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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19.10.20. 주일예배<히4:12-16.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 예수그리스도>

by 설렘심목 2019. 11. 5.

2019.10.20. 주일예배<4:12-16.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 예수그리스도>

[설익은 음식과 과일은 맛이 없지만 잘 익은 퇴비는 토양을 살린다. 성숙하고 아름다운 노년은 잘 삭은 퇴비여야 한다. 유익한 퇴비는 분명한 신앙고백의 토양 위에 익어갈 것이다. 수치와 실패는 모두 자신의 작품이려니와 젊은 날 그것들을 어찌 이겼는가를 말할 때 다분히 자신의 승리에 자신의 공로가 없음을 아는 자에게 허락된 기쁨으로 반드시 하나님의 개입을 앞세워야 한다.]

 

하나님을 직접 눈으로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 가지를 통해 자신을 나타내 주고 계셔서 보고자하는 모든 이에게는 넉넉하게 증거하고 계십니다. 가장 큰 계시는 예수그리스도시고 다음은 눈에 보이는 피조세계와 그 섭리요, 택한 백성의 구원과 성경말씀입니다. 과거 구약의 이스라엘백성의 행보는 오늘날 교회운동과 성도들을 통해 계시 재연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신묘한 하나님의 비밀은 이미 만천하에 공개된 비밀이라는 사실이 거듭 신기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활동하십니다. 그런데 말씀으로 활동하십니다.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많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 갚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말씀은 예수그리스도이신 줄 우리는 잘 압니다. 그 말씀을 꼭 붙잡아 믿는 도리에 굳게 서자는 권면의 말씀이 오늘 설교의 주제입니다.

말씀 위에 굳게 서서 승리하는 믿음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5-16절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헤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1.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맞을 매를 대신 맞고 우리가 당할 고통, 죄의 대가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우리의 자격이나 모양에 무관하게 전적인 은혜로 우리가 고침과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 태어났지만 그분은 우리의 죄를 담으시려고 죄없는 깨끗하고 텅 빈 큰 그릇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깨끗한 몸에 우리의 죄악을 모두 쓸어 담았습니다. 상상을 넘어서는 무서운 고통이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십자가 대속의 보혈을 믿는 믿음으로 그 앞에 담대히 나아감은 곧 그분의 사랑에 대한 반응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계획하시고 그 아들 성자 예수그리스도께서는 구원을 실현하셨습니다. 우리는 다만 이 놀라운 죄인구원의 복된 소식을 믿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말과 글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하신 것은 그분의 몫이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희생이 헛되지 않게 하는 길은 이 모든 하나님의 계획과 실현과 예수의 실존을 믿는 우리의 믿음이며 믿음은 믿는 만큼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다가서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자신의 모든 삶의 전반적인 것들을 하나님의 통치아래 놓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은 그대로 은혜의 보좌가 베풀어지는 시간과 장소를 말합니다. 즉 시공간 하나님의 통치가 진행되면 거기가 은혜의 보좌 앞입니다. 저 멀리 안드로메다나 코스모스 뒤에 있는 게 아니라 어디서든 하나님의 통치가 이뤄지고 있는 거기가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의 보좌 앞인 것을 믿기 바랍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셔서 친히 몸으로 동행하시는 주님은 언제나 우리 곁에 계셔서 우리를 한 번도 외면하거나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주님의 시계와 우리의 시계가 달라서 그분의 때를 우리는 다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우리의 때보다 주님의 때가 좋다는 것 정도입니다. 내가 정한 때에 응답치 않으신다고 주님이 멀리계신 것은 아닙니다. 좋은 믿음이란 모든 것을 믿고 적극적으로 맡겨드리는 믿음입니다. 어떤 것은 맡겨드리고 어떤 것은 자신이 직접 재단하는 일은 양질의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않기 바랍니다. 맡기고 감사할 때 대부분 기도한 그 사람을 사용하시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맡긴다는 것은 손을 놓고 멍하게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무릎 꿇어 주의 뜻을 구하고 중심과 일의 결과와 영광까지를 모두 주의 소유로 확정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기도하고 맡기며 순종하기로 결단하는 신실한 사람을 사용하셔서 위대한 일을 이루어 가시는 줄 믿기 바랍니다.

 

2. 감찰하시는 말씀, 예수님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12-13)

 

감찰하시는 말씀이란 무엇을 뜻할까? 감찰은 이리저리 자세히 살펴보는 것인데 세상에서 사용하는 감찰은 위법사실을 살피지만 하나님의 감찰은 도와주거나 고쳐주려고 할 때 그 전에 무엇을 어떻게 돕고 고칠까 살피는 것을 말합니다.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겁니다. 돕는다는 것는 채우고 부축하는 것이지만 고치는 일은 때로는 상당부분 환부를 도려내는 통증을 포함하기도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주 예수그리스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얼마나 예리하게 감찰하시는지 그 감찰의 분명함이 한 치의 오차도 없다는 것을 본문은 독특한 표현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한다고 합니다. 이 본문에서 말씀이 감찰하셔서 찔러 쪼개기까지 하는 인간의 혼, , 관절과 골수, 그리고 마음의 생각과 뜻이라는 것은 사람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을 말합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것과 미처 느끼지 못하는 잠재의식세계를 포함한 무의식세계, 손발을 움직여 활동하는 것의 작은 것 하나하나까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상세하게 살피시고 밝혀내십니다. 주님 앞에 숨겨진 것은 없습니다. 주님은 말씀으로 이 모든 피조세계를 지셨기 때문에 그 분 앞에 감춰진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특히 죄인들의 내면 깊은 곳에 숨겨진 갖가지 죄의 뿌리와 상처와 돌이키고 싶지만 잘 안 되는 안타까운 영혼까지도 자세히 보고 계시는 줄 믿고 아멘입니다.

 

3. 대제사장이신 예수그리스도를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14)

 

하나님 앞에서 대제사장은 제사장들을 포함한 모든 백성들의 대표자입니다. 특히 죄에 관한 한 대신 한 몸에 안고 하나님 앞에 서야하는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책임이 큰 만큼 권한도 매우 큽니다. 백성들의 대소사를 헤아려서 옳고 그름을 가리는 각종 시시비비를 가려서 심판해주기도 했습니다. 아론으로 처음 시작된 대제사장직은 마지막 그리스도로 완전해졌는데 인간이 맡던 대제사장은 인간 안에 내재된 죄성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전이 희생짐승을 매매하고 돈을 바꾸는 등의 타락을 보시고는 심히 노하셔서 좌판을 둘러엎고 성전 밖으로 내어 쫓으셨습니다. 이후 십자가의 사건으로 1년에 한번 드리던 큰 제사가 없어졌습니다. 단번에 영원히 사라진 짐승의 희생제사, 그것은 짐승의 희생제물로는 인간의 원죄와 자범죄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것을 말합니다.

 

짐승을 잡는 희생의 피로는 죄용서의 한계가 있는 인생들, 근본적인 뉘우침과 변화는 제물을 드리는 것 대신 메시아를 보내어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게 하고 그 계획과 실현과 약속을 믿는 믿음, 곧 신뢰의 확고한 기반만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무너진 관계에 희망이 있음을 하나님이 주지하셨습니다.

 

어느 사대부 집에 지독하게도 말을 안 듣고 속을 썩이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백방이 소용없게 되자 부모가 마지막 방법을 갖고 온 가족이 모였습니다. 먼저 어머니가 종아리를 걷어 올리고 아버지가 회초리를 사정없이 쳤습니다. 피가 터져 튀기도록 쳤습니다. 어머니는 울먹이며 말합니다. “내가 자식교육 바로 못했으니 더 치시오.” 다음에 아버지가 다리를 걷고 어머니가 치기 시작합니다. 어머니와 같은 말을 합니다. “내가 바르지 못해 본이 되지 못해 아들이 저 모양이니 더 치시오.” 피가 튀는 이 일 후에 아들은 부모님이 이토록 자신을 사랑한다는 뉘우침과 신뢰로 가슴이 찢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중종시대 이치우정승의 젊은 타락이라는 실화입니다.

 

우리 대신 우리의 죄값으로 피를 흘리며 코통 속에 죽어가신 우리의 대제사장 예수그리스도와께서 우리를 찾아주셨습니다. 우리는 가능하면 멀리 달아나기만 했습니다.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평생 유효하며 죄인 된 우리들은 이제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믿어드리는 것만으로 언제나 죄용서를 받을 수 있게 됐습니다. 이것은 제사제도의 최대혁신입니다. 구약의 제사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에누리 없는 몽둥이찜질이라면 신약의 예배는 굳은 신뢰를 요구하는 애절한 눈물의 감동적 승리입니다.

 

평생을 짐승의 피로 드리며 거듭되던 제사를 대제사장이 짐승대신 직접 제물이 되셔서 죽어주시고 피를 흘려주심으로서 구약의 복잡하던 제사는 끝이 났습니다. 이제는 그 대제상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믿으면 됩니다. 즉 예수그리스도라는 육체의 옷을 입고 오신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되 죽기까지 사랑하신다는 놀라운 사실을 감동적으로 믿어 신뢰한다면 이제 우리는 죄와 무관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비전가족 여러분.

인간이 태어나서 하나님을 깨닫고 천국과 지옥을 알게 된 이후 이같이 기쁜 소식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는 우리들의 마지막 소망이요, 기쁨이요, 노래가 됩니다.

이 주님을 잘 붙잡고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잘 지키기 바랍니다.

어떠한 것도 신앙을 앞서가는 것이 없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모든 삶에서 늘 하나님이 높임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행동하며 판단하고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나신 주님을 꼭 붙잡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시기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