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8.25. 주일설교 <마13:31-32.겨자씨 같은 믿음>
[열흘만 살고 버리는 집이 누에고치이고, 여섯 달 살다가 버리는 집이 제비들의 집이며, 일 년 살다가 버리는 집이 까치들의 집이다. 그런데도 누에는 집을 지을 때 창자에서 실을 뽑고, 제비들은 자기 침으로 흙을 이겨 진흙을 만들며, 까치들은 볏짚을 물어 오느라 입이 헐고 꼬리가 빠져도 지칠 줄을 모른다. 영원히 살 천국의 집을 짓는데 우리는,..]
주님은 본문에서 천국을 자기 밭에 가져다 심은 아주 작은 겨자씨 한 개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으로 천국을 가장 가까이서 발견하는 기쁜 예배가 되기 바랍니다.
한 사람의 인생은 시간과 열정과 물질을 어디에 사용하는가에 따라 결정돼 갑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의 모습은 그동안 우리가 시간, 열정, 물질을 사용해온 결과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을 사용하는 주체는 생각, 가치관입니다. 즉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생각입니다. 최고의 가치는 오직 예수뿐입니다. 모든 최고의 가치, 영원한 가치는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됩니다.
곡식은 1년을 바라보고 심고, 나무는 10년을 계획하고 심습니다. 자식농사는 100년을 바라보지만 끝이 없는 영원한 세계는 예수를 믿음으로서 시작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겨자씨는 씨 가운데 매우 작은 것입니다. 이 작은 씨 하나를 가져다 자기 밭에 심는 일을 천국에 비유하십니다. 겨자씨는 우리들의 작은 믿음으로 받은 복음을 말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그 구원의 마지막 목표가 영생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죽음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천국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우린 압니다. 여기 여전히 신음이 멈추지 않는 세상에서 우리도 울부짖으며 하루하루 가지만 우린 세상과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이 아니라 영생이요, 흑암이 아니라 예수가 빛이신 광명의 길입니다.
믿음을 겨자씨에 비유함은 신앙이 지극히 작아 보이고 사소해 보이는 것으로 시작됨을 이르는 것입니다. 천국의 영원한 삶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짧은 평생 안에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느냐에 달려 있으니 다 양보해도 신앙만은 양보 못할 이유가 됩니다.
믿음은 능력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능력입니다. 눅17장6절에선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뽕나무에게 명령해 바다로 옮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천국이 이처럼 아주 작은 믿음으로 시작되고 또 들어가게 되는 곳입니다. 한절씩 봅니다. 우리의 천국행 발걸음은 겨자씨만한 믿음이며 그 겨자씨는,
1. 모든 씨보다 유난히 작은 씨입니다.
무릇 씨앗이라는 것은 크기에 관계없이 생명이 숨어 있습니다. 여기서 씨란 천국을 잉태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합니다. 이 말씀이 처음에 우리 안에 떨어졌을 때 거의 보이지도 않는 매우 작은 것이었습니다. 처음 복음은 들리는 둥 마는 둥 귀에 스치는 바람 같은 소리일 수 있습니다.
교회 오면 늘 하는 소리가 그 소리로 들립니다. 목사님들 설교는 뭐 뻔하고 거기서 거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뭔가 있다는 기대감으로 꾸준히 출석하여 마음을 비우고 귀를 기울이면 차츰 죽었던 영이 살아나 영적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합니다. 영이 말씀으로 깨어나면 성경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그 음성이 처음엔 얼마나 세미하고 겨자씨처럼 작은지 잘 안 들립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일이 매우 작은 일로 시작됩니다.
여러 힘든 환경에서 지축이 흔들리는 하나님음성을 듣기 전에 우리에겐 강대상의 세미한 음성 앞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복이 임한 줄 믿습니다. 그렇게 듣고 시작된 천국의 씨앗은 심겨진 밭의 토질에 따라 매우 다른 성장을 보이게 됩니다. 옥토가 되시기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뿌려진 씨앗은 머지않아서 밭에서 영양분을 받은 대로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천국의 확장입니다.
2. 밭에 따라 품질과 모양이 다른 나무가 됩니다.
성경에서 이를 옥토와 박토의 예를 들어 상세히 설명됩니다. 길가와 가시떨기나무 밭과 돌밭과 기름지고 좋은 밭의 비유인데 한마디로 밭의 질에 따라 열매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 심령 안에 심어졌을 때 어떤 이는 간절한 마음, 아멘으로 뜨겁게 받아서 속속 삶으로 열매가 드러납니다. 그런가하면 몸은 예배당에 앉아있어도 생각은 출장 중입니다. 교회문밖을 나서면 제목조차 기억을 못합니다.
씨앗은 말씀이며 천국의 시작입니다. 밭은 그 씨가 심어지는 우리의 심령이며 우리의 믿음입니다. 어떠한 자세로 믿어드리느냐는 이렇게 중차대한 문제입니다. 간신히 천국 문에 턱걸이를 할 것인가? 아니면 천국에서도 중앙부처에 귀한 일의 영광을 감당할 것인가?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고전15:41에선 분명하게 천국의 직분과 그 영광이 다르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땅에서 각자의 믿음으로 이미 결정하고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 잊지 않기 바랍니다.
여기서 잠시 옥토에 대한 참된 살핌이 세상이 보는 것과 다른 것을 재차 짚고 가길 원합니다.
사람들은 외모로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살피십니다. 다 속아도 하나님은 속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보통 외모에 속습니다. 특히 자신의 외모에 속기 쉽습니다. 유학 다녀왔고 영화배우 같은 아내, 부드러운 자신의 인격, 여러 개의 학위증서, 직함 등이 자신을 썩 괜찮은 신앙인으로 어지간하면 다 속아 넘어갑니다. 특히 거기까지 남다른 성실과 노력으로 온 것을 스스로 흡족해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남에게도 자신에게도 속지 않아야 합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볼 때 과연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는가에 민감해야 합니다. 그래야 속지 않습니다. 주의 영이 함께 하시면 생각의 근본부터 달라집니다. 즉 나나 남이나 모두 거기까지 무엇을 목표로 그리했냐고 질문해야 합니다. 성공해서 잘 살기 위해 그랬다면 그것은 별의 영광쯤에서 머물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을 주신 주 앞에 육신을 다해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이었다면 그리고 지금 그렇게 바뀌고 있다면 그는 해의 영광으로 그날 거기서 반드시 드러날 것입니다.
보이는 것 내 놓을 게 별로 없다면 그로 인해 마음밖에 드릴 게 없으니 더 기뻐하고 마음깊이 주님을 찬미하고 정직한 영으로 삶 자체를 드리면 이보다 더 아름다운 신앙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겐 이 세상 주님 한분만으로 충분하다는 신앙고백, 1분1초도 나를 좌시치 않으시는 주의 눈앞에 내가 있다는 사실, 세상 부러운 것 단 하나, 주님과 친밀하다는 것, 그걸 위해 몸부림하는 고백, 그리고 때마다 깨닫게 하시는 것 몸을 쳐서 굴복시키며 세상과 육신이 너무 아프게 해도 오직 주께 순종하기를 기뻐하는 그 고백, 우리 가운데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3. 나무는 열매로 자신을 말합니다.
꼭 천국에 가서 확인하지 않아도 벌써 여기서 예배드리는 자세나 믿음생활 하는 걸 보면 그 사람 천국 가서 어떤 영광으로 살아갈지 짐작이 됩니다. 오늘의 삶으로 천국을 그려가고 있는 것인데 방금 사람이 보는 것과 주님의 시각과 견해는 매우 다르다고 들었습니다.
나무는 열매로 말합니다. 보이는 열매보다 주님은 안 보이는 열매를 기뻐하십니다. 주님이 사마리아 우물곁에서 제자들이 시장하신데 뭘 좀 드셨는지 궁금해 할 때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고 하시며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라고 하십니다.
겨자씨는 다 같은 겨자씨인데 잠시 후 보니 나무의 질이 다릅니다. 양질의 밭, 곧 옥토에 심겨진 겨자씨는 훌륭하고 멋진 나무가 돼 많은 새들이 날아듭니다. 지친 나그네가 앉아서 편히 쉽니다. 시원한 그늘, 쉴만한 나무그늘입니다. 그런데 한 나무는 땅이 척박해 나무를 살펴보니 겨자나무 같기는 한데 배배 틀어져 아무리 봐도 쓸 만한 구석이 없고 매력도 없습니다. 새한마리 앉아 노래할 나뭇가지도 없습니다. 지나가다 사람들이 보고 핀잔합니다. “길 한가운데 걸리적거리게 있나?”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심령 밭을 돌아보시고 오늘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모두 옥토 되기 원합니다. 볼품없는 줄기와 가지는 얼른 끊어내는 게 상책입니다. 새로 심고 물주고 거름 주고 정성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거름은 잘 삭아야 합니다. 옛사람의 근성들을 다 뽑아 상처로 썩은 것들 잘 삭혀 가라앉히고 거기 새로운 복음의 싹을 틔시기 소망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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