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01. 주일설교<몬1:16-20. 형제여. 오네시모를 영접하라.>
[장미를 보는 시각은 둘로 나뉠 수 있다. 하나는 예쁜 장미에 왜 가시가 있냐는 아쉬움이고 또 하나는 모양 없는 가시나무가 그래도 예쁜 꽃을 피워서 다행이라고 보는 것이다. 일어난 일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역사를 교훈삼아 새로운 시각으로 보며 미래를 긍정적으로 설계하는 일은 인간에게 달려있다. 우리 옛말에도 내려다보고 살라는 말이 있는데 나보다 더 불행한 이들을 보면서 위로받는데서 한발 나가 그들을 위로하고 도우며 나보다 훌륭한 삶을 사는 이를 따라가고 존중함이 품격 있는 인생이다.]
오늘 주시는 말씀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름 오네시모를 들으시면 여러분 각자의 이름으로 바꾸어 들으시면 더욱 은혜가 될 줄 압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 집에서 종살이하던 청년이었습니다. 부유한 빌레몬은 바울을 만나 주님을 영접하고 바울에게 매우 유익한 동역자가 됩니다. 한편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종살이하던 당시 금전적 손해를 끼치고 도망친 자입니다. 이리저리 피해서 로마까지 왔다가 바울의 전도를 받아 회심했는데 이 사람도 바울에게 상당한 힘이 되어주는 귀한 동역자가 됩니다. 바울은 빌레몬을 친구처럼 신뢰하고 친밀히 지냈으며 오네시모는 아들처럼 여겨 아꼈습니다. 옥에 갇혀 있던 바울은 오네시모가 과거 빌레몬에게 저지른 실수로 적잖은 부담을 느끼고 있음을 알고 편지를 써서 마침 로마에서 골로새로 편지를 전하러 가는 두기고와 함께 거기 있는 빌레몬을 향해 동행하게 한 것입니다. 본서에는 바울의 동역자된 사랑의 심경이 구절마다 간곡히 나타나 있습니다. 빌레몬에게 간절히 부탁하는 것은 과거에 죄를 짓고 도망간 괘씸한 종을 용서하되 이젠 오히려(16절) 사랑받는 형제로 받아주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젠 너나 그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새사람이 됐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아니고 세상이라면 어려운 일입니다. 손해를 입히고 도망친 하인을 형제로, 그것도 사랑하는 형제로 인정하고 받아준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주안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며 마땅히 해야 할 아름답고 귀한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담대히 권고하며 친필로 써서 말하기를 오! 형제여. 나로 주안에서 너를 인하여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5:13-14절에선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가장 큰 사랑으로 오셔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고 우리에게 이 같은 사랑을 행하면 주님의 친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빌레몬에게 바울은 주님을 위하여, 바울을 위하여, 오네시모를 위하여 기꺼이 자신의 권유를 받아들이기 원했습니다. 죄를 짓고 주인의 곁을 떠나 멀리 달아났던 오네시모,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로서 택함받은 주의 자녀가 되어 바울의 신실한 종으로 거듭난 오네시모, 저와 여러분 모두가 이렇게 오네시모처럼 용서받기 어려운 죄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으로 큰 은총을 입어서 빛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알고 보면 우리 모두 오네시모와 크게 다를 게 없다는 겁니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자녀로 받아주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죄를 짓고 달아난 오네시모와 예수를 등지고 살던 우리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여전히 오네시모이름을 여러분의 이름으로 바꾸어 듣기를 권유합니다.
1. 오네시모를 택하신 하나님.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모세를 부르시고 다윗을 부르시고 바울을 부르신 하나님, 죄를 짓고 로마로 도망친 오네시모는 이미 하나님의 계획가운데 붙잡혀 있었습니다. 로마로 도망친 것은 거기 만나야 할 바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는 말할 수 없이 신묘합니다. 바울은 이미 오네시모의 상전인 빌레몬과 긴밀한 동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오네시모의 구원계획까지도 포함된 하나님의 주도면밀한 섭리였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은 빌레몬을 구원하시는 일 외에도 동시에 오네시모를 향한 구원계획을 갖고 계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아오는 가운데 무슨 일이 있었든지 그리고 누구를 만났던지 여기 비전교회에 오셔서 함께 예배드린다는 사실은 이미 저와 여러분을 동역자로 삼으시고 아주 귀한 일을 맡기신다는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계획가운데 우리가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 예사로 보질 않습니다. 장차 얼마나 웅대한 하나님의 일이 펼쳐지게 될까? 빈틈이 없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함께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기대한다는 것은 신뢰하기에 가능한 말입니다.
2. 오네시모를 종이 되는 것을 허락하신 하나님.
사랑하는 여러분. 오네시모의 기가 막힌 구원의 여정에는 그가 겪어야 할 일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것이 빌레몬 家의 종살이였고 도둑질이었습니다. 오네시모는 그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말할 수 없는 좌절과 긴장과 자신에 대한 분노를 느껴야 했습니다. 누구나 인간은 편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깨닫지도 못합니다. 택함 받은 자들에게는 이렇게 택함 받을 만한 이유와 동기를 종종 허락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구원받고 지금 여기 예배하는 저와 함께 하시는 여러분의 인생길에 어떠한 일도 원망하는 일이 없기를 종이 요청합니다. 원망할 일을 믿음으로 견디면 잠시 후에 찬송의 제목이 되는 것, 이제 우리가 모두 잘 아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원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네시모는 종이 되어 죄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죄 앞에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를 철저히 알았습니다. 죄짐이 무거울 때 말씀만이 능력입니다. 주께서 여러분을 찾아주시면 우리 안에 숨어있던 죄가 밝히 드러납니다. 죄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빛이신 주님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오네시모는 비천한 종이 되어 죄짓고 도망치는 곳까지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방황하며 로마까지 갔습니다.
3. 바울과 만나게 하신 하나님.
죄로 눌리던 오네시모는 마침 바울의 전도를 받아 구원받고 죄의 눌림과 사망이라는 존재론적 공포로부터 해방됩니다. 죄와 사망에서 해방된 감격은 그로 하여금 예수님과 바울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하리라고 헌신을 결단합니다. 그리고 바울의 수족이 되어 도와드리기 시작합니다. 죄로 심하게 눌려 본 자만이 해방과 용서가 주는 감동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수종자가 되어 기쁨으로 일하면서도 한편 아직도 숙제로 남아있는 한 가지 문제로 늘 힘들어합니다. 그것은 그가 도망친 옛주인 빌레몬도 하필이면 바울의 전도를 받아 훌륭한 바울의 동역자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오네시모는 피할 도리가 없었고 마음이 무겁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알아 자신이 선포한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빌레몬에게 간곡히 권면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용서를 받은 후 천국시민이 되어도 아직 사람사이에서 청산되지 못한 문제들로 인해 눌리는 일은 종종 있는 일입니다. 마16:17이하에 보면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 마5:23-24절에선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십니다. 화해가 쉽게 됩니까? 우리에게 구원받았다는 믿음의 감격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네시모는 바울을 만나 죄로 얽힌 관계에 자유의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편지를 손에 쥐어주는 순간 오네시모는 영혼구원과 함께 자신의 인생이 이처럼 복된 것은 예수님이심을 다시 깊이 감사하게 됩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이 모든 일이 실마리를 찾아가기 시작합니다. 오네시모는 주님위해 죽을 각오의 감동이 있었을 것입니다. 영혼구원이 얼마나 큰 은총인지를 바로 알게 되면 우리도 오네시모처럼 헌신을 결단하게 됩니다.
4. 빌레몬과 형제 되게 하신 하나님.
현재 오네시모가 처한 정황에서 구원의 하나님을 제외한다면 이 상황이야 말로 매우 불행하고 난처한 일입니다. 죄를 짓고 도망친 옛 주인의 친구를 만난 것은 곧 로마당국에 넘겨져 감옥에 간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오네시모의 행적에 예수님이 개입하셨습니다. 구원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오네시모를 구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이제 오네시모의 삶은 위험천만한 낭떠러지에서 꽃 향기나는 안전한 길로 접어 들었습니다. 저주받은 노예의 삶과 죄 짓고 도망친 범죄자가 예수님만나 영혼이 구원받고 거기에 노예로부터의 해방과 도적질한 죄의 용서를 동시에 받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가 과거엔 감히 말도 못 붙이던 옛 주인과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주님은 오늘도 오네시모와 같은 우리에게 이보다 더한 은혜를 부어주고 계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운데 아직 청산되지 못한 죄나 상처가 있습니까? 구원의 주님부터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원죄와 자범죄를 완전하게 해결해 주십니다. 용서하실 뿐더러 영원한 생명의 비밀가운데 기쁨과 감동을 주십니다. 그렇게 크던 세상이 작아지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하늘과 땅을 한손에 쥐고 계신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육체와 죽음을 이기게 하시는 주님을 찬송합니다. 아멘.
'주일강단'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9.09.15. 주일예배 <마12:46-50. 영원한 그리스도의 가족 (0) | 2019.09.15 |
---|---|
2019.09.08.. 주일설교 <요 21:15-19 :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0) | 2019.09.08 |
2019.08.25. 주일설교 <마13:31-32.겨자씨 같은 믿음> (0) | 2019.08.26 |
2019.08.18. 주일예배<사66:22-24. 영원한 성도의 이름> (0) | 2019.08.18 |
2019.08.11. 주일설교<계3:14-22. 라오디게아교회> (0) | 2019.08.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