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8.04. 주일예배 <눅18:9-14. 세리의 기도>
오늘 설교의 주제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기원과 다르고 주문과는 더욱 다릅니다. 기도는 이미 주께서 주시기로 한 당신의 증거자가 되기에 충분한 것들을 그 자녀가 약속을 붙잡고 기쁨으로 청구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하나님을 향하기 전에 주변사람들을 의식하는 자기만족의 기도였습니다. 기도는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이 그 이름으로 하나님에게 드리는 간구인데 그 안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약속하신 언약이 들어있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소개하는 바리새인기도와 세리의 기도는 오늘 우리에게 기도를 어찌해야하는지를 분명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함께 한절씩 살피며 은혜를 나누기로 합니다.
10절입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래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주님은 두사람의 극명한 대조를 끌어냄으로 기도에 대한 선명한 교훈을 제시하십니다.
바리새인은 사독계열의 사두개파와 쿰란동굴의 금욕적 삶으로 유명한 엣세네파와 함께 유대교 3대 종파중 하나입니다. 분리되다, 구별하다는 뜻의 파리스라는 말에서 유래된 바리새파는 본래 주전 2세기경에 유대가 헬라의 영향을 받아 영적으로 퇴보하는 것에 반동적으로 일어난 사람들입니다. 초기 바리새인들은 율법과 정결함과 부활과 메시아사상으로 철저히 무장돼 존경받는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은 늘 남들과는 뭔가 다르게 구별돼 거룩함을 나타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세월이 지나자 불편한 경건의 내용과 능력은 차츰 사라지고 경건의 모양만 남아서 특별히 사람이 많이 모이는데서 큰소리로 기도하기를 즐겨했습니다. 11절입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역시 따로 서서 남과 다르게 경건하다는 것을 내세우며 감사합니다.
당시 유대랍비들의 감사기도는 1)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 2) 천한 사람이 아닌 것. 3) 그리고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플라톤의 기도역시 헬라인으로 태어난 것과 여자가 아닌 남자로 태어난 것, 그리고 철학자가 된 것을 감사드렸습니다.
본문의 바리새인은 먼저 몇 가지 악행하는 자들과 같지 않다는 것과 세리와도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기도는 물론 감사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감사의 내용에서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빠졌다는 것은 내용 이전에 이 기도가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천박한 기도였는가를 말해줍니다. 얼른 들으면 그럴싸한 감사로 시작하지만 살펴보면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함을 소리 내서 주변에 자신을 높이는 의도가 역력하며 또 악과 죄와 허물에서 보호하신 하나님의 이름과 찬미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간섭이 없이 사람이 선하거나 귀한 일 또는 아가페의 희생적 사랑이 가능합니까?
흉내는 어느 정도 낼 수 있지만 불가능한 일입니다. 바른 기도는 자신을 죄악으로부터 구해주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높이며 찬송하고 감사를 올려야 합니다. 11절 기도를 고요하게 해봅니다. “하나님아버지, 나를 다른 이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 가운데서 구해주시고 세리만도 못한 저를 죄 짓지 않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종은 악하나 주님이 인도하셨나이다.” 여러분 언어생활에서 “나”라는 이름대신 하나님의 이름이 늘 주어가 되시기 축복합니다.
12절입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바리새인은 지금 결정적 실수를 하고 있습니다. 금식하고 십일조하는 올곧은 믿음이 순식간에 부끄럼을 당하는 순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드린 것을 자랑삼아 읊조리는 이 사람은 금식과 십일조에 자신의 알량한 이름을 걸어 놓은 사람입니다. 이사야서 58:6절과 7절에서는 금식의 복음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헌신은 하나님이 이미 보셨고 알고 계신다는 믿음이 없기 때문에 비롯되는 부끄러운 것입니다.
13절입니다. “세리는 멀리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당시 세리라는 직업은 로마의 세금징수하수인들로서 일정할당량의 세금을 징수한 뒤 그 나머지는 자신이 챙겨서 능력에 따라서는 매우 부유하게 사는 직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동족들을 힘들게 해야 하기 때문에 사람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물질은 넉넉해도 마음이 늘 지쳐있고 민족적 자존감이 떨어져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마태와 삭개오가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로서서 기도한 바리새인과 달리 세리는 멀리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기도합니다. 멀리섰다는 것은 거룩의 전, 하나님의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의 누추한 모습을 송구스럽고 부끄러워서 거룩의 집 근처에 가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향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자마다 자신은 한없이 낮아짐을 경험합니다. 다만 가슴을 치며 불쌍히 여겨달라고 할 때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앞에서 세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가슴을 치는 것이었고 유일한 말은 죄인이니 불쌍히 여겨달라는 애원이었습니다.
“감히 눈을 들어, 다만 가슴을 치며,”라는 말은 세리가 얼마나 겸손한 자세로 기도하고 있음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낮아진 자가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겸손의 결과입니다.
가끔 기도에서 “주님 이런 경우 제가 한 행위가 바른 것이 아닙니까? 저는 최선을 다 했습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경우 아닙니까? 저 악한 것들을 어찌하오리까?” 기도에 자신을 합리화하고 변명하는 내용이 들어간다면 이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협상을 하려는 매우 불손한 죄가 됩니다. 이런 기도는 믿음이 없이 협상하려는 의도가 분명한데 이런 기도의 큰 함정은 다름 아닌 창조주와 피조물의 위치를 바로 인식하지 못한 데서 출발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왜 억울합니까? 왜 항변합니까? 자신의 실정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셨고 또 아십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시고 기억하십니다. 즉시 해결이 안 된다고 항변하며 억울해 하면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는 얘기가 됩니다.
14절을 읽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여러분. 많이 낮아질수록 기도는 간절해지며 감사는 깊어지기 시작합니다. 많이 무너진 사람일수록 기도는 애절합니다. 낮아지고 무너진 곳에 새로운 성전이 세워지는 역사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성전된 우리들, 우리는 모두 예수께서 주관하시는 재건축사업에 들어갔습니다.
재건축은 일단 옛 건물을 사정없이 부수고 거기 새롭고 산뜻한 새 집을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엔 내게 어떤 것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절박함이 있어야 하며 하나님이시라면 반드시 나를 거기서 구하시리라는 확고한 신뢰감이 있을 때 기도는 응답되는 것입니다.
오늘 세리의 기도를 통해 우리는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란 어떠한 기도입니까?
첫째, 낮아질 대로 낮아진 겸손의 기도입니다.
둘째. 자신의 죄를 아파하는 통회의 기도입니다.
셋째 온전히 하나님만 바라보는 신령한 기도,, 곧 성령충만의 기도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기도는 이미 하신 약속을 붙들고 약속주신 하나님 안에 들어가는 위대한 신앙행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무더위가 맹위를 떨쳐도 다가오는 가을 앞에 버티지 못합니다. 우리네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다가오는 주님의 그날을 막지 못합니다. 겸손의 기도, 통회의 기도, 신령한 기도로 하루하루 잘 이기셔서 주향한 소망 가득한 저와 여러분 되시기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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