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23. 주일설교 <롬 16:17-20. 선한 일에 지혜로운 이들>
[2020.02.15.토요. 어리석은 자는 하는 짓마다 어리석고 지혜로운 자는 지혜롭게 간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하는 일마다 죄를 향해 생각이 잡혀있는 인생들, 죄에는 태생적으로 익숙하고 의에는 거북하여 서투르기 짝이 없는 인생에 나남이 없다. 이런 인간내면을 발견한다면 자신을 믿는 것이 가장 위험한 일이고 의와 선이신 예수님을 믿는 일이 최고의 지혜라는 것도 알게 된다. 이대로는 안 된다며 미숙하기 짝이 없는 젊음을 아파하던 날 그래도 조금씩은 성장하기 시작했다. 선은 내 안에 선이 없음을 볼 때, 지혜는 내 안에 지혜가 없음을 볼 때, 지혜는 내 안에 지혜가 없음을 볼 때 비로소 시작됐던 것을 기억한다. 돌이켜 깨닫게 하시는 이는 오직 우리 주 예수뿐이라.]
로마교회에 틈탄 거짓교사들이란 열심 있는 유대교 일부무리들이 유대교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신생 그리스도교회에 파고들어와 여러 그릇된 유대 교리를 전파하는 무리들을 말합니다. 그들의 목적은 오늘날 이단종교들이 갖는 것과 흡사합니다. 처음 시작은 거의 같으면서도 결정적인 주요교리에서 끝을 바꿔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교회를 방해하는 일은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비록 사소해 보여도 마귀의 활동입니다.
교회가 힘을 낼 수 있는 근거는 주님이 말씀하신 하나 되는 일입니다. 이 일치단결이 교회의 최소단위인 내가 내안에서 먼저 하나 되지 못하면 어렵습니다. 그런 후 가정이 그리스도의 진리로 하나 되면 가정 가정이 모여서 성령충만한 구역을 이루고 구역이 활성화될 때 교회는 든든히 세워집니다.
교회를 이루는 일이 어렵지만은 않습니다. 어떻게 교회를 세웁니까? 가정제단을 쌓으시기 바랍니다. 예배에는 찬양, 기도, 설교, 성찬, 봉헌이 있어야 합니다. 아빠가 아직 구원받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큰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자녀들을 불러모아 한자리에 앉히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엄마가 간단히 말씀을 증거하면 됩니다. 사도신경으로 시작하고 주기도문으로 가정예배를 마치면 거기가 주님 기뻐 받으시는 작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성찬과 봉헌은 주일 예배당에서 정한 대로 하면 됩니다. 어떤 환경이나 처지에도 여러분에게 예배가 그치지 않기 바랍니다. 예배가 멈추지 않는 한 하나님의 절대하신 주권은 여러분을 떠나지 않습니다.
예배는 지속적으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원활하게 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에 매우 친숙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쉽게 알아듣는 사람은 결코 인생을 허비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바쁜 사람은 이웃을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바쁜 사람보다 탁월한 결론을 얻어내지 못합니다. 나라는 울타리는 늘 빤하지만 하나님의 울타리는 무한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9절에서 바울사도는 로마교회가 순종함으로 기뻐한다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의 핵심교리 중 하나가 겸손이고 그 겸손은 순종을 최우선으로 꼽고 있습니다.
순종을 강조하는 말씀에서 오죽하면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고 했겠습니까? 거룩하고 순결한 가운데 하나님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 안에서 모든 능력이 되는 줄 믿습니다. 이 순종을 효과적으로 이루기 위해서 꼭 기억해 둬야 할 본문의 내용을 요약하기로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의 명령 앞에 순종함으로 선하고 복된 승리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합니까?
1. 교훈을 멀리하는 사람들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바로 배운 교훈은 삶과 신앙에 양약이 됩니다. 그러한 교훈을 멀리하거나 다른 가르침을 잘못 배우면 영혼이 곧 병들고 결국 사망의 음침한 길을 헤매기 시작합니다. 영혼이 병 들면 관계와 육신과 주변이 모두 오염되고 흔들립니다. 영혼의 상태는 인생 전체의 상태를 이끌어가기 때문입니다.
교훈을 멀리하거나 잘못 가르치는 사람은 당연히 피해야 합니다. 혹 주변에 그러한 무리들이 나타나면 즉시 말씀과 영의 권세로 꾸짖고 타일러야 합니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자신의 영혼을 지키기 위하여 즉시 그런 무리들을 멀리해야 합니다.
18절에서 그런 자들은 자기의 배만 섬긴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섬겨야 하는데 저들은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만 배불리기 위해 주님 자리를 사리사욕으로 채워 놨다는 겁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과 거기 따르는 거룩한 소망대신 내 배만 부르면 만사가 형통처럼 느끼는 동물적이고 세속적이며 다분히 사탄의 주장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요즘은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교묘하게 위장돼 접근하는지 쉽게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매우 인격적으로 자신을 위장하고 그럴싸한 외모와 품위 있는 교양으로 포장돼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심령 깊은 곳 보좌에 누구를 모시고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우상 중 가장 어리석고 악한 우상이 자기우상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자존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맛보는 자존감과는 다릅니다. 예수 믿고 죄와 사망에서 구원 받은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소중하고 존귀한 사실이고 가치 있는 일인지를 아는 것 이것이 신앙이 주는 자존감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하나님을 등진 채 예수님 없이도 자신이 썩 괜찮은 사람이며 자랑거리가 제법 있다고 생각하는 자기 존경심은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는 자존심입니다. “이래봬도 내가”라는 생각은 항상 상대방과 맞서게 하고 양보하거나 손해 보려 하지 않습니다. 어디서든 알아주지 않으면 마음이 상합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도 안보는 곳에서 하는 선한 일은 별 의미도 없고 관심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아니었더라면 이보다 더 비참한 인생이 어디 있을까하며 자신을 직관하는 사람은 오직 예수로 인하여 인생의 참의미와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됩니다. 영원한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초청을 알고 말할 수 없는 기쁨을 간직합니다.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감격이 모든 환경을 능히 누르는 것입니다. 자존심과 자존감은 예수안의 겸손과 예수 밖의 우월감으로 분명히 구별돼 드러납니다.
이렇듯 영적으로 깨어있지 않으면 스스로에게 감쪽같이 속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선한 일에 지혜로워야 합니다.
선의 기준이 세상과 교회는 다릅니다. 세상의 선은 윤리와 도덕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교회와 성경에서 말하는 선의 기준은 믿음을 말합니다. 어디를 바라보느냐에 그 잣대가 걸려 있습니다. 참된 선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불가능하다는 하나님제일주의사상으로 출발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가장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의 뿌리는 사실 자기중심이요, 인간위주로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정황에 따라서는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가치위에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윤리를 비롯하여 모든 도덕의 기준에서 완전한 희생을 찾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좀 더 확실하고도 선명한 사랑의 근원을 찾게 됩니다.
성경에서 이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요한 1서 4장은 사랑이 하나님께 속한 것(7절)이고, 사랑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라고 일러줍니다.(8절) 그리고 5장에서는 예수께서 구세주신 것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며 그렇게 믿는 자들은 세상을 이긴다고 사랑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래 전 “삶은 사랑한 만큼 살아가는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내리는 비는 하나님의 눈물이고 짙푸른 하늘은 “사랑함으로 아픈 하나님의 멍든 가슴”으로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시되 무한대의 사랑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사랑은 언제나 선악과의 잣대에 묶입니다. 부모의 자녀사랑은 아무도 물리치지 못하는 불치병이요, 배냇 병입니다. 이 부모의 본능적 배냇병 외 분명히 우리들의 사랑은 돌아올 만큼만 가동됩니다. 그래서 진정한 선이라고 하는 것은 부모 된 자리에서 비로소 알게 됩니다. 부모의 자리에서 배우는 하나님의 마음, 그 아픈 마음을 다 알 순 없지만 적어도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토록 우리를 찾고 계신 그 앞에 속히 마음을 열고 다가서는 것, 선한 일에 지혜롭게 된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혜롭다는 말엔 민첩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모든 지혜는 때를 놓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선한 일에 지혜롭게 되면 악한 일에 둔하고 서툴게 됩니다. 악한 일이 하나님을 떠난 모든 생각과 행위라면 선한 일이란 하나님을 바라보는 모든 생각과 결단과 의지적 노력입니다. 이 시간 우리 내면이 거룩하신 예수의 영으로 인해 모두 선한 일에 불이 붙기 바랍니다. 과거와 거기 매였던 악한 것들을 다 태우고 용서하여 맑고 밝고 명랑한 가운데 기쁨이 넘치는 삶이 열릴지어다.
3. 평강의 하나님께서 반드시 승리하게 하십니다.
바울사도는 로마교회성도들이 순종하는 모습을 매우 기뻐합니다. 그리고 그 순종은 권세와 능력이 되어 사단을 속히 짓밟아 없애리라는 것을 믿음으로 선포합니다.
자동차 경기장에서는 가장 안전하고 빠르게 먼저 들어오는 사람이 우승자고 장기판에서는 장기 잘 두는 사람이 높임을 받습니다. 교회에서는 믿음과 겸양의 덕이 앞선 사람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사람들이 존경합니다. 믿음이 좋아 신앙과 언행이 일치되는 이들은 교회 안팎 어디서든 존경을 받게 됩니다. 그런 분들의 자존감은 매우 건강해서 모든 것이 예수님 때문에 자랑거리입니다. 예수님을 자랑하면서 명쾌하게 사시기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자신도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능력이 임하는 것을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는데 로마 교인들은 순종함으로 사단을 제압할 권세와 능력을 받는다는 것을 본문이 밝히고 있습니다.
“(막16:17)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입지 않으며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니라.” 다만 이런 표적은 순종과 겸손으로 거듭날 때 주어지는 능력이며 그것은 사람의 시간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증거 된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의 능력은 오직 영혼의 거룩함과 순결에서 비롯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거룩함을 흠모한다면 먼저 우리 안에 있는 세속의 모든 닻줄을 단호히 끊어내야만 합니다. 순결하려면 비록 작은 유혹과 죄악의 씨라도 일체 접근조차 못하게 하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이제 얼마든지 능력있고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이것이 자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사랑과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흘리신 보혈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려는 사람들과 가까이해서 그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시기 바랍니다. 선한 일에 예민하고 민첩하여 지혜로운 여러분이시기 바랍니다. 가까이 할 것과 멀리 할 것을 확실히 한다면 여러분은 반드시 주님의 이름으로 승리하고 기뻐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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