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29. 주일설교 <출 5:1-9. 바로왕의 불행>
[카톡대문 “젊음은 선물이지만 노년은 작품-인생은 80부터” 공평하게 받은 선물이 작품으로 이어지길]
[모태에서 나왔다고 사람이 아니라 무엇을 보고 배우며 어떤 모습으로 만들어져 가는가에 따라 짐승도 될 수 있고, 사람도 될 수 있다.]
파라오 앞에 모세와 아론이 섰습니다. 하나님의 지팡이가 손에 들려 있었지만 바로 왕에겐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내 백성을 보내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키도록 하라”는 여호와의 명령전달은 바로 왕을 설득하지 못합니다. 2절에서 그 이유가 밝혀집니다.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냐?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이 후 파라오는 자신의 말대로 그가 깨닫지 못한 여호와하나님 때문에 많은 대가를 치름으로 깨닫게 됩니다. 열 가지 재앙 마지막에는 사랑하는 아들까지 잃은 다음에야 하나님이 두려워 모세와 그 백성들을 놓아줍니다.
오늘 날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해서 평생 불행하게 지내고 결국 지옥으로 영원히 던져지는 안타까운 인생들이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습니다. 불행이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겠다는 잘못된 신념이 불행의 실체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자기 몫을 자기에게 달라고 한 작은 아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富者 아버지 곁을 떠나가서 제멋대로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옵니다. 그는 울며 회개하고 밤낮 문을 열어 논 채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 곁으로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합니다. 우리하나님의 본심을 말씀한 대목입니다.
사랑하는 어린 아들이 불치병으로 죽어가는 것을 보며 그 순간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저주스러워 아빠는 부르짖습니다. “함정이다. 인생은 함정이야.”
사람에게 하나님이 함정을 주셨을까? 진정한 함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안 뵈는 겁니다. 하나님 없이도 넉넉히 살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것은 무서운 함정입니다. 평생 부귀영화 속에 잘 살다가 죽을 때도 고생하지 않고 편안히 죽는 함정, 여러분. 그들은 육신이 썩기도 전에 영혼의 눈으로 또렷하게 천국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옥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이를 갈며 울 것입니다.
이집트 파라오는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냐고 완강히 버티다가 많은 손실을 입고 끝내 아들까지 잃어버립니다. 오늘 설교제목은 여호와를 알지 못해 불행한 바로 왕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당하는 인류의 불행에 대하여 말씀을 듣습니다. 바로의 불행은 먼저,
1. 택함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깨닫는 것은 사람의 학문에서 오는 지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道는 결코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따른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절대계시 의존적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밖에서 누군가 열어주지 않으면 열리지 않는 믿음의 도가 바로 복음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요체는 십자가에서 죄를 청산하신 대속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통치입니다.
세상에는 파라오처럼 택함 받지 못한 자들이 제법 됩니다. 그리고 택함 받고도 속히 순종하지 않아 여러 과정을 거쳐 하나님께 나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여기서 과정은 주로 고난을 말합니다.
두 번째 바로의 불행은, 2. 여호와를 알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2절에서는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냐”고 합니다. 여호와를 모르니 그 말도 듣지 않겠다는 겁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면 반드시 신실하신 약속의 하나님께서 복주시고 복주시마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순종으로 복된 삶을 살려 면 순종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먼저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음성을 들으려면 그분을 만나 그 분 앞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 음성을 들으면 모든 것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분을 만나면 왜 순종해야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 권세가 우리 영을 짓누를 때 그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비로소 알게 됩니다. 순종이 자원하는 기쁨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평생 주 앞에 찬양을 멈출 수 없습니다.
“여호와가 누구관대”라는 바로의 말속에는 다분히 히브리인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가득합니다. 네까짓 것 노예들에게 신이라고 있어봤자 거 별 거 있겠냐는 것입니다.
애급 왕들은 자기 이름 앞에 파라오라는 이름을 붙여서 태양신의 아들로 높임을 받았습니다. 그보다 더 큰 신은 없으며 자신들은 그 높으신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교만한 우상숭배자들이었습니다.
교만은 사람의 눈을 어둡게 합니다. 마땅히 봐야 할 것을 못 보게 합니다.
어떤 길이 사는 길인지 어떤 길이 죽는 길인지를 모르고 사람보기에 좋은 대로 택하고 길을 갑니다. 바로왕은 자신의 이러한 교만이 잠시 후에 귀한 자기 아들을 죽이는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는 바른 답을 찾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해 답을 모르는 바로 왕,
바로왕은 하나님과 그 백성들을 철저히 무시하여 그 말을 업신여길뿐더러 도리어 일을 더 고되게 시키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허튼소리 못하게 더 바짝 조이라는 겁니다.
바로의 불행 세 번째는, 하나님을 모르기에,
3. 하나님 여호와를 훼방하는 바로 왕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것은 하나님을 괴롭히며 공격하는 일이 됩니다.
사도행전 9장과 22장에서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바울에게 말씀하기를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셨는데 당시 사울은 최선을 다해 예수믿는 이들을 잡아 옥에 가두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교회를 핍박함이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대적들은 항상 하나님과 그 백성, 그리고 백성과 백성사이를 갈라놓고자 합니다. 이간질하고 부풀려 말하게 하고 시기질투 나게 하여 이 사이 저 사이를 갈라놓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예배인 여러분. 애급 바로왕은 하나님께 택함 받지 못하고 여호와를 알지도 만나지도 못해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과 총회를 핍박했습니다. 사단의 도구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살피지 못하여 자신도 모르게 불행한 도구가 되는 사람이 주변이나 가문 가운데 없기 바랍니다. 그래서 기도로 깨어있는 일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세상문물과 죄의 달콤한 유혹에 붙잡혀 세속의 노예로 포로 된 인생들은 현대판 애급노예들입니다. 애급의 노예가 된 이스라엘백성을 끝까지 붙잡고 놓지 않았던 이집트의 파라오. 애급에 바로 왕이 있었듯이 오늘 날 세상문화라는 이름으로 마귀가 쉬지 않고 틈을 엿보고 있습니다. 사단은 얼마나 교묘합니까? 직접 나타나지 않고 여러 모습으로 위장하는데 탁월합니다.
여기서 가장 힘든 것이 자신 안에 있는 어리석음입니다. 이것은 각양 윤리와 도덕과 예절과 훌륭한 매너와 친절한 미소로 포장돼 있습니다. 인격과 믿음은 전혀 별개로 활동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혼동합니다. 이렇게 인격으로 무장된 죄성과 어리석음도 기도 앞에 맥을 못 춥니다. 기도가 계속되고 있는 한 죄의 뿌리들은 흔들립니다. 자꾸 뽑혀 나갑니다. 그러나 기도가 멈추면 이 죄와 어리석음이 고개를 들기 시작합니다. 기도가 게을러지면 벌써 얼굴이 달라집니다. 밝은 미소가 사라지기 시작하고 부정적인 생각이 올라옵니다. 다 성가싫고 부질없어 보입니다. 먼저는 영적인 활동들, 교회가고 찬송하고 성경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는 이런 일들이 매우 거추장스럽게 느껴집니다.
사단은 기도하기에 게으른 사람을 찾아와서 여러 가지 유혹의 미끼를 던집니다. 기도가 멈춘 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유혹을 받고 거기 취해서 추한 모습으로 변하게 됩니다.
바로왕은 하나님의 택함과 깨닫게 하심을 받지 못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데 악역의 들러리로 쓰인 불행한 자였습니다. 세계사란 무엇입니까? 기독교 구원역사의 무대가 되는 역사로서 그 존재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언제나 무대보다 중요한 것이 주인공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들을 키우시고 인도하심에 있어서 실로 많은 배경과 무대와 조연들을 사용하십니다. 안타까운 일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제공한 무대와 배경을 세상은 하나님처럼 숭배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애급은 번영에 번영을 거듭하는 최강국이었습니다. 반면 이스라엘은 430년이가 계속된 힘없는 노예민족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세요. 이스라엘을 키우시기 위해 베풀어 두신 무대가 애급이라는 거대한 인큐베이터였다는 사실입니다. 거기서 먹고 자라서 하나님을 경배하러 지금 광야 길에 오르려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파라오 즉 세상은 하나님의 구원무대에서 자신의 배역에 여전히 충실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 마음먹고 행동할 것입니다. 태양신의 아들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화려한 조명발 아래 현란한 사이키델릭에 취해 환락의 밤을 지새며 마음껏 지옥의 전주곡을 누릴 것입니다. 세상의 풍요와 환상적인 공연이 부럽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비전인 여러분. 모둔 문제의 답은 하나님과 여러분 개인 일대일에 있습니다.
여러분 한 영혼을 위해 우리 주님께선 많은 것을 주저함 없이 희생시켜서라도 구원열차에 태우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천국백성으로서 갖출 것을 갖추게 하시고 감당할 것을 감당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끝내 세상을 통해, 육체룰 통해 여러분을 격려하실 것입니다.
“오. 저분을 뵈니 참으로 예수님이 살아계신 게 분명하구나.”
“사람이 저렇게도 변할 수 있구나..역시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셔..” 할렐루야.
1924년 제8회 파리올림픽에서 신앙의 참 모습을 보여 주었던 실화, (불의 전차)
이 영화의 주인공인 에릭 리델은 중국 선교사이며 단거리 경주 선수였는데, 올림픽에 나가 '주님의 이름으로 달리기' 위하여 수년간 피나는 노력을 한다. 그의 주종목은 100m였는데, 그가 출전한 종목의 경기가 하필이면 주일로 배정된다.
이에 에릭 리델은 주일에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하며, 주일에 치르는 경기에는 신앙양심상 출전할 수 없다고 하여 경기를 포기한다. 이에 많은 언론과 사람들은 그를 비난한다.
그는 자신의 주종목인 100m를 포기하는 대신, 다른 날 열린 400m 경주에 다른 선수의 사정으로 대신 출전하게 된다. 이는 승산이 없는 일이었다. 결승선에 선 그에게 전해준 안마사의 쪽지엔 이렇게 적혀있었다. 구약삼상2:30 이렇게 적혀있다네. “그분은 자신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긴다.” 그가 달리는 모습을 본 코치들은 위험하다고 소리쳤다. 400을 100의 속도로 뛰다니.. 심장마비가 염려되는 상황, 그럼에도 그는 낯선 종목인 400m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금메달을 목에 건다. 그는 말한다. "내가 달릴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심을 느껴! 200은 내가 뒤 200은 하나님 주신 힘으로"
그는 올림픽 우승으로 일약 대스타가 된다. 그러나 유명세를 멀리하고, 선교사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하나님과의 약속을 따라 선교 현장으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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