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21. 주일예배 <창15:18-16:3. 증거와 믿음>
[길을 찾는 이(求道者)에게 필요한 것은 때때로 자발적 절대고립의 시간들이다. 世類에 도적질 당한 시간과 중심을 되찾고 영혼의 순결을 위해 홀로 孤山에 올라 외로운 만큼 깨달은 것을 한아름 안고 짓밟힌 민초들을 구해야 한다.]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겐족속을 비롯한 열 족속의 땅을 애급 강으로부터 유프라테스 강 지역까지 매우 넓은 땅을 그 자손들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람의 자손들이 차지할 약속의 땅은 꽤 넓었고 거기 가득할 자손들의 숫자는 아주 많은 인구라야 합니다. 18-19절에서 넓은 땅을 약속받은 아브람의 가정은 그런데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가나안에 들어온 지 십년이 지났지만 아이가 없습니다. 아브람부부는 엉뚱한 데서 답을 찾아냅니다.
당시 흔한 관습 중 하나는 몸종을 통해 대를 잇는 일입니다. 기다리다 지쳐 하나님의 약속을 부부가 임의로 해석하는 우를 범해 사래는 자신의 몸종을 남편에게 드려서라도 씨를 얻고자 합니다. 이렇게 아브람의 첩이 된 사래의 몸종 애급여인하갈이 아브람 가문에 입성한 것은 아브람부부가 불신가운데 합의해 이뤄진 실수였습니다. 정황을 살펴보면 충분히 그럴 법한 일입니다. 오늘 설교제목, 증거와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히브리서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11:1)입니다.
1. 바라는 것들의 실상
바라는 것들을 우리 믿음 안에서 분명히 이뤄질 것을 믿어드림으로 실제로 이뤄지는 것을 삶에서 경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21:22에서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고 하십니다. 믿고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통 주실 것, 즉 받을 것에 초점이 맞춰지면 얇은 기도입니다. 주님 마음에 드는 기도는 구하는 것보다 구하는 것을 주실 수도 있고 미룰 수도 있는 주님에게 맞추어 올리는 기도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일입니다. 정녕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신뢰한다면 주셔도 안 주셔도 변함없이 기도를 받으신 하나님을 찬미하며 즐거이 노래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를 더 좋은 것을 그 분은 이미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기도했는데 아무 일도 안 일어날 때가 흔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기도는 다 받으신 것 믿습니다. 항상 문제는 우리 인간에게 있는데 그것은 신뢰와 관련합니다. 주님을 신뢰한다면 기도 후 상황에 상관없이 감사와 찬미를 드려야 합니다. 진정 주님을 신뢰한다면 기도의 내용을 주님이 더 잘 분석하시고 거기 맞춤형으로 응답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보이는 물질보다는 안 보이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앞서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뭐하고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을 이미 받은 것입니다. 받으신 주님 손 안에서 이미 우리의 기도는 응답이 진행 중인 것을 믿고 기다리며 기쁨으로 영광과 감사와 존귀를 올리면 완성된 기도입니다.
본문은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언약을 세우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언약을 믿고 기다리던 중 끝까지 못 기다리고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치 못해 실수하는 아브람을 우리는 봅니다. 겐 족속을 포함한 열 족속의 땅을 모두 아브람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그 약속은 다윗의 시대에 와서야 이뤄집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람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아브람보다 더 나은 신앙인이라고 말하기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약속하신 열 족속의 기름진 땅은 천년하고도 20여년이 지난 뒤에 이뤄졌고 아들을 주신다는 약속은 25년이 지난 뒤에 이뤄집니다.
저와 여러분이라면 넉넉하게 기다릴만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2.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
눈에는 안 보여도 실존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영적 확인창구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실존의 증거로서 충분합니다. 다만 기다리지 못하면 그것은 신기루에 불과합니다.
6절에서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그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의로 여기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믿음만큼 역사하시는 분이신 줄 믿고 아멘입니다.
확인하고 믿는 것이 세상의 믿음이라면 성경적믿음의 원리는 그것과는 달리 먼저 믿어 들인 후 분명히 확인되는 것입니다. 여러 번 반복 설명된 이 원리는 그만큼 중요합니다.
눈에는 안보여도 믿음으로 사실을 인정하고 확신하는 것은 이미 분명한 증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증거는 그러려니 생각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하나님이 신령한 능력을 부어주셔서 마음의 문을 열어주실 때 비로소 확신이 생겨 분명한 사실로 받아들이고 그것은 하나님이 마음속에서 증거하시는 일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은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은 한번 실패했습니다. 25년이란 세월 속에서 늙은 아내의 몸이 아니라 아내의 몸종을 통한 응답일 거란 생각, 그러나 25년이 아니라 1020 여년이 지나도 하나님의 약속은 엄숙히 지켜집니다.
가나안땅에 아브람이 거한지 10년 만인 85세에 애급여인하갈이 아브람의 첩이 되어 이스마엘을 잉태한 후 다시 14년이 지나서야 사래가 이삭을 잉태하게 됩니다. 결코 쉽진 않겠지만 만일 아브람부부가 미련할 정도로 무던하게 더 기다렸더라면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은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날 언약으로 태어난 약속의 자녀 이삭의 후예와 무분별과 육체의 열매로 태어난 이스마엘의 후손들은 끊임없이 국제사회의 문제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2011년 9.11미국 뉴욕의 쌍둥이빌딩이 마치 영화처럼 무너지는 사건은 이삭과 이스마엘 후손이 벌이는 끊임없는 싸움의 일부분입니다. 또 일명 PLO라고 불리는 팔레스틴 해방기구의 지속적인 블레셋 인들의 땅 찾기 투쟁도 봅니다. 오늘 날 성경의 예언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적중돼가는 가운데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믿음은 추상이 아닙니다. 그리고 믿음의 본질은 적극적의지도 아닙니다.
믿음의 기초는 사실과 증거와 신뢰입니다. 십자가는 실제 역사의 한 사건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3. 확실한 증거가 있으면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도를 다른 말로 예수그리스도의 증인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증인은 두 눈으로 분명히 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증인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확한 증거입니다. 성경은 예수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증거하는 책인데 하나님은 달리 누가 보증할 자가 없어서 자신을 두고 맹세하시고 선포하고 증거하십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성경에 증거한 모든 것을 믿습니다. 롬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여기에 핑계치 못할 객관적인 자료가 충분하다는 것을 우리는 이제 압니다. 그리고 예배합니다.
1) 피조만물과 그 섭리로 인해 창조주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열어주셔야 생기는 믿음은 우리의 이성과 분별력으로도 넉넉하게 하나님의 실존에 대해 인정해드릴 충분한 이유가 넘칩니다.
2) 자기 자신만큼 분명한 증거는 없습니다. 자신이 태어나 살고 있는 것부터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비롯해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이 기적이고 신비이며 하나님의 증거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는 것이 하나님 살아계신 큰 증거입니다.
3) 증거의 결론은 예수그리스도의 나라(주권.영토,국민)로 모아집니다. 어떤 사연도 이야기도 지식과 이론도 다 예수의 보혈을 통과해 복음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실체가 없는 허상에 불과합니다.
확실한 증거는 확실한 믿음을 세우고 확실한 믿음은 하나님을 그만큼 기쁘시게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믿음이 없어 흔들리는 갈대처럼 약한 우리가 아니라 분명한 증거위에 세워진 믿음으로 더 이상 두려운 세상이 아니라 깨워줘야 할 가여운 주변인 것을 알고 기도부터 쌓아야 할 것입니다.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체험한 후 그 증거는 평생 죽음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순교로 이어집니다.
마른 장작과도 같은 몸에서 약속이 이뤄져 이삭을 낳은 아브라함부부도 그 증거로 모리아 산에서 외아들을 바침으로 믿음의 조상이 됐습니다. 그리고 다메섹 길 위에서 주의 음성을 친히 들은 사울청년도 그 증거로 인해 평생 몸을 바칩니다.
뚜렷한 증거는 뚜렷한 고통을 수반합니다. 은혜의 복음시대를 여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죽음과 고통을 감당하심으로 우리는 뚜렷한 증거를 받되 편하게 받고 있습니다. 그냥 믿기만 하면 되는데 놀랍게도 무수한 증거들이 뚜렷합니다. 예수그리스도와 믿음의 선조들이 여러 정황적 증거와 실체적 증거 그리고 역사적 실체를 증거로 주셔서 이제 우리는 마음으로 믿어 의에 다다랐습니다. 다만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증거, 이것도 믿을 때 증거이지 믿지 않으면 전설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힘쓰고 애쓴 만큼 주님은 도와주십니다. 확실한 증거위에 하늘의 놀라운 비밀을 품은 채 기뻐하며 승리의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이길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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