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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19.09.29. 주일설교(요2:13-22. 거룩한 교회의 터, 성도)

by 설렘심목 2019. 9. 30.

2019.09.29. 주일설교(2:13-22. 거룩한 교회의 터, 성도)

[1945년도 28세에 에콰도르에서 식인종 아우카족에게 무참히 순교 당한 선교사 짐 엘리엇의 순교 전 일기. “영원한 것을 위하여 영원하지 못한 것을 버리는 일은 결코 어리석은 일이 아니다.”

 

유월절에 성전에 올라가신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제물용 가축을 파는 사람들과 환전상을 보시고는 화가 많이 나셨습니다. 상을 둘러엎으시고 채찍으로 짐승들을 밖으로 쫓아 내셨습니다. 그리고는 내 아버지 집을 시장터로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시69:9절 말씀을 떠올리며 저 열심 때문에 결국 주님이 크게 다치실 것이라고 염려하며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난데없이 상을 둘러엎고 채찍을 휘두르는 주님께 유대인들은 18절에서 당신이 우리에게 이렇게 하면 선지자라도 된단 말이요? 그렇다면 우리에게 무슨 이적으로 증거할 건가?”

주님이 대답합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일으키리라.” 사람들이 반문합니다. “이 성전은 46년이나 걸려 지었는데 사흘 안에 짓는다?”

여러분,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사람들이 어찌 다 이해하겠습니까?

다시 일러드리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옹색한 사고의 틀, 곧 의식의 구도(scale)안에 해석될 만큼 작은 분이 아닙니다. 인간의 이해와 분석으로는 끝내 가까이 다가설 수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작품을 보고 작가의 제작의도를 다소 헤아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작품이 작가를 분석하려는 것은 언제나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 이렇게 만들었냐고 따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만들어진 그대로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삶의 구현입니다.

 

여전히 지금도 세상 모든 교회에는 두 가지의 성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분석하며 이해하여 보려는 선악과 쪽에 속한 사람들과 아무 조건 없이 말씀을 따라서 믿고 의뢰하며 순종하려는 생명과에 속한 이들입니다. 우리 비전식구들 모두 후자의 생명과, 곧 예수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입니다.

 

46년간 건축된 시온성 예루살렘성전을 부수면 사흘 만에 새로 일으키시겠다는 주님의 신실하신 음성이 저와 여러분을 향해 오늘 선포되는 새 생명의 출발이 되길 주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46년은 육신이 수고한 숫자입니다. 그리고 사흘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완전수입니다.

이 사흘이란 십자가의 죽음을 말한 것인데 이때 골고다언덕에서 죽임당하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제자들도 알아듣지 못했다고 성경은 22절에서 밝힙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고 깨달은 것은 주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였습니다.

 

예루살렘성전은 주후 70년에 로마 티투스장군의 침공으로 주님의 예언대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은폐허가 됐을 때 백성들은 각기 흩어져 끌려가 참혹하게 됐고 로마의 속국이 됩니다.

 

이번엔 성전에서 짐승을 팔고 환전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봅니다. 사람들은 놀라서 선지자의 위세로 몰아붙이는 주님에게 선지자라는 증거로 뭔가를 보여주기 원했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그랬듯이 주님께 이적과 기사를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주님 앞에 드리러 나오기 보다는 뭔가 색다른 것을 한번 보고 싶고 얻고 싶은 것입니다.

 

애기하고 어른하고 무엇이 다릅니까? 애기들은 달라고만 하며 공급만 받기 원합니다. 어른들은 공급하고 보호합니다. 내놓을 줄 압니다. 성전안의 유대인들은 뭔가 선지자라는 증거로 선지자다운 큰 선물이벤트하나를 기대했습니다. 성전을 둘러엎었으니 혹 로마도 뒤집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제시한 놀라운 복음은 사흘 만에 지을 성전의 기적이었습니다. 할렐루야.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저와 여러분가운데 주님 친히 건축하시는 새 성전이 열리기 축원합니다.

하늘에서 우렁찬 팡파레와 함께 멋진 낙성식이 베풀어지기 원합니다.

 

오늘 하나님주시는 말씀의 제목은 거룩한 교회의 터, 성도즉 사흘 만에 일으키는 성전입니다. 이 말씀 함께 먹고 힘을 내는 모두 되시기 바랍니다. 먼저 사흘이 주는 영적의미는 무엇일까? 삼일의 3이라는 수는 하나님의 완전수이며 이것은 말씀의 완전성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증거되는 성전건축은 옛집이 무너진 터에 다시 집을 짓는 이른바, 성전재건축입니다.

46년간 세운 초대형 성전이 로마의 침공으로 단 며칠사이에 돌무더기가 됐는데 이것을 우리주님은 3일 만에 새로 건축하시겠다는 겁니다. 예배 중 옛사람이 속히 돌무더기 되기 축복합니다.

굳이 사나운 티투스가 오지 않아도 됩니다. 말씀을 믿고 예수님이름으로 명령하기 바랍니다.

 

해묵은 성전, 말씀이 퇴색하고 교회를 칠일장쯤으로 아는 부패한 영으로 순결한 영들을 오염시키는 무기력한 성전, 하늘아래 영구한 도성은 없듯이 이 성전은 반드시 무너져야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로마를 사용하셨습니다. 이 성전 대신 영원한 성전이 되어주신 예수그리스도를 찬송합니다. 히브리서의 증거처럼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은 영구한 우리들의 도성,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 그분을 만나 그분의 이름으로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어 가는 중입니다.

예배는 회복이란 말씀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그 회복을 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성전이 짐승을 팔고 사며 돈을 바꾸는 곳으로 타락하는 것을 더 이상 방치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친히 오셔서 사랑하는 백성을 나무라시고 때리신 아픈 마음 그대로 십자가에 올라가셨습니다. 배신감과 절망과 모든 아픔, 체면과 수치와 모멸감까지도 다 끌어안고 올라가셨습니다. 마지막에 뭐라고 기도하셨습니까? 아버지의 뜻이 이뤄지기를 원하나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 십자가에 오르실 때 죽음까지도 내려놓으셨습니다. 내려 놨더니 사단이 마지막으로 내민 히든카드, 죽음까지도 이기셨습니다. 오늘도 죽으신 후 다시 살아나신 그 주님 앞에 저와 여러분 이렇게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다만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우리가 깨닫기 원합니다. 오직 성경 안에서 살게 하옵소서. 교회와 일터와 가정 그리고 선교현장 외엔 찾아갈 곳이 없는 거룩한 외로움의 복을 내려주옵소서.

 

그렇다면 사흘 만에 새로 건축할 성전의 터는 어디입니까?

1. 영으로 말씀하실 때 육으로 듣는 제자들입니다.

 

주님께서 마16:16절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십니다. 거기서 내 교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를 본 것이 아니라 훗날 실상을 본 후에 깨닫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아직은 그러한 제자들의 고백위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46년간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해묵은 교회를 하나님은 왜 로마를 통해 허무셨을까? 죄인들이 회개하고 아무리 열심이어도 결국 그들의 손으로 세운 것은 반드시 죄로 물들게 되어 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위에 교회를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바뀌고 제도와 문물이 바뀌어도 이 고백은 영원한 교회의 터가 됩니다.

아직은 변화 받지 않아 미숙하고 지각없고 볼품없는 제자들, 그들의 신앙고백 위에 주님은 주님의 교회를 오늘도 지어가고 계십니다. 단단한 건축물은 기초가 단단합니다. 주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몸, 교회들을 일으키시기 전에 먼저 경건으로 기초를 다져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훈련의 고달픔은 장차 찬송이 울려날 훌륭한 예배처소를 소망하는 믿음으로 이겨가야 합니다.

 

거룩하신 창조주하나님의 처소, 거룩한 성전이 된다는 것, 이것은 참으로 일생일대의 가장 큰 사건이며 가장 큰 복입니다. 여기 우리가 치러야 할 값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값이 너무나 큰 것이어서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대신 당신의 피로 값을 치르고 터가 되는 자격을 입히셨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의 보혈은 하나님 거하실 교회의 터 값입니다. 그 말은 예수님 치르신 하나님처소의 값은 우리가 이제부터 예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유권이 없는 우리는 소유주의 뜻대로 행해야 합니다. 예수의 피 값에 넘어간 우리는 다만 그분의 명령만이 우리의 길인 줄 아는 것이 복인 것을 믿으시면 아멘입니다.

 

아직은 미숙하지만 장차 새 성전이 될 제자들이 지금 찬송하며 일하고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2. 이루어진 예언은 인정하나 이루어질 예언에는 무관심한 세상입니다.

 

22-23절을 읽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이 구절은 그래도 드러난 일로 인하여 예수님을 믿었다고 했지만 세상은 손에 쥐고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불신과 악이 팽배한 곳입니다.

저와 여러분 지금 어디에 살고 있습니까? 어디서 일해야 합니까? 바로 이러한 불신의 늪이라는 세상에서 살고 먹고 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불신의 땅에서 우리는 여전히 찬송하며 갑니다.

알고 보면 황금어장에 파송 받은 어부들이기 때문입니다. 거리에 나가 어깨를 부딪치는 사람들이 모두 다 전도대상자라고 보아 무방한 세상입니다. 복습합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주변사람들 두 종류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한쪽은 전도대상자, 또 한쪽은? 그렇습니다. 동역자입니다. 동역자 아니면 전도대상자입니다. 그 두 부류에서 벗어난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생업 외 이도저도 아니면 만나지 마시기 예수이름으로 당부합니다.

 

이렇게 부족하나마 교회의 터가 될 예수제자들이 열악한 세상에서 일할 때 진정한 능력은 무엇일까?

3. 말씀을 들리는 그대로 믿는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능력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언제 드러내십니까? 우리가 순종할 바로 그 때입니다. 말씀의 교훈과 내 생각이 따로따로, 찬송의 고백과 행실이 따로따로면 능력은 결코 드러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비전성도여러분.

경건은 겸손과 순결과 거룩함보다 더 큰 능력이 어디 있겠습니까? 딤전 4:7에서는 오죽해 경건하라.”가 아니라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했습니까?

택하시고 사명주실 때 주님만족하실 그날까지 쉬지 않고 우리를 교훈하고 인도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가장 가여운 자는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이고 가장 복된 인생은 주를 위해 사는 인생입니다. 그분을 위하여 평생토록 찬양하며 아낌없이 헌신하는 저와 여러분이시기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