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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20.05.10. 주일설교<하박국서 3:17-18. 성도의 기쁨, 구원의 하나님>

by 설렘심목 2020. 5. 10.

20.05.10.주일설교<하박국서 3:17-18. 성도의 기쁨, 구원의 하나님>

남쪽의 유다는 주전 7세기 초에 일어난 신흥제국 바벨론 때문에 외교국방에 있어 강대국 사이에 매우 곤경에 처합니다. 애급과 친하면 앗수르가 와서 때리고 앗수르와 친하면 새로 나타난 바벨론이 와서 때립니다.

그렇다고 중립을 지키려 하면 그것은 모두에게 당할 처지입니다. 우상숭배를 한 유다는 어차피 하나님의 징계로 멸망이 정해진 길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가는 현세에 능하지만 하나님의 종들은 현세를 보는 동시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손끝을 보고 인류의 역사 큰 줄기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끝내 성경을 떠나서는 해석되지 않는 것이고 그 역사는 가깝게는 한 민족의 현실로부터 시작해 멀게는 온 인류가 걷고 있는 지구의 미래를 보게 됩니다. 본서를 기록한 하박국선지자는 극심한 불안과 고통가운데 있는 백성을 향해 투철한 신앙의 촉구와 더불어 그럼에도 불구한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을 간곡하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인생 한 평생 중 전쟁과 같은 불행도 드물 것입니다. 전쟁은 다른 모든 불행을 이끌어내는 불행의 아버지쯤 되는 국가적인 불행입니다.

전쟁하면 의례히 나오는 단어가 질병, 굶주림, 전쟁미망인, 고아, 장애인, 가난과 노숙걸인, 폭력, 불공평, 노예와 학대 등 인간의 모든 불행들이 고개를 들고 나옵니다. 전쟁은 인간이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극심한 불행가운데 하박국선지자는 그럴지라도 나는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할 것이라고 선포의 노래를 합니다. 과연 그것이 가능한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가능합니다.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박국선지자를 불행가운데 노래하게 하셨다면 우리에게도 환경과 무관히 하나님을 찬미하며 노래할 수 있게 하실 줄 믿습니다.

사방에서 불행이 닥쳐와도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려면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1. 본래 우리는 그 자체였습니다.

 

거저 얻은 10개에서 3개를 잃었습니다. 이게 손실입니까? 엄격한 의미에서 이건 손실이 아닙니다. 손해나 손실은 내 소유 중에 뭔가 있다가 없어진 것을 말합니다. 공짜로 얻은 10개의 물건은 본래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존재자체가 알고 보면 자신의 소유가 없습니다. 인간의 존재는 만유가 그랬듯이 하나님이 있으라고 말씀하심으로 존재하기 시작한 삶이요, 존재들입니다. 90:3절입니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본디 저와 여러분을 비롯한 모든 존재물은 아무 것도 아니었고 존재이하에 있던 무, 그것이었습니다. 이 땅에 나올 때에 손에 쥔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것과 함께 이 땅을 떠날 때에도 빈손인 채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공연한 상실감은 정확히 말해 욕심이 불러온 착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린 뭔가 우리에게 넉넉한 것들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언제나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으로 공허함을 느끼게 합니다. 모든 눈에 뵈는 것들은 잠시 내가 후손으로부터 빌려 쓰고 있다는 분명한 생각을 오늘 갖기 원합니다. 혹 그것들이 나를 피해 나만 불편을 겪는 일이 있어도 영원한 하늘나라에 돌아갈 구원의 백성임을 믿는다면 잠시 겪는 고통은 더 이상 심각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2. 우리의 삶은 거저 받은 것뿐입니다.

 

대상29:14절입니다.“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입니다.”성전건축을 위해 드려진 각종 예물을 쌓아놓고 하나님께 올린 다윗의 감사기도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모든 헌물들, 다 하나님께 받은 것의 일부를 구별하여 올려드림으로 우리의 마음과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이 언제나 은혜와 선물가운데 있는 것을 깨닫는 것은 큰 복입니다. 행과 불행은 눈에 보이는 환경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그 환경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에서 비롯된다는 것, 이젠 성도의 불변하는 상식이 됐습니다.

백번 강조해도 좋은 것은 겸손만큼 큰 힘은 없다는 것입니다. 겸손은 크고 넓은 마음입니다. 마음을 낮추면 몰랐던 여러 가지 사실을 알게 됩니다. 어떠한 것도 감사함은 말씀이 열린 자들의 특권이기도 합니다. 하나님말씀이 조금씩 들리기 시작하면 온갖 것들이 감사로 다가옵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감사란 감사하기 어려운 일까지도, 즉 상태를 따지지 않고 조건과 무관한 무조건적 감사를 말합니다. 왜냐하면 어리석은 자는 고난에서 아픔만을 느끼지만, 지혜로운 자는 고난의 의미, 고난 후의 영광을 발견하고 성숙할 기회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1:20-21절입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은즉 또한 적신이 (모태가 흙으로 돌아간 것처럼 나도) 그리로 돌아갈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소서.”

 

다 잃어 본 사람, 복된 사람입니다. 욥은 다 잃었습니다. 짧은 시간 안에 너무 소중한 것들을 다 잃었습니다. 물질을 잃은 것은 잃은 것 중에 제일 작은 것입니다. 물질보다 더 힘든 상실은 관계의 상실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는 슬픔을 무엇에다 비길 수 있겠습니까? 자녀마저 모두 잃은 욥, 그러나 그는 빈손으로 돌아가는 인생의, 거역할 수 없는 길을 보고 즉시 엎드려 불평대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배신당하지 않기 축복합니다. 병이나 사고로 사람을 잃을 때 슬픕니다. 그러나 믿었던 사람이 나를 등지고 멀리가면 견딜 수 없이 힘듭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에 우리는 언제나 말씀으로 돌아와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결코 우릴 떠나거나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비롯한 모든 것을 주실 뿐 아리라 다 잃는 순간에도 나와 함께 계신 하나님을 생각하는 게 성도입니다. 우리가 잃어버렸다고 하는 모든 것들 주님 손안에 다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도여러분. 주님 명령이란 것들은 믿고 따를 때 복으로 변하는 것들입니다.

 

옛말에 진삿댁 강아지가 죽으면 사람이 북적대도 진사가 죽으면 찾는 이 아무도 없다고 했습니다. 조건을 따지는 관계가 세상이라면 주님은 전혀 조건없이 우리를 받으셔서 죄로부터 구하시고 자녀 삼으셔서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선물보다 선물을 주신 분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보배입니다.

 

3. 오직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조건 없이 감사합니다.

 

어떻게 무조건적인 감사가 가능합니까? 본문 18절을 봅니다. 이것저것 다 없어도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구원의 하나님을 기뻐한다.”는 것은 기쁨의 이유가 하나님의 실존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그냥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하나로 모든 조건을 뒤로 하고 기뻐하겠다는 것입니다. 가능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아무 조건이 없기 때문입니다. 굳이 사랑의 조건을 말하라고 한다면 사랑할만한 대상이 있다는 존재자체입니다. 그냥 네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내가 행복한 그것이 참 사랑입니다. 잠들어 있는 어린 자녀를 가만히 바라보는 엄마의 가슴 저미는 행복은 아기의 존재차제입니다.

 

아픈 데가 있는 자녀라 할지라도 엄마는 그저 그 자녀가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것입니다. 사랑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희생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끝없는 행복입니다. 우리존재 자체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이렇게 예배까지 올려드리니 얼마나 기쁘시겠습니까?

함께 노래로 옆의 지체들을 축복하기 원합니다. 찬미예수 64번곡입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신 전능자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즐거이 부르며 기뻐 기뻐하시리라.”3:17.

 

여러분의 자녀가 결혼할 때 성품.건강.관계.부모.가문.학벌.직장.재산.친구.취미.특기 등 여러 조건을 살핍니다. 물론 이러한 조건은 중요하지만 아무리 중요해도 그 상대방 사람자체보다 중요하면 안 됩니다. 그 사람이란 그 사람과의 관계, 사랑을 말합니다. 헌신적인 서로간의 언약과 사랑이 무엇보다 우선돼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상대방이 아닌 다른 조건에 의한 결혼이었다면 상당히 위험합니다. 그 조건이 사라지면 그 결혼은 흔들립니다. 사람이 갖춘 조건들은 영구히 안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건강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재산을 믿을 수 있습니까? 직업도 무슨 변수가 생길지 모릅니다. 가문, 학벌이 행복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여기에 영원히 변함없는 한 가지 보장,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대신 죄값을 당신의 생명으로 갚아주신 분이십니다. 무엇보다 그 분은 하나님이시며 천국과 지옥의 열쇠를 손에 쥐고 계십니다. 육신에 갇혀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영원한 방패가 되시며 소망이 되신 우리 주님은 당신의 경건을 우리도 연습하며 그분 닮은 삶을 훈련하도록 늘 우리를 도우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다 잃어도 주님 한분이면 족하다는 믿음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며 그분의 능력을 신뢰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잃은 것을 본래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만든 것을 거저 주신 분이십니다. 물론 필요하시면 거둬 가시기도 하십니다. 욥을 보십시요.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지니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 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욥은 연이어 닥치는 재앙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함으로 범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일은 믿지 못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며 불신앙입니다. 그래서 원망을 방치하면 결국 범죄로 갑니다. 욥기 뒷부분에서 욥은 잠시 하나님께 불평하지만 곧 회개하고 큰 복을 받습니다. 소유는 갑절이 되었고 전국에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힘들 때일수록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높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만을 조건없이 흠모하고 앙망할 때 그분은 우리의 부족과 불충에도 불구하고 대신 죽으시고 구원하신 기쁨과 보람을 느끼시는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기도합니다.

아버지하나님, 아버지는 사랑이십니다. 주는 영생하시며 천국과 지옥을 다스리십니다. 여기서도 거기서도 하나님은 풍성이시오, 능력의 무한하심이오, 절대하신 주권자이십니다.

본래 우리는 무() 자체였습니다. 모든 것 거저 얻은 것입니다. 당신의 형상대로 우리를 지으시고 당신의 위대한 증거를 우릴 통해 나타내시기를 소원하고 계신 영원한 하나님 앞에 오직 믿음으로 우리 모두 하나님의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