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29. 주일설교<눅 17:11-19.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성결로 가는 중요한 하나는 자신 안에 구원받을 만한 아무 근거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아가 절감하는 것이며 그 근거는 죽기가지 사랑하신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까지도 아는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알기는 아는데 절박하지 않다.”는 것이고 절박감의 결여는 풍요함에서 온다. 핍절한가? 기뻐하고 감사하라. 성결로 가는 기회이다. 풍요는 성결 후에 와야 제자리를 찾는다.]
갈수록 기상이변으로 인해 찜통더위와 살인추위로 사람들이 지구곳곳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찜통더위, 뭔가에 깊이 몰두하고 빠지면 언제 여름이 지난 줄도 모르게 가을이 다가오고 두터운 겨울옷을 꺼내야 할 때가 금방 옵니다. 몰두(沒頭)란 머리, 곧 어떤 것에 마음과 생각이 빠져버린다는 뜻인데 우리가 몰두할 대상은 수명 짧은 유행의 물결처럼 천박하지 않습니다. 세월이 가도 변함없는 최고의 가치, 진실하고 멋지고 아름다운 것, 여러분의 삶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오직 하나 다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 하나님의 복음 예수그리스도뿐입니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8:22. 추워도 더워도 가난해도 부유해도, 어둔 밤이든 환한 낮이든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인생을 결코 낭비하거나 실패하지 않습니다. 바른 답이 있기 때문입니다. 17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않았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 은혜를 모르는 아홉 문둥이같은 세상입니다.
사람들은 뭐든지 알고자 합니다. 더 많이 아는 것이 더 많은 것을 지배하고 차지하는 정보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보가 돈이란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녕 먼저 알아야 할 것이 뭔지 알지 못한 채 별로 소중하지 않은 일에 평생을 매달리기도 합니다. 알아야 할 일에도 순서가 있습니다. 반드시 알아야 하고 먼저 알 게 있는데 이것이 바로 자신의 정체성, 자신의 신분입니다. 내가 누군지를 아는 일은 인생을 낭비하지 않게 합니다. 나를 바로 알면 내가 만나야 할 사람들이 누구인지, 피해야 할 사람들이 어떤 부류의 사람인가를 알게 됩니다. 채워야 할 부분과 버려야 할 부분이 뭔지 알고 속히 성숙을 위한 몸부림을 하게 됩니다. 이토록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함으로 비로소 밝혀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을 공경하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경배자로서의 존재가치를 깨닫는 저와 여러분이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먼저 우리가 어둠의 노예에서 복음예수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생명이라는 구원의 사실 앞에 뜨거운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우리는 다 같이 죄인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알지도 못하고 그래서 감사조차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열사람이 다 치료를 받았는데 그 중 아홉은 어디 있냐고 주님은 감사를 모르는 자를 지적하십니다. 문둥병은 당시 흔한 병이었지만 어떤 질병보다도 지저분한 불치병이며 더 괴로운 것은 가족들과 떨어져 살아야 하는 외로움이었습니다. 꾸준히 죽음으로 향해 얼굴이고 손발이고 어디고 할 것 없이 몸이 한 조각씩 떨어져 나가도 감각조차 없는 무서운 병, 열사람 나병환자들, 희망 없는 죽음의 골짜기를 가던 자들이 한줄기 희망의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혹시 고칠 수만 있다면 그것은 사형집행 직전에 풀려나는 감동 그것일 것입니다. 13절입니다.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거늘” 이겁니다. 주님 앞에 가장 먼저 아뢸 한마디, 먼저 우리를 불쌍히 여겨 달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를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이 우리가운데 능력의 말씀으로 임하시는 중입니다. 말씀은 치유의 빛이요, 채우시는 지혜와 담대함과 겸손과 온유의 권세인줄 믿고 아멘입니다.
그런데 열사람 문둥병 환자 중 아홉은 치료 후 감사하기를 잊고 나타나질 않습니다. 저주받은 몹쓸 병에서 고침을 받은 뒤 까맣게 잊고 제 길로 가는 아홉 문둥병자처럼 세상은 그렇게 은혜를 잊고 살아가는 배은망덕의 진흙구덩이입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모르는 세상에 태어나 구원받은 특별한 소수의 무리 가운데 거룩한 교회를 이룬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인가? 구원은 받았지만 아직도 몸은 세상가운데 있고 고단해도 구원과 감사를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찾아 예수의 복된 소식을 전하는 이 일이 우리의 기쁨이요 인생의 목적인 것입니다. 15-16절입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려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열에 하나가 돌아와 감사하는데 그는 저주의 땅 사마리아에 사는 자였습니다.
2. 감사하는 한 사마리아인 환자처럼 교회는 늘 감사로 엎드려야 합니다.
천국과 영생의 소망이 없는 인생도 감사할 이유는 충분히 있습니다. 일반은총 가운데 지천에 널려있는 게 다 감사거리입니다. 하물며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받은 우리겠습니까? 은혜를 모르는 사람에게 더 이상 은혜로운 일은 없지만 감사로 은혜를 아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됩니다. 본문에서는 병고침에 엎드려 사례하는 한 사람이 사마리아인이었다고 증거합니다. 사마리아는 소외된 저주의 땅입니다. 늘 떳떳하지 못하고 순수혈통과 정통신앙이 무너진 부끄러운 불명예로 수치의 땅이었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항상 열등감에 사로잡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 앞에 엎드린 것은 바로 이곳 사마리아출신의 문둥병자였습니다. 오욕의 땅에서 병까지 걸려 이 사람의 처절한 인생은 삶을 저주하며 한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처참하게 낮아지고 무너진 사람만이 취할 수 있는 엎드림, 이 겸손한 문둥병자가 주님의 칭찬을 받고 구원받았습니다. 아홉은 비록 치료받았으나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제사장에게 확인받은 뒤 돌아와 엎드린 한사람, 사마리아인 환자는 치유도 받고 영혼도 구원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본문에서 저주에 잡힌 문둥병환자가 치유받은 것은 실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더욱 기쁜 것은 그 영혼이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눅 10:20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들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복된 어떤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혼의 구원이라는 것을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19절입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지금도 허다한 불치병이 영혼구원과 무관하게 회복되는 것을 봅니다. 즉 영혼구원 없이도 몸의 병은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몸이 있는 동안에만 그 기쁨을 갖습니다. 결코 영원하지 못합니다. 본문의 아홉 환자들은 구원과 무관한 치유를 받았습니다. 예수의 영이 안 계신 세상은 결코 구원을 모른 채 복음과 무관히 병도 걸리고 낫기도 하면서 지옥을 향해 열심히 자못 진지하게 갑니다. 그러나 성도의 치료는 그 치료가 영혼구원의 증표라는 사실에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은혜모르는 아홉 명과도 같은 세상에서 성도는 골라 뽑아 구별된 무리라는 본질적 존재의미를 잊어선 안 됩니다. 즉 세상 사람과는 분명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바울사도는 고전15:10절에서 고백합니다.
우리가 슬프나 기쁘나 이렇게 존재한다는 것은 오직 우리를 이 땅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모든 존재물은 존재하게 한 이유를 위해서 존재해야 합니다. 산도 강과 바다도 구름도 꽃도 나비도 바위도 보이지 않는 바람조차 모두 거기 그렇게 있게 하신 하나님 때문에 있는 것이고 하나님을 증거하며 있습니다. 모든 만물은 만물을 있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들이라는 것입니다. 마21:22절입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3. 감사로 엎드린 사마리아인을 기뻐하십니다.
성도의 진정한 능력은 믿고 엎드릴 때 나타납니다. 진심으로 의심 없이 엎드릴 때 영광의 주님을 만납니다. 지금도 함께 일할 자를 찾으시는 주님은 엎드리는 겸손한 자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왜 영리한 능력자보다는 온유한 순종의 사람을 더 기뻐하실까? 지혜와 능력은 주님께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은 하나님의 명령을 잘 받들고 그분과 함께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도우시며 심령 깊은 곳에서부터 기쁨이 샘솟게 하시는 것을 경험하시기 축복합니다.
성도에게 기도란 말은 수도 없이 듣고 도전받게 되는 평생의 거룩한 부담입니다. 기도를 여러 가지로 정의하는데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기도가 사귐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사귐의 시간을 갖는 것이 기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종종 진실하게 엎드리는 것은 교회와 가정과 자신과 주변에 대단한 유익을 끼칩니다. 하나님과 사귀어 가까워진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런 모든 유익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과 깊은 사귐을 갖는다는 것, 그것은 세상의 어떤 것도 막아주시고 이겨내게 하시는 주님 안에 깊이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과의 교제가 깊을수록 하나님의 품 깊은 곳에 들어가게 되니 지극한 평강입니다.
도봉산 백운대는 휴일이면 줄을 이어 올라가는 인파로 북적입니다. 열심히 올라가던 일행이 갑자기 닥친 먹구름이 보나마나 소나기라 피할 곳을 급히 찾았습니다. 지리에 익숙한 한 사람이 바로 앞에 큰 바위 틈이 있으니 서둘러 거기까지 어서 가야한다고 합니다. 한참 지쳐갈 때였지만 모두들 헐떡이며 속도를 냈습니다. 잠시 후 바위틈에는 깊이 들어가 앉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입구에 간신히 들어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기어코 무서운 돌풍과 함께 장대비가 쏟아졌습니다. 늦게 올라와 입구에 자리한 친구들은 옷이 다 젖고 안쪽사람을 덮어주는 역할만 했습니다. 그러나 간발의 차이로 먼저 들어와 안쪽에 있던 사람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비를 고스란히 맞아야 하는 동료들을 짓궂게 놀려댔습니다. “뭐야, 우린 복도 지지리 없어요. 저 시원한 비한방울 못 맞고 여기 처박혀 있으니.”
하나님의 품, 하나님의 궁정 깊은 한 가운데에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시길 바랍니다. 비바람 치는 문 입구가 아니라 깊숙이 들어가 더욱 아기자기한 곳에서 깊은 사귐으로 보장받은 이 땅과 저 하늘의 놀라운 소식으로 가슴 뛰는 삶이길 바랍니다.
기도합니다. 우리는 모두 큰 죄악에서 구함을 받고 고침 받은 열 명의 문둥이들이었습니다. 이제 그 구원에 감격하여 속히 주 앞에 돌아와 엎드림으로 칭찬받고 영혼의 구원까지 받아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한사람 문둥이처럼 거룩함의 길이 날마다 우리 앞에 열리게 하소서. 하나님을 멀리하고 죄악된 멸망의 길로 가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돌아와 기꺼이 엎드려 주님의 귀한 사람으로 주님의 깊은 궁정가운데 살며 복되게 쓰임받게 하실 예수님만 찬양합니다. 아멘.
'주일강단'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9.07.21. 주일예배 <창15:18-16:3. 증거와 믿음> (0) | 2019.07.23 |
---|---|
2019.07.07. 주일설교<민9:1-5.유월절, 그날을 기억하라.> (0) | 2019.07.07 |
2019.06.23. 주일예배(빌립보서 2:19-30. 디모데와 에바브라디도) (0) | 2019.06.23 |
2019.06.16.주일설교<창10:1/6-9. 셈과 함과 야벳의 후손들> (0) | 2019.06.16 |
2019.06.09. 주일예배<사41:9-10. 하나님이 잡고계신 교회들> (0) | 2019.06.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