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01. 주일설교<행22:1-11. 바울이 만난 부활예수>
2020.03.01. 주일예배<행22:1-11. 바울이 만난 부활예수.>
[지성이란 자신의 지식, 지혜 등 내면의 모든 것을 가장 선하게 사용함으로 드러나는 총체적인격, 샤르뜨르를 후세는 세기의 지성, 실존주의 철학가, 시인으로 추앙하며 보봐르와 함께 계약결혼, 자유연애의 대명사로 기억돼 결국 성개방자유화를 부추겨 이혼과 고아원을 대폭 늘린 공로자가 됨.]
주님 부활 후 직접 찾아 주셔서 극적인 인생의 반전을 경험한 사람이 바울사도입니다. 부활직후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창 자욱 난 몸을 보여주셨지만 바울만큼 큰 변화의 삶을 산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몸으로 분명히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저는 오늘 이 설교 말씀 듣는 중에 사도바울이 만난 부활예수를 우리 모두 만나는 놀라운 역사가 있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전합니다.
부활예수를 만나기만 하면 여러분의 영혼과 심성과 육체는 분명 달라질 것입니다.
방금 읽은 성경에 의하면 청년바울은 흠 없는 정통 유대교의 촉망받는 청년이었으며 로마시민권이 있는 유대인에다 유명한 가말리엘교법사의 수석제자였습니다. 헬라철학과 학문에 능한 청년이며 특별히 유대교열성당원으로 신생 기독교의 잔재들을 추적해 남김없이 처단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는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최선이라고 믿고 있는 힘껏 그리스도인들을 붙잡아 넘겼습니다.
그래서 산헤드린공회의 체포영장을 갖고 다메섹을 향하던 중 그리스도의 일방적인 간섭으로 길바닥에 쓰러집니다. 오정쯤인데 어찌나 빛이 크고 밝았는지 청년 사울은 땅에 엎드려졌다고 했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분명히 귀에 들립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날 박해하느냐?” “주여. 뉘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주여 내가 무엇을 하리까?” “일어나 다메섹으로 가라. 정한바 내가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일러줄 것이다.”
그때 큰 빛으로 인하여 사울청년의 눈이 안보입니다.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에 들어갑니다. 여기까지 오늘 본문말씀입니다. 청년사울이 만난 부활예수그리스도 우리가 지금 만나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경이 증거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딤후3:16a)”사람의 생각이나 감동이 아닙니다.
기나긴 세월과 여러 사람들의 글이 일관되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는 것이 성경의 내용입니다. 그 성경이 궁극적으로 증거하는 결론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십니다.
보이는 게 기적 아닌 게 없지만 특히 성경은 놀라운 기적입니다. 요한복음 20:31절에서는 성경의 기록목적을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려고 기록된 하나님의 글이 그 독생자 예수께서 죽은 뒤 다시 살아났다고 밝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변증하는 게 아니라 선포되는 것입니다. 믿고 안 믿는 것은 선포자의 몫이 아닙니다. 철저히 받는 자의 몫입니다. 은혜의 단비가 지금 강단에서 쏟아지는데 그릇을 엎어놨다면 여기 칼뱅이나 마르틴 루터나 세계적인 부흥강사가 와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2.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 사건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최고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생명입니다. 살아있어야 다른 것을 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는 진실입니다. 생명이 있어야 모든 논의가 되는데 그 생명이 진실한 것이어야 합니다.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짓생명은 아무 가치도 없고 도리어 해를 끼칩니다.
그리고 진실한 것은 모두 선하고 아름답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진선미가 존재한다면 거기는 누구도 막을 수 없고 감당키 어려운 능력과 권세가 있습니다.
이미 선포됐듯이 진선미의 최고표상은 예수그리스도 한분이십니다. 그분의 부활은 아무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진실하고 선하며 아름다운 사랑으로 이뤄진 구원계획의 실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불의와 인간들의 악이 진리를 막고자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끝내 막을 수 없었습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셔서 진리는 영원하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진리는 영원합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했으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베드로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제자에게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있고 어떤 이는 떠났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고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팔삭동이 같은 내게도 보이셨노라.”고전 15:3-8절 바울사도의 증언입니다.
당시 그리스도의 부활현장의 목격자가 오백 명이 넘었다고 사도바울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9-11절까지 읽습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려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려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라 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할렐루야. 이보다 더 정확한 증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3. 바울의 예수체험, 저와 여러분의 체험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입니다. 몸과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험함으로 깊은 신앙가운데 들어가게 됩니다. 오늘 말씀 듣는 중에 바울의 믿음을 선망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사도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그는 오히려 여러분을 부러워할 것입니다. 우리만큼 평온한 가운데 좋은 환경에서 예수 믿고 천국영생을 보장받는 시대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최상의 번영과 풍성과 안정기가 부패라는 정점을 치고 있는 시대를 갑니다. 그래도 체험은 필요합니다.
오늘 이 말씀 잘 듣고 여러분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믿는다면 바울의 체험이 그대로 여러분의 것이 되는 줄 믿으시면 아멘입니다. 모든 믿음의 사건들을 우리가 직접 체험해야만 우리의 것이 된다면 성경에서 그 많은 사건과 인물들을 세세히 소개할 이유가 없습니다.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하나로 모든 것을 취할 수 있도록 성경에 적어 놓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예수님 만났습니까? 예수님과 어떤 인격적 교류의 경험이 있습니까?
언제 무슨 경험을 했냐는 게 아닙니다. 우리들은 늘 예수님을 만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고 설교 듣고 예물 드리는 예배의 모든 순서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편안한 시대에 편안하게 만나니까 실감이 덜 한 것입니다. 깊고도 깊은 묵상 중 말씀을 접하시기 간곡히 청합니다.
믿음의 세계는 참으로 오묘해서 어떻게 믿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많은 신앙의 격차를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한 마디는 얼마나 폭이 넓고 깊은 것인지 모릅니다.
“믿음은 능력이다.”라는 말은 정확합니다. 성경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어 들이는 순수한 믿음은 성경의 모든 사건들이 여러분에게 가까이 다가와 여러분으로 하여금 동감하는 체험과 믿음을 소유할 수 있도록 크게 도움을 줍니다.
부활에 대하여 바울은 고전15:19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기독교는 부활신앙이 그 핵을 이룹니다. 부활이 빠진다면 기독교만큼 비참하고 억울한 종교도 없을 겁니다. 우리의 신앙과 삶은 부활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성도의 평생은 땅이 아니라 하늘에 선한 행실과 희생하는 믿음을 저축, 적립하는 인생입니다. 억울합니까? 외롭고 아픕니까? 나만 아는 사건이 있었는데 그 일로 다른 이가 손해를 봤습니까? 칭찬받았습니까? 천국의 상이 그만큼 쌓이든 깎이든 천국의 생명책에 다 기록되어 적립되고 있음을 진실로진실로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부활신앙입니다. 죽음을 이기고 영원히 살아계신 그리스도예수의 사랑과 희생에 모든 가치와 소망을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성구 읽을 때 얼마나 감동이 오는지 영의 촉을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요일5:11-13] 11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2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13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요5:24]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믿고 그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은 죽은 뒤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크게 다행한 일인지 실감이 잘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래전 황당한 일을 기억합니다. 구로세무서에서 양도세 400만원 고지서가 날라 왔습니다. 여기저기 알아봐도 당시 문서로 받아놓은 증거가 없으면 어쩔 수 없이 내야한다고들 했습니다. 기도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중개사와 매도인의 마음을 주장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오히려 더 흥분해서 당시 세무사에게 압력을 넣고 세무사는 구로세무서에 이의제기로 탄원하여 취하가 됐습니다. 400만원 이 잠시 왔다갔는데도 충격과 기쁨이 교차합니다.
우리가 잠시 후 육신의 옷을 벗고 아버지 앞에 섰을 때 두 갈래 길, 심판인가? 영생부활인가는 너무나 중차대하고 너무나 가슴 벅찬 갈림길에 어느 쪽입니까? 누가 그렇다고 보장합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세상평생에 이같이 중요하고 큰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 두 갈래 길에 대해 말씀 한 구절만 더 듣고 정리합니다.
누가복음 16장에 그 유명한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한 부자와 거지가 등장합니다. 호화롭게 살아가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간신히 연명하던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가 살았을 때 헌데를 개가 와서 핥았다니 얼마나 비참한 삶이었나를 짐작하게 합니다. 그는 죽어 아브라함 품에 안깁니다. 부자도 죽었습니다. 부자는 죽어 지옥의 꺼지지 않는 불 가운데서 부르짖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적셔주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 너무 힘듭니다.”아브라함이 뭐라고 합니까? “얘, 너는 살았을 때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롬을 받느니라. 너희와 우리사이엔 큰 간격이 있어 서로 왕래를 못 한다”고통 중 물 한 모금조차 포기한 부자는 마지막 부탁을 하는데 세상에 아직 남아있는 다섯 형제에게 이 사실을 좀 알게 해서 죽은 뒤 여기에 오지 않게 해달라는 겁니다. 여기서 저와 여러분. 아브라함의 대답을 잘 듣고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으라.”그리고 “그들에게 듣지 않으면 비록 죽었다가 다시 그들에게 찾아가는 사람이 말을 해도 믿지 않는다.”고 합니다. 모세와 선지자의 글을 보라는 것입니다.
즉 성경과 강단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진리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죽어서 직접 천국과 지옥을 보고 살아온 사람이 말한다 해도 결코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믿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믿습니다. 죽었다 살아난 기적의 주인공의 말도 일부 참고하고 신뢰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먼저 성경을 믿는 믿음으로 그것을 보는 것이어야 합니다. 어떠한 간증도 성경의 원리를 벗어난 것이라면 경계해야 합니다.
여러분. 바울이 만난 부활예수를 여러분도 언제든지 만날 수 있음을 오늘 알았습니다. 그리고 믿습니다. 이미 히브리서에서 들은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에 관해서도 들었습니다. 그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이제는 우리와 함께 하셔서 언젠가 두 갈래 길에서 우리로 하여금 감격과 놀라움을 주실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일생일대의 최고최대최상의 사건이라는 것도 우린 이제 알았습니다.
그 어떠한 세상, 눈에 뵈는 것들도 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믿음을 방해하지 못하게 믿음의 달음박질을 열심히 하며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이 놀라운 사실이 언제나 저와 여러분의 가장 큰 감동이 되기 바랍니다. 다른 감동이 그것에 앞서서 행여 우상숭배가 되지 않기를 거듭 일러드립니다. 믿음으로 부활예수 날마다 만나심으로 부활예수의 사랑과 능력이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 일터에 넘치시기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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