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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19.08.11. 주일설교<계3:14-22. 라오디게아교회>

by 설렘심목 2019. 8. 11.

2019.08.11. 주일설교<3:14-22. 라오디게아교회>

아스팔트를 녹이는 태양을 피해 가랑이속까지 적시는 폭우를 만나

온 몸을 식히던 빗방울마다 눈물 되어 흐르니 그토록 사모하던 가을이련가?

풍상(風霜)에 삭아 푸실푸실한 흙집, 이제 빗줄기에 무너져 흘러내리면

한줄기 빛을 따라 손으로 짓지 아니한 영구한 도성 안에

약속 붙잡고 내가 들어가리라. 뜨겁게 작렬하는 세상 불연단도 잠시면 지납니다. 그리고 그날은..

라오디게아 교회는 계시록의 일곱교회 중 맨 끝에 거론되는 교회로서 다른 여섯 교회와 달리 주님께 책망 외 칭찬이나 격려를 듣지 못한 부끄러운 교회입니다. 라오디게아지방은 교통의 요충지에 모직물공업이 발달했고 금융거래가 활발해 풍요로운 삶의 도시였습니다. 다른 여섯에 비하여 비교적 풍부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풍요가 언제나 영적인 타락을 가져온다고는 할 수 없으나 보통 넉넉해지면 하나님을 찾는 일에 게으르게 되고 따라서 풍부한 물질이 천국 가는 길에 거침돌이 되는 경우가 흔합니다. 한절씩 봅니다.

 

14절입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증거하고 있습니까?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라고 말합니다.

1) 아멘 : 그리스도의 이름이 아멘이심은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전적으로 순종하심을 의미합니다. 라오디게아교회가 불순종으로 책망 받는데 대한 상대적인 그리스도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2) 충성되고 참된 증인 : 아멘의 순종함과 그 충성됨의 참된 증거를 죽음으로 하셨습니다.

3) 하나님의 창조, 그 근본이신 분 :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이 우리 교회와 가정과 개인과 육체의 주인 되시며 여러분 가정마다 호주되실 뿐 아니라 개인의 구원주시요. 자랑이시며 기쁜 노래이시면 아멘입니다.

15. 16절을 봅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덥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덥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토하여 내치리라>

미적지근한 라오디게아교회를 주께서 지적합니다. 한더위에 목이 말라 물을 벌컥 마셨는데 미지근하면 상쾌하지 못합니다. 뜨겁거나 차야 시원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차가운 이성과 뜨거운 열정으로 무장돼 예지의 영성으로 계발된다면 교회에서 요긴하게 쓰임 받을 것입니다.

뜨겁거나 차거나 하나님은 요긴하게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이도저도 아닌 채 미지근한 사람은 입에서 토하여 내친다고 했습니다. 내친다는 것은 밖으로 내동댕이쳐 버린다는 말입니다. 교회가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 얼마나 가련한 사람입니까? 어디서든 꼭 필요한 사람과 있으나 마나한 사람, 그리고 없으면 좋을 사람으로 나뉜다고 합니다. 미지근한 자는 내친다고 하신 말씀의 뒤엔 차거나 뜨거우면 내치지 않고 끌어안으신다는 것입니다. 한 번에 쉽지 않아도 꾸준히 노력하면 주께서 끌어안으시는 복된 성도가 될 줄 믿습니다. 주께서 품으시면 총체적 전인격이 구원의 감동으로 인해 모든 것 이길 수 있습니다. 결국에는 몸도 변화 받는 것 믿으시면 아멘입니다.

 

17절 읽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본문에선 스스로 풍요해 부족한 게 없다는 자가 실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 멀어 못보고 벌거벗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자신을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나를 정확히 보기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셔야 합니다. 본문은 이렇게 고백하기를 교훈합니다.

나는 너무 부족하고 모르는 것이 많아 하나님의 공급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목이 마릅니다.”

나는 눈이 약해 하나님이 안보이고 귀가 어두워 그 생명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벌거벗은 줄도 모르는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영적소경입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히브리인의 하나님께서 오늘도 히브리인을 찾고 계십니다.

 

18절 함께 읽습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불로 연단한 금을 어디서 사야합니까? 주님께 사야 합니다. 주께서 허락하시는 연단은 진리의 깨달음이며 거듭남입니다. 그렇게 해서 유난히 아름답게 빛나는 연단한 금은 혹독한 대가를 치른 순도 높은 정금입니다. 세상이 악하고 자신이 부족해 감당하기 어려운 시험을 오직 주를 바라보며 통과한 이들의 면류관은 금같이 빛나는 믿음, 지혜와 결단과 노래가 멈추지 않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작은 파도에 요동하는 일엽편주의 천박한 믿음이 아니라 겸손히 낮아진 후에 감사하는 믿음이요. 어떠한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도리어 천국을 기쁨가운데 소망하는 성숙한 믿음입니다.

 

흰옷입니다. 흰옷은 거룩한 믿음으로 무장된 승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이 흰옷으로 부끄러운 육신의 세속적 모습을 가리고 육의 근성을 압제해야 합니다. 라오디게아는 안약제조와 의술이 뛰어난 의료학교와 제약사가 있었습니다. 영안이 닫힌 자들에게는 신약구약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덧입고 바르고 먹어서 소경된 영혼을 치유 받으라고 주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19절에서는 열심을 내고 회개하라고 촉구하십니다.

20절에서 그 유명한 말씀, 우리 심령을 두드린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함께 먹고 마시기 전 먼저 음성을 듣고 문을 열라고 하십니다. 주의 음성을 날마다 듣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즐겨 원합니까? 내 음성인지 하나님음성인지 아니면 마귀음성인지 분간이 됩니까? 구분이 쉽지 않습니다. 최소한 예배 중 설교로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에 먼저 익숙하기 바랍니다. 사탄의 속삭임은 꾸준히 하나님을 훼방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음성은 비록 내키지는 않아도 자신을 낮추고 희생하며 선으로 나아가라고 촉구합니다. 용서하기 싫어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당연히 성경과 맞물려 사랑으로 연결됩니다. 아직도 성화중인 내 의지와는 전혀 다른 방향일 수 있습니다. 거듭남과 경건과 성화는 주님인도에 내가 의지적 강제의 노력을 함으로 완성됩니다. 그 완성은 지극한 평화요, 채움이요, 나눔과 기쁨입니다.

 

21절입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주님보좌에 동석은 말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그런데 그 영광은 반드시 승리자에게 허락되는 것이고 그 승리는 주께서 십자가에서 죽고 이기기까지 고난과 싸우는 싸움의 승리와도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기까지 싸워 선한 싸움 반드시 이겨야 할 이유가 바로 하늘보좌입니다.

 

영적전투에서 이기는 자마다 주의 보좌 곁에 앉는데 이 승리란 우리가 육신의 날 동안 얼마나 말씀에 순종하며 주님 기뻐하시는 그 순결과 거룩함의 삶을 살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악한 영은 순결한 자 곁에 오지 못합니다. 능력자의 삶을 원합니까? 능력은 어디서 옵니까? 순결과 거룩함에서 나옵니다. 주 앞에 순결한 자, 애쓰는 자가 혈과 육에 대한 승리자가 됩니다.

(악한 영에 잡힌 자를 놓고 기도하는데 전혀 효과가 없다. 그런데 어느 성도가 어린 조카를 데리고 들어오는 것을 본 귀신들린 자가 놀라며 소리치고 쓰러진다. “아악. 예수님 오신다.” 아이는 예배 때마다 이모가 계속 데리고 다닌 7세 꼬마였다.) 내가 내 안에 너무 많이 있어 어려운 순결,

 

22절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다>

눈앞에 아무리 아름다운 광경이 있어도 내 눈이 병들어 보지 못하면 소용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음악과 감동어린 선율이 흘러나와도 귀가 먹어 듣지 못하면 소용없습니다. 눈이 있어도 정녕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정녕 들어야 할 복음은 듣지 못하는 소경과 귀머거리들로 세상은 가득합니다. 본문은 말합니다. <귀 있는 자들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찌어다> 귀가 있어도 들리지 않을 때 즉시 마음의 귀를 열어야하는데 사람의 힘으로 어렵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정녕 하나님으로부터 임한 것이라면 우리 모두는,

1. 돌이켜 마음을 새롭게 해 열심을 내야 합니다.

미지근한 믿음을 주께선 내치신다고 했습니다. 차가운 결단과 뜨거운 열정으로 주의 기뻐하심을 받아 주님 품에 안기는 믿음이길 바라십시다.

 

2. 부요하신 이는 오직 주님 한 분 뿐이십니다.

인간에게는 부요가 없습니다. 잠시 보이는 부요는 곧 썩을 것들입니다. 썩을 부요는 진정한 부요가 아닙니다. 겸손하면 곤고와 가련함과 가난함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이 구별되어 보입니다.

 

3. 주께서 허락하시는 불로 연단한 금으로 부요해야 합니다.

우리의 연단은 주님주시는 귀한 성숙의 기회로 삼아 불평치 말고 귀한 믿음으로 잘 키워 세상이 알 수 없는 부요가운데 들어가야 합니다.

 

4. 믿음의 승리는 주의 보좌 곁에 자리를 받습니다.

영적승리는 불의 연단이 필요합니다. 순도 높은 믿음은 언제나 대가를 요구합니다.

예배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한없이 자비로우시고 선하시며 높으신 품격이십니다.

그분은 품을만한 자와 내칠만한 자를 구별하십니다. 불로 연단한 금으로 거룩함의 옷을 사 입고 눈을 뜨고 마음을 열어 하나님 음성을 따라 경건하고도 풍요롭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시기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묵상하며 기도한 후 마칩니다. 우리는 모두 행복하기 원합니다. 아버지께서 먼저 원하신 것입니다.

돌아봅니다. 진정 나는 주님께 뜨겁게 덥혀진 믿음의 사람인가? 아니면 차가운 냉철함이 있는가? 혹시 이도 저도 아닌 자는 아닌가?

내 안에 진정한 부요란 없음을 알고 오직 부요하신 주님께 늘 매어 달리는가?

살다가 혹 험한 일을 만나면 두려워 말고 그것이 불로 연단한 내 정금같은 믿음이 돼 더욱 귀한 모습으로 바뀔 것을 소망하는가? 앞으로 힘든 고비가 닥쳐올 때 불의 연단임을 알고 불평대신 감사로 맞을 수 있는가?

아버지 마음 문을 엽니다. 주 예수여 환영하오니 속히 오시옵소서. 함께 먹고 마신다는 약속이 삶과 신앙인격에서 드러나 만민이 보고 주께로 돌아오게 하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