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일강단

2020.05.24. 주일예배 <시 146:1 –10. 노래하는 복과 기쁨.>

by 설렘심목 2020. 5. 31.

2020.05.24. 주일예배 <시 146:1 –10. 노래하는 복과 기쁨.>

 

복음을 제대로 듣는다면 설렘과 기쁨의 울타리에 갇히게 됩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기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이 복음이려면 하나님의 택하심과 불러주심 그리고 인간의 적극적 반응이 있어야 합니다. 이 반응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곧 하나님이 우릴 먼저 찾아주실 때 믿음과 찬송으로 반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 복된 이유를 본문은 뭐라고 밝힙니까? 5절입니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믿는 사람이 복된 이유 첫째,

 

1. 하나님을 의지하며 노래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은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이유 중에 중요한 하나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라고 사43:21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깊은 교제와 친밀한 관계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변함없는 경외와 사랑과 노래의 대상임을 깨닫고 지속적으로 찬송하는 자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찬양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찬송하는 자에게 찬송거리를 주시고 감사하는 사람에게 감사거리를 주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을 의지하고 찬송하는 데는 많은 방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과 하나님의 작품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 속에서 드러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들을 통해 하나님의 만족을 채워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구체적으로 예배드림과 주변을 사랑하되 예수님의 헌신을 따라 희생하며 사랑하는 것을 통해 성실하게 실천해가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일속에서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 실망하고 실망을 드리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진심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잘 믿어 성실함으로 복되게 살려하는데 도중 모든 문제는 역시 저와 여러분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만복의 근원 하나님이신 것을 믿습니까? 세상의 마지막 소망도 예수이신 것을 믿습니까? 믿은 대로 됩니다. 그런데 우린 힘겹게 갑니다. 3절입니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우리에게 찾아오신 복음, 예수그리스도를 가로막는 것은,

 

2.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귀인들과 도울 힘이 없는 인생들을 의지하지 말라고 합니다. 귀인은 만나기 쉽지 않은 귀한 분들입니다. 눈에 보기에 그들의 사회적 신망과 권세와 재력이라면 상당한 도움이 되리란 기대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게 없다는데 돈 많고 게다가 훌륭한 인품과 사회적 위치도 있는 분이 돕는다면 큰 의지와 힘이 될 겁니다. 분명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기 때문에 우린 그런 사람들을 통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귀인들을 통해 하시는 하나님의 일과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살펴봅니다. 본문에서 일러주는 귀인들은 의지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편 귀인들을 통한 하나님의 활동은 매우 요긴한 것이라 그것을 구별하는 잣대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세상 살면서 분명한 기준을 갖고 그것으로 모든 것을 측량해 옳고 그름과 부족함과 넘침을 가늠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성경인 줄 믿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아이 훈육에 체벌이나 회초리가 있습니다. 여기서 호초리가 사랑의 매인지 화풀이감정처리인지를 구별하는 법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때린 사람이 맞은 사람보다 더 아프다면 그것은 사랑의 매요, 맞은 사람은 아픈데 때린 사람이 후련하면 악성체벌로 봐야 합니다. 자녀에게 회초리를 들어 때린 뒤 속이 시원한 부모라면 그것은 아이에게 상처가 됩니다. 그러나 붙들고 함께 우는데 부모가 더 서럽게 울면 아이는 상처대신 감동을 받아 변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누가 피해야 할 귀인이고 누가 하나님이 보내신 귀인이겠습니까?

그건 간단합니다. 내게 다가온 귀한 분이 자신의 이름대신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만을 말하며 자신의 이름을 한사코 감추려한다면 그는 하나님이 보내신 귀인입니다. 그러나 대단한 능력과 재산과 인격, 권세가 있어도 하나님과 무관하게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려 한다면 그는 성경이 의지하지 말라는 귀인가운데 한 사람일 뿐입니다. 그런데 잘 들으세요. 하나님은 교만한 자의 손에 선물을 한 아름 들려 보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를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의지하며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그를 하나님은 비굴하지 않게 하십니다. 믿기 바랍니다. 여기서 이 귀인은 한 지붕아래 살고 있는 가족일수도 있고 매일 만나야 하는 직장동료일 수도 있고 갑자기 만나는 생면부지의 초면일수도 있습니다. 누구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마주해야 하는 그 사람이 의지해선 안 될 사람인가 아니면 환영해야 할 하나님의 사람인가를 살펴 환영하든 피하든 싸워 이기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정 주시는 것 다 받으면서 노래하며 살기를 원합니까? 성공하고자 하는 그 일에서 자신의 이름보다 주의 영광만 드러나기 원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에 적극 순종하고 예배 잘 드려야 합니다. 어떤 예배에도 성실하게 드려 승리해야 합니다. 예배는 출석상입니다. 예배에서 듣는 하나님말씀으로 어찌해야 사람과 귀인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풍성과 영생을 이웃에게 거저 나눠줄까 기쁜 소망으로 말씀에 의지하기 바랍니다.

 

6-10절까지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생명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이 도움이신 것을 믿는 자가 받을 것들을 선포합니다. 누가 복된 자라고 합니까?

 

3. 하나님만이 나의 도움이 되시고 소망인 것을 믿고 선포하는 자가 복됩니다.

 

하나님만 의지하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 인하여 많은 것들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뒤로하고 내가 한번 해보겠다는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곧 두 손을 들게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일하실 때 언제나 우릴 부르십니다. 사람을 인격 없는 로봇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어린 자녀가 소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는 것만큼 자녀를 확실하게 바보로 만드는 일도 없다고 오래 전 일러드렸습니다. 우리는 고통을 호소하고 기도할 때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효과적으로 사랑하시는 방법을 실현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어찌하면 이 영혼이 더 복된 삶을 살며 경건을 연습하여 이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내 기쁨이 되려나?” 이것이 하나님의 관심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형상, 당신의 나라, 하나님 관심은 그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그 이상의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실질적으로 우리에게 있어서 대단한 가치와 탁월한 삶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주께선 죽은 후 뿐만 아니라 살아 여기서도 이미 하나님이 역시 하나님이신 것을 분명히 알도록 주의 백성들을 다루어 가십니다. 6-10절엔 그 하나님의 소원이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말합니다.

 

6절 끝에 하나님은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신다고 했습니다. 육체에 갇힌 인생들은 태어나 죽을 때까지 육체의 한계 속에 늘 부족을 느끼고 부족은 열등감과 수치로 자기존재감을 떨어뜨립니다. 부족과 실패 앞에 유일한 대안은 뭐라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부족과 실패의 유일한 대안은 정직입니다. 본문은 우리의 부족 앞에 정직으로 살게 하시고 그 정직을 영원히 보존해주신다는 겁니다. 7절에 억눌린 자가 바른 심판을 받아 공정한 대접을 받을 것이며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갇힌 자에게 자유를 주신다고 합니다. 신8:18절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즉 돈벌 능력을 주셨다는 겁니다. 잘 아시는 잠22:4절에선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뭐라고 했습니까? 예. “재물과 영광과 생명”입니다. 8절에는 눈먼 자들의 눈을 열어 보게 해주시고 비굴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 숙인 고개를 들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의인 곧 하나님을 믿고 사악한 마음을 품지 않으며 우상에게 절하지 않는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끝으로 9-10절에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사랑하셔서 든든하게 붙잡아주신다고 합니다. 가정이 있어도 고아와 과부처럼 살아가는 현대인들. 책임 못 지는 가여운 부모를 뒤로하고 하나님은 우릴 낳으신 부모요, 예수께서 우리의 신랑이셔서 영원히 사랑하고 다스립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 악한 자들을 쓰러뜨리고 우리가운데 영원한 노래와 찬미와 영광의 임금으로 계십니다. 기도합니다.

“ 아버지여, 당신을 끊임없이 노래하며 살기를 원하나이다. 그렇게 노래가 끊기지 않는 개인과 가정이 되기 위해 인생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기 원하는데 주여. 분별의 영을 이시간 나리소서. 밝은 성경적 지혜를 내리소서. 그리고 그 지혜와 분별을 따라 바로 행하되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복을 더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