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16. 주일설교<창24:61-67. 그 날을 향한 설렘>
[2020.02.13.목요. 세상을 살며 수많은 난제 앞에 끊임없는 선택을 강요받고 그 선택에 따른 엄중한 책임을 지게 된다. 교회와 성도는 이 선택의 문제에 특혜를 받은 무리들이다. 선택의 기준이 너무 선명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거룩한 경전, 성경이 모든 판단과 선택의 기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성도라면 우물쭈물할 아무 이유가 없다. 아직도 갈등하고 있다면 이는 그가 아직 자신의 잣대를 버리고 성경에 순종할 준비가 덜 됐다는 것을 말한다.
사회주의,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 계획(기획)경제와 시장경제, 우파와 좌파, 반중친미와 반미친중, 종북주의와 반공사상의 대결구도 앞에 아직도 머뭇거린다면 그는 아직 성전 뜰에서 지성소를 기웃거리는 자일 것이다. 지성소엔 제물의 피냄새가 진동한다. 어린 양의 피에 젖어 본 성도는 간명하게 오른 쪽을 택한다. 놀랍게도 좌파목사와 좌파기독교인이란 단어가 등장한 것은 교회가 그간 너무 풍족한 안일함에 젖어 세상을 향한 주님의 간곡한 소원과 멀어졌다는 반증이다. 배불러 나태한 신앙, 게슴치레한 눈으로는 천국이 선명하지 않다. 소리쳐야 할 때 소리치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친다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찬물을 끼얹어 정신이 번쩍드는 계기는 그렇게 게으른 교회가 자초하는 것이다. 성경의 역사서가 그것을 귀 아프게 들려주고 있지 않은가?]
오늘 본문은 아내가 될 처녀 리브가를 초조와 설렘으로 기다리는 이삭의 모습, 그리고 드디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만나는 장면으로 마칩니다.
이 말씀 듣는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가슴 뛰며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이 있길 축원합니다.
63절 : 신부감을 구하러 간 노종이 낙타 떼를 이끌고 돌아오는 것을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이삭은 해 저물 때 들에 나가 묵상하는 게 어느새 버릇이 됐습니다. 묵상이란 말에 쓰인 <수아흐>는 상념 또는 슬픔에 잠기다. 기도하다 등의 뜻이 있습니다. 어머니 사라가 죽은 후 슬퍼하며 허탈감에 빠져있던 이삭은 저녁이면 들녘에 나와 어머니를 생각하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는 버릇이 있었는데 이젠 곧 나타날 신부감을 상상해보며 매우 긴장된 마음과 설렘으로 이 저녁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보통 망자를 위하여 3개월을 애도하던 당시의 풍습과는 다르게 3년이나 돌아간 어머니를 애도한 이삭은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아들이었습니다. 이제 그렇게 나이40 이삭에게는 그 마음의 의지가 어머니로부터 새로 맞을 아내에게 옮겨가는 그야말로 가슴 뛰는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늘 사모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디 있습니까?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새 하늘과 새 땅. 거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삶이 있습니다. 상상도 못했던 여러 가지가 우릴 기다리고 있는 곳, 어제까지 나를 억압하던 모든 것에서 풀려나 참자유가 있는 거기서 저와 여러분, 영원히 살게 된다는 사실을 얼마나 절감하고 있습니까? 어제까지 즐기고 나누던 것들과 힘들게 했던 것들이 이젠 나와 전혀 무관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어머니를 떠나 아내에게로 옮겨가는 이삭의 저녁들판은 슬픔이 변하여 기대와 꿈으로 부풀기 시작합니다. 청년 이삭의 흥분되는 이 사건과 비교조차 안 되는 그날 그 나라를 생각하며 말씀을 듣습니다.
이삭은 복 받은 인생입니다. 그러나 그 복이 어느 날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모리아 산에서 아버지의 느닷없는 번제용 칼 앞에 순종의 머리를 내밀었던 그 엄청난 믿음. 그 믿음의 결과였습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과 제가 이렇게 슬픔의 시간이 변하여 설렘으로 가득한 기다림의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또 그렇게 전적인 인생역전의 드라마를 위해 이삭처럼 주님께 생명이라도 드릴만한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 축복합니다.
말씀 들을 때 우리도 이삭처럼 어미를 잃은 슬픔의 저녁들판이 이제는 아리따운 처녀를 기다리는 설렘의 저녁들판이 되길 바랍니다. ‘눈을 들어 보매 낙타들이 오는지라.’ 할렐루야.
64절 : 상대의 얼굴, 성품. 그 아무 것도 모르는 가운데 오직 하나님의 선처만을 기대하기는 이삭이나 리브라나 매한가지입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조심스런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혹 리브가의 외모와 성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이삭이 보잘것없는 인간이어도 어쩔 수 없는 리브가의 정해진 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힘없는 인생길을 보게 됩니다. 그저 고요히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역사 앞에 서있는 인생들의 참모습이라고 봅니다. 우리 인생이 사실 알고 보면 이렇게 알 수 없는 길 앞에서 눈을 내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렇게 처분만 기다리다가 하나님의 때가 되면 “눈을 들어 보매 낙타들이 오는지라.” 말씀이 이뤄질 줄 믿습니다.
67절 : 아브라함은 이미 거부가 돼 있습니다. 부잣집마나님 사라 생전 시 아무나 들어오지 못한 거기 리브가는 신랑의 손을 잡고 실질적 안주인이 되기 위하여 사라의 장막에 안내됩니다.
우리도 이렇게 신랑예수님 손을 잡고 하나님의 모든 풍요가운데 다다를 줄 믿습니다. 예수님이 손을 잡는데 자꾸 뿌리치는 우리들의 영적무지 때문에 하늘의 곳간열쇠를 받지 못하는 이가 없기 바랍니다. 누구 손을 잡고 어디로 인도되느냐는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신랑 이삭의 손에 이끌려 어미 사라의 장막에 들어 간 리브가는 크게 행복했습니다. 이삭은 난생 처음 아내와의 사랑으로 딴 세상을 만났습니다. 시집가기 참 어려웠던 시대, 거부가문의 종을 따라 시집가는 길, 시어머니 없는 부잣집맏며느리, 믿음 깊은 가풍과 유산도 유신이지만 착하다고 소문난 신랑감, 예쁜 아내를 만나 가슴 뛰는 이삭, 머지않아 다가올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가는 길입니다.
주님이 사랑하시는 성도여러분.
인생 나그네 길은 혼자 가는 길이 아닙니다.
인생의 성패의 갈림길을 본문은 다음의 몇 가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1) 어떻게 준비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① 노종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은 성실로 평생을 준비된 사람으로 복된 가정의 집사역할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귀한 삶을 살았습니다.
② 이삭은 모리아 산에서 생명을 드리는 순종으로 준비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③ 리브가는 양질의 신앙교육으로 준비되어 매사에 명쾌히 반응할 준비가 된 처녀였습니다.
2) 누구를 만나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① 노종은 믿음의 주인 아브라함을 만났고 그의 명령에 순복한 삶을 살아 본문에서처럼 이삭의 신부감을 순탄하게 만나 임무를 잘 수행합니다. 종의 기쁨은 주인의 일이 잘 풀려가는 것입니다.
② 이삭은 좋은 믿음의 부모를 만나 생명을 드리는 신앙으로 준비되어 어여쁜 신부를 만나 복된 가정을 시작합니다.
③ 리브가는 순종의 표본, 귀한 청년 이삭을 만나 신앙 좋고 살림 풍족한 부잣집 며느리가 됩니다.
3) 누구의 손에 어디로 인도되느냐는 것입니다.
① 노종이 하나님의 손에 인도되어 나홀의 집에 인도된 것처럼
② 이삭은 충직한 믿음의 아비 손에 멋모르고 이끌려서 모리아 산으로 갔습니다. 죽음의 길에서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아버지를 신뢰했습니다. 아버지 손에 인도된 곳은 죽음의 산이 아니라 복 받는 순종의 산이었습니다.
③ 새로 만난 신랑 손에 이끌려 들어간 곳은 어마어마한 부잣집마나님거실과 곳간이었습니다. 거기엔 아브라함과 사라의 손때와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습니다.
365일 24시간 한순간도 우리의 손을 놓지 않고 어디든지 함께 하시는 주님 체온을 느끼기 바랍니다. 우리가 잠든 그 시간에도 주님은 우리 곁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우리 손을 잡고 이끄시는 신랑예수님을 따라서 생명의 법인 진리말씀으로 무장해 영원한 길, 복된 길, 새로 태어나는 복음의 길로 바짝 다가서기 바랍니다. 성삼위 하나님께서 이 시간 그 손을 내밀어 여러분을 기다리십니다.
이삭의 손에 이끌려 들어간 사라의 거실과 곳간은 부잣집 맏며느리의 복된 처소였습니다.
우리가 갈 곳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잠시 전 들은 지난 설교를 발췌해 봅니다.
[우리가 인도될 새 예루살렘은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성은 하나님의 영광과 함께 각종 보석과 벽옥과 수정처럼 맑게 빛나고 있습니다. 높은 성곽과 열두 지파의 이름이 적혀있는 열두 문이 있고 모든 건축물의 자재는 보석으로 돼 있습니다. 열두 문은 진주로 돼있고 길은 맑은 수정같은 정금이요, 성안에는 성전이 없는데 그건 전능하신 하나님과 그 아들 어린양 예수께서 친히 성전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성은 해나 달이 필요 없이 하나님의 영광이 빛이 되고 어린 양이 등불이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장면입니까? 밤이 없습니다. 죄악이 없습니다. 악한 무리들이 일체 못 들어옵니다. 인생이 고달픈 이유가운데 하나는 싫은 사람 계속 만나야 하는 일인데 거기 그런 사람 없습니다. 다 변화되었기 때문인데 내가 먼저 변화되었다는 것이 뭣보다 기쁜 일입니다. 거짓말하는 자가 들어오지 못하니 사기당할 일도 없습니다. 입장 곤란한 보증서기도 없습니다.
아끼며 인색할 이유도 없고 낭비할 것도 없습니다. 지금 우리의 고민 거긴 없습니다. 할렐루야.
병원 없고 못난 사람 없고 심술부리는 사람 없습니다. 다 반갑고 즐겁고 신나는 곳입니다. 인생이 고단합니까? 여러분. 너무 서러워 마세요. 우리함께 거기 하나님이 다스리는 밝은 기쁨의 나라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천국행열차 달리는 소리가 들립니까? 오른 손을 심장 위에 얹으면 그 소리가 분명히 들립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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