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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19.09.08.. 주일설교 <요 21:15-19 :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by 설렘심목 2019. 9. 8.

2019.09.08.. 주일설교 <21:15-19 :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풀과 나무 그리고 지천에 깔려있는 것들 가운데 인간의 몸을 고칠 수 있는 약은 충분하다. 구약과 신약이 맞아 떨어지고 약은 독으로 만들며 밤과 낮이 만나 하루가 된다. 문제는 본래 답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깨닫고 믿고자 한다면 천지에 있는 모든 것이 답이요, 진리며 하나님의 흔적이요, 음성이다.]

 

베드로는 제자 중 으뜸이라는 수석제자였습니다. 그는 연장자답게 항상 앞서가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앞서가다 보니 실수도 많습니다. 그는 적극적이고 활달한 성격으로 먼저 나서고 먼저 실수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두려움으로 뒤에 숨는 비겁한 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마지막 생명의 위협 앞에선 주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잡아떼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히브리어로는 시몬, 헬라어로는 베드로, 주님이 쓰셨던 아람어로는 게파로 불리운 그의 이름은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열정적인 사람이 보통 그러하듯이 비교적 급한 편이었는데 언제나 예민하게 반응하며 우물쭈물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한밤중에 유령처럼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주님께 만일 주님이시면 내게 명령하여 물 위로 걸어오라고 하십시오.”라고 말한 뒤 오라는 말씀을 듣고 바다위에 뛰어내려 몇 발자국이나마 걸었던 사람입니다. 가다가 비록 파도를 보고 놀라 물에 빠졌지만 주님은 그것을 나무라지는 않고 손을 잡아 구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께서 잡히시던 날 밤엔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칼로 내리쳐서 칼을 가진 자는 칼로 망한다.”는 꾸중을 듣습니다.

그리고는 주님께서 예고하고 사흘간의 죽음을 말씀하시자 결코 그 일이 주께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만류하던 그는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혹독한 야단까지 맞았습니다.

 

변화산에서 감동하여 놀란 나머지 주여 우리가 여기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고 말한 베드로가 최후의 만찬 후엔 뭐라고 합니까? 주님께서 내가 골고다의 언덕에 오를 때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라고 하시니까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라고 한 사람이 베드로였습니다. 이 때 주님은 네가 이 밤 닭이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자 대번에 맞받아 힘 있게 하는 말이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했고 제자들도 모두 그렇게 말했다고 막 14:27-31절에서 증거합니다. 주께서 잡히시던 그날 밤 비참하게 무너진 베드로였으나 끝내 주와 함께 죽으리라는 베드로의 서원은 훗날 성취되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린 베드로는 영광스런 순교를 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이 베드로사도를 어떻게 보십니까? 그는 참으로 위대한 신앙인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분명 행동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행동하지 않는 믿음은 실수도 없을 것입니다. 실수가 두려워 시도조차 해보지 않는 비굴함과 나약한 믿음이 우리에겐 없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동일한 질문과 동일한 대답이 세 번이나 나타납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그런데 여기서 주님께선 베드로를 요한의 아들 시몬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육신의 부친이름을 앞세우셨습니다. 이는 아직도 베드로가 육신의 출신성분인 육성, 곧 부모로부터 받은 죄성을 버리지 못해 만족한 성화에 이르지 못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라는 이름이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하는 것은 사도행전에 가서입니다. 아직 영적으로 미숙한 베드로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문도와 함께 성령의 불을 받은 후 드디어 교회의 초석인 베드로가 됩니다. 이것은 아무리 훌륭한 인재도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기 전에는 온전한 사역자가 되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이 베드로를 향한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질문에서 사랑이 원어에는 <아가페 스메>였고 세 번째의 질문은 <휠레이 스메>였다는 것은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정의 사랑으로 질문이 바뀝니다. 이때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뼈아픈 가책의 베드로가 줄곧 할 수 있는 대답은 휠로세, 그것이었습니다.

그 아픈 대답에 주님은 긍휼과 인자와 신뢰를 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내 양을 먹이고 키우라는 특명을 내리십니다. 위대한 양육권의 위임은 베드로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내 양을 먹이고 키우라는 특별한 명령은 특별한 은혜였습니다. 특별한 치유의 말씀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자신의 양무리들을 위임하신 것이 장래 얼마나 크고 위대하고 감당키 쉽지 않은 일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18절에서 하신 말씀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진실로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21:18

내 양을 책임지는 특권과 사명은 막14:31에서 죽음까지도 따르겠다고 고백한 것을 이루는 엄청난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함께 정리해보기로 합니다.

 

베드로사도는 비록 불같은 체질에 성급한 반응으로 종종 실수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불타는 주님향한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꾸준히 나서고 꾸준히 실수하는 그에게 주님은 가장 큰 사명과 특권을 부여하셨습니다. 주님은 과연 베드로의 무엇을 보셨습니까? 무엇을 인정하셧습니까?

 

1. 하나님나라, 곧 영생의 말씀을 사랑하는 순수한 믿음입니다.

 

영생의 말씀은 곧 예수님을 말합니다. 이렇게 전달되는 말씀은 지금 예수님의 뜻, 다시말해 예수님이 전달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여러분의 마음문 밖에서 인격적으로 환영해 주기를 기다리며 노크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설교는 동일한데 어떤 이는 변화를 일으키는 복음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시험에 들게 하고 또 때리는 회초리가 되기도 합니다.

베드로사도는 순수한 믿음으로 주님을 사랑한 사람입니다. 그가 성령의 불을 받기 전에는 여러 가지 실수를 거듭하지만 그래도 그는 주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주님 잡히시던 날 밤에 비록 닭이 울기 전 비참한 자신으로 통곡하지만 그래도 살벌한 그날 밤 생명의 위협을 무릎쓰고 주님 곁을 끝까지 맴돈 사람은 베드로 한 사람이었습니다. 배신이 두려워 주님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는 것보다 두려움으로 실패한다하더라도 주님 곁을 차마 떠나지 못한 베드로는 그만큼 순수한 사랑을 지닌 채 신의를 지킨 의리의 사나이였고 존경할 만한 수제자였습니다.

2. 부족해도 최선을 다하려는 거짓 없는 열정입니다.

 

주님의 눈은 언제나 장래 이뤄질 믿음인격과 일어날 믿음의 승리에 맞춰져 있습니다. 우리들은 현재 보이는 것으로 평가하지만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의 성숙하지 못한 언행에도 불구하고 장차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하여 귀하게 쓰일 제자는 베드로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마가의 다락방 성령의 강림사건 이후 모든 제자들은 변했습니다. 아무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죽음도 그들을 말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순교했습니다. 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은 성령님의 위대한 활동입니다.

 

우리가 오늘 베드로나 다른 사도들을 본으로 삼는 것은 가룟유다 외엔 모두가 자신의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고 드렸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나라에 비하면 이 땅에서 드려지는 우리들의 헌신은 너무나 작고 짧은 시간에 불과합니다. 그 짧고도 짧은 헌신과 희생과 섬김이 영원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중심을 보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성실여하를 보실 뿐 결과에 관해서는 늘 관대하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도전의 믿음입니다.

 

거듭되는 주님의 충고와 질책에도 베드로는 늘 주님 곁에서 감동하고 흥분하며 꾸준히 도전합니다. 지칠 줄 모르는 도전의식은 베드로만의 장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장점이 처음부터 좋은 모습으로 교회의 덕이 되진 못했습니다.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결단으로 아파하던 베드로가 결정적으로 바뀌어 놀라운 주님의 동역자가 된 것은 성령의 임재 이후였습니다. 끝내 좌절하지 않고 주님의 언약(1:4-5)을 믿고 기다리던 그는 기어코 성령의 불을 경험한 것입니다.

 

부족해도 지치지 않는 도전의 믿음은 결국 성령으로 거듭나는 놀라운 체험을 갖게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남은 모든 크리스챤들이 한결같이 바라는 간절한 소망일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기만 하면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죽어 천국은 물론이요, 살아서도 천국의 모형과 예증들을 마음껏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말씀이 꿀처럼 달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지체들이 반갑고 그립고 귀할 수 없습니다. 늘 가고 싶은 교회가 됩니다. 세상의 노래는 부를 수 없으며 세상친구들은 모두 전도해야 할 안타까운 사람들로 보입니다.

 

사랑하는 비전가족 여러분. 실수를 두려워 마세요. 부족은 나무랄 것이 아니라 채우려고 노력하면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여러분 마음속에 순수한 열정과 넘어져도 거듭 거듭 털고 일어서는 끈기를 주셔서 하나님나라의 귀한 일군으로 사용되시기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