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15. 주일설교 <빌 1:3-6. 중단 없는 구원운동>
[목민심서의 다산 정약용은 천연두 마마치료에 많은 공을 세웠는데 막상 그는 아홉 중 여섯을 잃는 아픔을 겼었다. 유난히 아빠 곁을 밝혔던 네 살 박이 여섯째는 죽기 전 엄마에게 한 말은 “엄마, 아빠가 돌아오셨더라도 마마가 돋았을까? 아빠가 내 옆에 계셨어도 고름이 맺혔을까?”
[어린 날 처절한 상실과 목마름의 야윔이 없었다면 오늘 내가 이렇게 우거지 국에 밥 한 공기로 먹을 때마다 감동하며 감사할 수 있을까?
외갓집 뒷간이 무너지기 전 왜 거기 방을 한 칸 들일 생각을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절절했던 젊은 날, 그 날이 없었다면 오늘 내가 이리도 춥고 더운 조립식 초라한 집이 내겐 최고의 궁궐이라고 힘주어 말할 수 있을까?]
오늘 본문이 있는 빌립보서는 옥에 갇힌 채 빌립보 성도들을 향한 바울사도의 애틋한 서신입니다. 구구절절 그리스도 안에서 느낄 수 있는 사랑이 묻어나옵니다.
바울사도의 삶에 있어 특징 하나는 그의 온전한 헌신은 그로 하여금 함축된 삶을 살아가게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하루는 보통사람의 한 달만큼이나 값지고 탁월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사람들이 가만 놔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평생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시달리며 살았습니다. 복된 사람입니다. 교회가 아니면 로마당국에서 그를 찾았고 좀 잠잠하면 산헤드린 공회에서 그를 찾았습니다. 주로 괴로운 이유로 그는 바빴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 결코 남들의 눈에 비친 모습과는 달리 매우 기뻐하며 감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설명하는데 8절에서 한마디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성도들은 감사의 제목이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마다 기쁨으로 간구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도들이 복음을 떠나지 않고 교회라는 조직 안에서 교제하기 때문이었다고 밝힙니다. 끝의 6절은 그리스도예수의 영이 끝날까지 선한 역사를 멈추지 않는다는 확신을 비추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해 바울의 이해하기 쉽지 않은 감사와 기쁨의 실체를 살피려 합니다.
1. 바울의 기쁨은 복음 안에서 성도들이 교제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성령께 온전히 사로잡힌 하나님의 사도였습니다. 그는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 특별히 주께 붙잡힌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그의 기쁨은 곧 우리주님의 기쁨과 다를 것이 없는 기쁨입니다. 그 기쁨이 다름 아닌 복음 안에서 성도들이 기뻐하는 것이었다면 주님의 기쁨은 언제나 우리 성도들의 교회 중심적 삶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삶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바울처럼 옥에 가고 매를 맞아야하는 헌신이 아닙니다. 조금만 노력하면 믿기 쉬운 때입니다. 너무 쉽고 편하니까 뜨거운 믿음이 일어나지 않는 평화롭고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익숙하고 오랜 평화의 세월은 우리를 영적 위기가운데로 몰아넣게 됩니다. 하나님이 없어도 괜찮다고 느껴질 만큼 풍부하고 편안한 시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입니다.
진정 하나님께 보호받는 삶이란 하나님의 통치를 떠나지 않고 늘 하나님근처에서 맴도는 삶을 말합니다. 아이가 엄마 치맛자락을 잡고 놓지 못하듯이 하나님 손을 잡고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미 일러드렸듯이 우리 모두 교회보다 더 가고 싶은 곳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혹시 바쁘다면 그것이 결국 예수님을 열심히 잘 믿기 위한 활동이어야 할 줄 압니다. 왜 열심히 출근하고 일합니까? 왜 열심히 운동해서 건강해야 합니까? 왜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어 용서하고 품어야 합니까? 왜 잊어야 하고 왜 품고 기도해 줘야 합니까? 예수 바로 잘 믿기 위해서입니다.
교회중심적인 사람이 되십시다. 교회중심은 예수중심이며 예수중심은 성경중심 하나님중심입니다.
2. 바울은 기뻐함으로 기도했습니다.
사람이 살며 늘 기쁠 수만은 없습니다. 오히려 나쁜 일과 괴로운 일이 더 많습니다. 바울사도는 비록 힘든 소식이 있을지라도 기도하는 가운데 기쁨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여러분과 저의 기도가 진정 주께서 감당하시고 받아주시는 기도라면 기도 끝에 분명 그 기도를 귀 기울여 듣고 계시는 하나님을 느낄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기도는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믿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특권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누리는 최고의 특권입니다. 기도는 이미 하나님께서 이루시겠다고 하신 그 약속을 붙잡고 자신의 소원을 아뢰는 것인데 자신의 소원이란 사실 하나님의 소원에 자신의 생각과 결단을 묶어버리는 거룩한 작업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듣고 계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인정하는 절대적인 믿음이 우선되지 않으면 곤란합니다. 기도는 내용에 어떤 것이든 의심 없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바울사도가 기뻐하며 항상 간구할 수 있었던 것은 기도를 듣고 계시는 주님을 먼저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대부분 기쁨으로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는 기도로 받아낼 그 응답내용에 관심이 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 하나님이 주실 것에 더 마음이 가 있으면 기쁨의 기도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응답의 내용은 절대적이지 못합니다. 있을 수 있고 없을 수도 있으며 미뤄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쥐고 계신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또 응답의 내용과 시점에 있어서도 정확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 인한 순수한 기쁨은 영원하고 불변합니다. 그러므로 하박국선지자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믿음은 가장 품격이 높은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좋은 믿음, 곧 환경과 상황에 무관하게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기쁨을 어떻게 소유할 수 있을까? 오늘 그 답을 하박국서 3장 17절 18절에서 우린 찾을 수 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19절에 이어집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열매나 소출 등 보이는 모든 것은 보였다가 안 보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의 존재를 근본적으로 다루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 분은 영원불변하십니다. 하바크선지자는 이 영원하신 하나님실존만으로도 넉넉히 기뻐할 수 있는 믿음을 소유했다는 것입니다. 순수한 관계는 상대방의 조건을 보지 않습니다. 인간사이의 사랑은 그래서 불완전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베푸시는 사랑은 전혀 조건이 없습니다. 어딜봐도 사랑할 구석이 없는 저와 여러분을 생명바쳐 사랑하신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반드시 그 사랑에 반응해야 합니다. 그 반응이 신앙생활입니다.
“보고 있어도 또 보고 싶고 그리운 그대”라는 노래가사가 있습니다. 아주 달콤하고 감동적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혼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사랑은 절대적이지 못합니다. 상대방의 감춰진 흉이 드러나고 환경이 달라지면 나도 나를 믿기 어려운 게 인간입니다. 형편따라 변하는 상대적 사랑이 아닌 절대적인 하나님 사랑은 어떤 것에도 불변 영원한 사랑, 죽음으로 증거된 예수그리스도의 사랑, 그 주님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오늘도 여러분 주의를 맴돌고 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을 어찌나 사모했는지 “내가 예수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라.”(빌1:8) 사랑은 심령이 몸살을 해도 마냥 행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그리워할 수 있다는 것, 우리의 영이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눈에 보이는 것에 상관없이 하나님만으로도 충분히 기뻐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3. 그리스도의 마지막 때까지 주님의 착하신 손길은 멈춤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의 기쁨과 그 기도는 빌립보 성도들의 하나님중심, 복음중심, 교회중심적인 삶에 있었고 그 뿌리는 예수의 영이 재림의 그날까지 늘 함께 하신다는 확고한 믿음과 체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행함이나 어떠함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습니다. 구원받을 아무 조건도 없는데 구원하시고 끝까지 이끌어 주시는 무조건적인 선택과 불가항력적인 사랑에 한번 구원하신 영혼, 끝까지 포기 안 하시는 하나님, 한번 시작하신 일은 끝까지 책임지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구원받은 아무 자격도, 자녀 될 아무 조건도 없는데 하나님께선 우리를 택하시고 이끌어 가십니다. 자녀답게, 구원받은 자답게, 하나하나 새롭게 오늘도 이렇게 말씀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를 잡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 주님께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뒤 우리에게 임한 구원과 거듭남의 일을 중단 없이 지도하시며 이끌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성도로 태어나는 것은 신앙고백 한번으로 가능하지만 자녀답게 성도답게 변하는 성숙은 평생을 통해 이뤄져 갑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요약해 봅니다.
1. 성도가 서로 화목하고 말씀 안에서 교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2. 바울은 환경에 관계없이 기쁨으로 기도했습니다. 환경과 상관없는 하나님을 향했기 때문입니다. 3. 우리가 받은 구원은 천국에 이르기까지 주께서 친히 인도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어떤 방법으로든 저와 여러분, 결국 하나님의 구원받은 자답게, 그리스도의 신부로 단장돼서 가장 복된 곳에서, 가장 복된 날, 가장 복된 도구로 사용하실 줄 믿습니다.
'주일강단'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9.12.25. 성탄감사예배 <요1:1-5. 어둠을 몰아내는 빛> (0) | 2019.12.25 |
---|---|
2019.12.22. 주일예배 (행 1:1-11[봉독:3]>. 눈으로 본 부활과 복음의 능력) (0) | 2019.12.22 |
2019.12.08. 주일예배<히6:13-20.맹세하신 하나님> (0) | 2019.12.08 |
2019.12.01. 주일설교 <사43:8-13. 나는 여호와, 구원의 하나님이라.> (0) | 2019.12.02 |
2019.11.24.. 주일예배<삿7:15-23.항아리를 깨고 횃불을 들라.> (0) | 2019.1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