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15. 주일예배 <마12:46-50. 영원한 그리스도의 가족>
[2019.09.09. 오래 전 교역자수련회가 열리던 강원도 모 호텔 밖 모래사장에서 본 파도는 삶에서 끊임없이 다가오는 인생의 파도를 말하고 있었다. 포말하나가 와서 팽개치듯 쓰러지며 사라지면 잠시 후 또 다른 파도가 오고 그게 꺼지면 또 나타나 다가와 이어지는 무수한 파도들의 릴레이, 바다가 있는 한 사라지지 않는 파도, 생명이 있는 한 사라지지 않는 염려와 근심과도 같았다. 누구에게나 있는 이 파도, 그 파도의 내용과 대응에 따라 삶의 격이 달라진다. 먹고 눕는 염려는 주께서 맡아주시고 나는 주의 나라에 관한 염려만 하길 간곡하게 소원해 본다.]
예수님당시에는 지금과 달라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사람들은 비참하게 살았습니다. 평생을 몹쓸 병에 걸리고 귀신에 들려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거의 아마존밀림의 원시부족과 거의 다르지 않게 사는 건 동서양이 비슷했습니다. 그렇게 어두운 시대에 병을 고쳐주는 동시 천국에 대한 가르침은 지금 우리가 듣는 복음과는 다른 절실한 말씀이었습니다. 현대인들은 산업화로 인한 풍요한 삶이 복음을 그렇게 절실하게 느끼지 못하게 하는 때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고통과 어둠이 깊어서 곳곳에 간절함이 있고 그만큼 은혜가 깊었던 시대였습니다. 풍성해서 정작 중요한 것을 놓쳐버리는 문명과 그렇지 못해 영원한 소망에 더 절감하던 시대, 시대와 문명에 무관하고 공평하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활동 예수그리스도를 찬미합니다.
예수님은 늘 병들어 서럽고, 무지해서 천박한 삶을 사는 가여운 사람들의 벗이었습니다. 늘 그들 곁에서 하늘의 놀라운 복된 소식을 전하고 병든 그들의 몸과 마음을 고쳐주시곤 했습니다.
그런 진실하고 선하시며 한없이 아름다우신 주님 곁에 모여든 많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기적을 바랐습니다. 뭔가 눈에 뚜렷이 보이는 신기하고 특별한 현상을 원했습니다. 자신의 몸이 대번에 깨끗해지기를 바랐고 로마의 학정에서 속히 풀려나 로마에 무거운 세금을 바치지 않고 한번 노력한 만큼 살아보는 게 소원이었습니다. 독립이스라엘의 선한 정치를 할 새 지도자, 왕이었습니다.
그렇게 군중들은 눈에 보이는 민족해방과 개인의 치유를 원했지만 주님의 사역과 소원은 지금도 불변,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서 이뤄지고 확산돼 가는 것입니다. 죄를 해결하지 않은 인간나라의 정치회복은 몸에 퍼져가는 무서운 암세포를 품고 멋진 여행을 떠나는 것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군중에게 말씀을 가르치실 때 가족들이 찾아오는 장면과 함께 시작됩니다.
47절은 밖에 서서 주님을 만나려고 찾아온 모친과 동생들을 어떤 사람이 일러드리는 장면이고 48-50절은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자매, 모친, 곧 내 가족이라는 주님 말씀입니다. 오늘 설교제목은 “영원한 그리스도의 가족”입니다. 주께서 친히 하신 이 말씀처럼 주안에서 만나 맺어진 영적인 영원한 가족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봅니다. 본문에 나타난 대로
예수님의 혈속개념은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행한다는 건 무엇일까?
1. 하나님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나 모든 예배보다 순종하는 것을 더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다(삼상15:22-23)고 하셨습니다. 순종과 거역하는 것이 얼마나 중차대한 것인지를 단적으로 말씀하신 겁니다. 사울은 순종하지 않아 길보아산 전투에서 세 아들 요나답, 아비나답, 말기수아와 함께 죽어 비오는 벧산 성벽에 목이 잘린 채 못 박혀 걸립니다. 예언대로 거역한 자의 참혹한 종말을 온 백성들이 보도록 하셨습니다.
불순종은 그대로 죽음을 뜻합니다. 어떻게 죽느냐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제일 안타까운 것은 목숨은 붙어있으나 죽은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밥 세끼는 먹어도 왜 먹어야 하는지를 모르고 맛있게 먹습니다. 삶의 목표가 없는 사람이 열심히 사는 것, 이는 죽은 자의 꿈틀거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에서 멀어지면 자신의 생각과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삶의 방향과 질이 자신을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세상과 자신 안에는 결코 영원한 사랑과 진리와 생명이 없습니다.
거의 감각과 본능적으로 눈에 당장 보이는 생존을 위하여 안간힘을 쓰게 됩니다. 그런 삶은 다른 모든 생물들의 삶과 크게 다를 게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너 지렁이 같은 야곱아”
기억하세요. 하나님과 깊은 친밀의 동행이 있다면 이스라엘이요, 아니면 아직 지렁이입니다.
무서운 속도로 산불이 다가오자 독수리가 나무위에 지은 둥지를 힘껏 껴안고 타죽었습니다. 타죽은 독수리를 치우고 보니 그 둥지 안에 타다 남은 독수리새끼들이 죽어있었습니다. 눈물겨운 어머니의 희생, 참으로 감동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에서 하시는 사랑은 그것과는 격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진정한 성경적 의미의 사랑이란 사랑할 수 없는 대상을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저와 여러분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을만한 것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그러나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무슨 연유입니까? 하나님은 곧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그냥 하는 짓마다 죄 짓는 일이고 하나님은 하시는 일마다 사랑하는 일이고 거기 따른 희생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성경적 의미의 순종이란 순종할 수 없는 거기서도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놀라운 순종은 하늘 문이 열렸을 때에 비로소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적극적인 반응을 항상 기대하고 계십니다.
언제나 결론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론에 이르는 과정에 우리를 반드시 동참시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미 결정된 하나님의 길을 갈 때 순종하는 일만이 우리의 일신과 마음을 평탄하게 합니다. 물론 순종은 고통을 수반합니다. 고통 없는 순종은 없습니다. 그러나 순종은 순종이 이뤄진 후에 반드시 그가 치른 고통에 대한 대가를 훌륭하게 지불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고난을 면제시켜 주시는 것보다 고난을 믿음으로 해석하고 이기시길 바라시며 또 힘을 주셔서 그 고난 후에 더 큰 풍요와 성숙과 기쁨을 허락하십니다. 거기 순종이 없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고난과 순종이 매우 힘들어 축복도 순종도 고난도 다 싫으니 그냥 가만 내버려달라고 울부짖게 됩니다. 그건 마치 일도 싫고 먹는 것도 싫다는 것과 같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순종에 따르는 고통을 불평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그 고통이 가져 다 줄 성숙을 기대하며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파도가 높을수록 배는 빨리 나아가고 마른 땅일수록 뿌리가 멀리 퍼져가며 바람이 가지를 흔들면 뿌리가 단단해 집니다. 향과 색이 짙은 건 봄샘추위가 매서웠다는 것을 말하는 것 아닙니까? 주님의 가족 두 번째 조건은?
2. 하나님을 늘 사모, 사랑하며 동행을 바라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늘 함께 있고 싶어하는 것이고 그가 기뻐하는 일을 자신도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가 미워하시는 일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 첫째가 무엇입니까? 그분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은 서로 사랑하고 환한 미소로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며 하나님의 평강을 굳세게 붙잡으려고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죄인을 화평케 하시려고 목숨까지 드리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처소는 늘 기쁨과 평화가 넘치는 곳인데 그 화평을 가로 막는 건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내가 이길 수 없는 끊임없는 파도, 주를 바라보게 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가족이 되는 길은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것이며 하나님 뜻대로 행한다는 것은 첫 째 하나님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며 두 번째 하나님을 늘 사모, 사랑하며 동행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주님의 가족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마지막 세 번째는,
3. 말씀에 집중하고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2:13.
선포되는 말씀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큰 소리로 말씀을 확실하게 붙들어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바랍니다. 말씀은 능력입니다. 아멘 할 때 순종할 힘도 주시는 줄 믿습니다.
성도여러분, 사람들이 왜 불행합니까? 하나님과 불편한 관계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왜 불편해졌습니까? 죄의 문제가 청산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죄의 문제란 또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내 마음과 삶의 가장 높은 곳에 모셔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자리에 누가 앉아 있습니다. 바로 자기 자신이 아닙니까?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세요. 거기 앉아 찌푸린 얼굴을 한 인간은 뭔가에 늘 포로가 되어 있음을 속히 알 수 있습니다. 바로 교묘하게 속이는 죄악의 유혹들입니다.
그것은 나도 정신차려 잘만하면 하나님 없이도 자유자재로 힘차게 살 수 있다는 어리석은 희망, 현대판 선악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그리스도의 가족이 되기 바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고 뜻대로 행하기 위해 하나님께 집중하고 순종하며 늘 그 분으로 가득한 삶을 사모하고 기뻐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신 말씀 붙잡고 행복한 가정, 예수그리스도의 가족이 다 되시기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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