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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20.02.02. 주일예배<히7:26-28. 제사장의 길, 참 헌신의 길>

by 설렘심목 2020. 2. 2.

2020.02.02. 주일예배<7:26-28. 제사장의 길, 참 헌신의 길>

[로드마스터란 직업은 배나 비행기의 짐이 한쪽으로 쏠리지 않게 무게중심을 정확히 하는 직업, 우리 심령에 무게중심은 감정으로 인해 종종 무너져 속이 뒤집힌다. 우리의 로드마스터는 오직 예수]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신비한 이 표현 속에서 우린 예수님의 존재를 엿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곧 예수님과 닮았다는 것은 혈통과 조상의 계보가 생략됐다는 점에서 예수그리스도와 멜기세덱의 그것과 같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육신의 조상, 시작과 끝이 없는 영원한 생명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외 어디서도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습니다. 멜기세덱이 그랬는데 그는 의의 왕, 샬렘왕이라고 했습니다. 족보, 시작과 끝, 영생의 비밀을 알 수 없는 존재요, 아브라함에게 십일조를 받고 그를 축복했다면 이는 예사인물이 아닙니다. 이러한 멜기세덱을 보려면 우리에게는 상당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 아니고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의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는 그가 오늘 날 예루살렘이라고 추정되는 샬렘의 왕이요, 평강과 의의 왕인 것,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닮은 제사장으로서 분명히 존재했던 실존인물이었던 것만은 성경의 증거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본 히브리서와 창세기4:18절 외에 멜기세덱에 대한 더 이상 어떤 정보도 성경엔 없습니다.

아무 설명이 없이 언약의 사람 아브람을 축복했다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명령으로 레위인에게 백성들이 바치는 헌물인데 제사장이 아닌 레위인은 자기십일조를 제사장에게 바치게 됩니다. 그런데 족보 없는 멜기세덱이 레위인의 조상인 아브람에게 십일조를 받았다함은 레위지파보다 월등한 영적지위였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람을 축복 했으니 7절 말씀처럼 이 멜기세덱의 신분은 대단하다는 것이 5절부터 10절까지의 말씀내용입니다.

멜기세덱은 그에 대한 아무 언급이 없이 다만 아브람에게 십일조를 받고 축복했다는 것만으로도 사실상의 모든 설명은 충분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멜기세덱이 창세기 그 현장에서 잠시 모습을 드러낸 이유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예표적 인물로서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멜기세덱의 탁월한 영적 삶의 거룩함은 그의 육신적 자세한 소개가 오히려 무색해진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0장은 노아홍수 심판이후에 지상에 퍼져가는 인류의 족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르박삿-셀라-에벨-벨렉-르우-스룩-나홀-데라-아브람에 이르기 직전까지 한사람도 하나님 앞에 단을 쌓은 사람이 없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것은 111절에서 9절까지 등장하는 바벨탑사건이 그 배경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당시 언어가 하나이니 얼마나 편리했겠습니까? 많은 발전을 이뤄 안 그래도 하나님을 멀리하던 인생들이 본격적으로 높은 탑을 쌓아 큰 범죄를 합니다. 그러나 교만한 인생들이 하늘 꼭대기를 향해 바벨탑을 올릴 때 아브람은 나지막한 제단을 쌓고 엎드렸습니다. 이렇게 아브람이 단을 여러 번 쌓은 뒤 하나님의 사람이 등장하는데 유일하게 멜기세덱입니다.

특별한 믿음, 특별한 지위, 특별한 영적권위를 갖고 있던 사람입니다.

이 멜기세덱이 그리스도를 예시한 인물이란 점에서 우리는 오늘 역사적 두 실존인물이 주는 교훈과 소망은 무엇인가 알기 원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왕같은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먼저 왕같은 제사장의 길, 곧 참 헌신의 길을 가며 주님과 동행하는 성공적인 삶에 있어서 성경이 밝히는 중요한 원리, 즉 복된 제사장의 길은,

 

1. 사람의 족보나 출신이 아니라 헌신입니다.

세상의 법과 믿음의 법은 상충 되는 바 매우 큽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고 꿩 잡는 게 매라는 세상은 수단이야 어떻든 목적을 이루는 게 승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선 목적보다 자세가 중요합니다. 비록 결과는 미약해도 온힘을 다하고 눈물로 기도한 사람이 승리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진정한 정의가 있습니까? 진정한 안전보장과 평화가 있습니까? 오직 예수그리스도 안에서만 모든 것이 가능하고 확정됩니다.

 

여러분. 밝혔듯이 성경이 멜기세덱의 족보나 영적계보를 밝히지 않는 이유는 멜기세덱의 그 계보에 의미를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경제, 학력, 외모, 건강, 자격증, 이런 것들이 우리들의 삶을 편리하게는 할 것입니다.

그러나 눈에 뵈는 그러한 것으로 믿음을 결정하지 못합니다. 육신의 조건들이 기름지면 오히려 함정이 되는 것을 종종 봅니다. 자기만족은 교만으로 이어지는 징검다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멜기세덱의 혈통이나 족보가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듯이 하늘나라에서 우리들 육신의 여러 외모는 (얼굴.재산.학력.재주.명예.지능 등으로 인한 열등감, 우월감) 한 구절도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피흘려 수고했을지라도 그 일에 우리 자신의 이름을 위한 흔적이 있다면 그것 역시 지워질 것입니다. 우리의 이름 석 자는 참으로 무상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성도와 교회는 이름보다 삶을 사랑으로 드리는 헌신공동체가 돼야 합니다. 말씀대로 살고자 애를 쓰며 하나님의 말씀에 모든 것을 의탁하며 기도하여 신구약성경을 통해 언약하신 그것들을 우리들의 성결한 삶이 증거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름이나 외모보다는 헌신의 삶이 성공적인 성도의 삶이라고 정리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로 헌신의 바른 원리는 어디서 찾습니까?

 

2. 우리를 위해 단번에 자신을 드리신 주님입니다. 여기서 핵심낱말은 드린다는 뜻의 헌신입니다.

27절에서 대제사장들은 자신들과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를 드렸으나 영원한 제사장이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단번에 드리셨다고 합니다. 날마다 드린 제사는 짐승의 피로 드렸지만 단번에 드리신 어린 양 예수는 자기 몸을 드렸습니다. 십자가에서 고귀한 물과 피를 다 쏟아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제물이 되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헌신의 모본은 그리스도십니다. 죽기까지 드리기를 작정하면 반드시 다시 사는 것이 십자가의 원리이며 도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갖는 핵심질문은 정녕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설령 주를 위하여 실제로 죽더라도 기뻐할 각오가 돼 있다면 그는 죽어도 감사요, 살아도 감사입니다. 죽으면 천국영원복락이요, 살면 만나야 할 동지들과 해야 할 귀한 일들로 인해 감사입니다. 이래도 감사, 저래도 감사일 때 비로소 하나님의 손에서 합격의 깃발이 휘날립니다. 그 깃발은 바로 우리의 기도응답이 이뤄졌다는 신호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보세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고 칼을 높이 쳐든 바로 그 순간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마라.”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고 참 헌신은 그렇게 죽기까지 완전히 드린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리신 겁니다.

어설프게 죽으니까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것을 주님이 안타까워하십니다. 설죽으니 소설을 쓰고 그 소설 안에 갇혀 혼자 괴롭고 분노하니 풀리질 않습니다. 옹색한 인생 자신의 작품이었음을 저는 돌이킵니다. 상대방은 아무 일 없듯 평온한데 밤새 괴로웠던 날이 얼마나 많았던지? 亡子無言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우리 진정으로 품위있고 개선된 영적 삶을 살고 소유하고 싶습니까? 죽어버립시다. 대충 죽지 말고 똑 소리 나게 부러져야 합니다. 부러지지 않은 꼿꼿한 목으로 할 말 못 할말 다 했던 날을 주님 앞에 회개합니다. 당시 누가 이런 설교를 내게 했더라면 오늘 이렇게 부끄럽진 않았을 거란 생각을 합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먼저 찾으세요. 그게 복의 시작입니다.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서 정말 싫은 내 인생이라고 절규해도 그 때 그래도 나는 내 구원의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 참 기쁘고 기쁘다. 몸과 마음은 말을 잘 안 들어도 영은 새로워져 강제할 능력을 얻어 우겨대며 외치는 것 이게 헌신입니다.(3:17-18) 거기까지 가시기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분명히 선포하건대 여러분의 믿음과 거기 따른 믿음인격과 성향과 기질이 십자가 앞에서 죽어 못 박히면 여러분이 뭘 원하시든지 다 들어 주십니다. 뭘 원하십니까? 과거로부터의 단절입니까? 자녀가 받을 복입니까? 못된 성품? 직장불안? 아픈 몸? 가난? 주님과 통하면 다 허락하십니다.

 

여러분 잘 들으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렇게도 간절히 원하시는 것들, 곧 고쳐져야 할 것들, 채워져야 할 것들, 일으켜 세워야 할 것들, 반드시 무너져야 할 것들, 그것이 무엇이더라도 그것은 여러분이 원하시기 전에 먼저 주님이 더 원하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께선 진작부터 여러분보다 더 원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그런데 왜 전지전능의 하나님이 내 몸과 마음과 믿음하나 바꿔주시지 못하시고 뭐하시냐고 질문합니다. 창조주 위대하신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바보자녀를 둔 적이 없습니다. 밖에서 두드리는데 문조차 열 줄 모르는 바보로 우리를 방치하시지 않는 줄 믿으시기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죽는 일은 저와 여러분의 몫이고 살리시는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질문합니다. 죽는 일이 힘듭니까? 사는 일이 힘듭니까? 사는 일이지요. 하나 더 합니다. 사는 일이 힘 듭니까? 살리는 일이 힘 듭니까? 살리는 일이 힘들지요. 살리는 일은 내가 죽어야 하니 아무도 하지 못하고 오직 외아들을 죽이신 하나님만이 하십니다. 그 하나님 심부름하는 목사님들 그래서 종종 죽을 맛인 줄 아십니까? 애급의 술객들이 모세를 따라 다 했지만 회복하고 살리는 일은 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들보다 먼저 더 원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들의 변화를 기다리십니다. 두 손에는 많은 선물을 잔뜩 쥐신 채 우리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잘 싸워 이기기를 지켜보며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제 끝으로 한 말씀 전하고 마무리합니다. 자신과의 싸움에 지쳤습니까? 기도하다가 쓰러지겠다는 결단으로 영적전투를 하시기 바랍니다. 싸우기 힘들면 기도하고 기도하기에 지쳤을 때 쳐서 복종시키는 일에 생사를 걸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만 가지 소원이 모두 해결 받을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