 기도로 올리면서 말씀을 마칩니다.
기도합니다.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의 복과 예배에서 받은 말씀과 올려드린 결단은 힘써 지킴으로 결국 재물의 복과 관계의 복으로 드러난다는 말씀 잊지 않고 그대로 사는 우리 모두이길 주여 간곡히 원하나이다. 그리하면 저희들은 도움을 받기보다 도와주는 삶이 되며 우리보다 우리 후손이 더 나은 삶을 살 줄 믿나이다. 불평이 사라지고 짜증이 줄어들고 오직 감사하고 기뻐하는 삶에 노후에는 기탄없이 나를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는 아름답고 담대한 믿음의 사람들이 될 줄도 믿습니다. “마침내 거부가 된 아브라함은 어딜 가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먼저 예배를 드리고 거기서 하나님의 이름을 간절히 불렀으니 아버지여. 우리가 아브라함의 후손답게 살 수 있도록 믿음 위에 믿음을 결단 위에 결단을 더하여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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