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일강단

2019.06.16.주일설교<창10:1/6-9. 셈과 함과 야벳의 후손들>

by 설렘심목 2019. 6. 16.

2019.06.16.주일설교<10:1/6-9. 셈과 함과 야벳의 후손들>

[586-2:고상하고 아름답다. 진리 편에 서는 일. 3:8.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한 개인의 품격이나 정체성을 말할 때 뚜렷하게 규정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육체로 다소 제한을 받을 수는 있으나 육체는 아니다. 그 육체를 어떤 정신으로 이끌고 살았는지 살필 일이다. 비록 부족해도 가장 고상하고 아름다우며 품격 있는 것에 자신을 드렸다면 그는 후대나 세간의 여러 평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귀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가장 품격이 있고 아름답고 고상한 것은 어떤 것인가? 여러 기준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결코 잠시 후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우리가 사라져 보이지 않는 그때도 분명하게 증거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50만년의 수명을 자랑하는 다이아몬드조차 비교할 수 없는 영원을 한 손에 쥐고 계신 창조주 유일하신 하나님께 온 삶과 열정과 모든 것을 바쳐야 하는 이유와 그 증거가 내겐 너무나 선명하다.

내 자랑은 이 하나로 족하다. 내게 주신 이 증거자의 삶보다 위대한 인생은 없다.]

 

노아의 후손들은 각기 퍼져나가며 확산돼갑니다. 노아의 저주와 축복을 살펴보면 이는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허물을 덮는 자와 허물을 소리쳐 밝히는 자의 자자손손에게 펼쳐지는 하나님의 광대한 교훈적 드라마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원의 백성들을 바르게 키우시는 데에는 생각보다 냉혹하십니다. 허물을 덮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극명한 대비를 통해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과 개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오늘 날 셈의 후손은 메소포타미아를 중심으로 퍼진 중근동지방의 일부민족인데 기원전 2천전에 이미 알파벳을 창안하기도 한 황색인종입니다. 그리고 함의 아들 구스와 그 아들 오늘 본문의 니므롯은 바벨탑을 쌓은 후 후에 바벨론을 일으킨 대단한 인물로서 블레셋의 조상이기도 합니다. 기억할 것은 노아의 예언대로 이스라엘이 가나안정복 후 셈족의 침략으로 셈의 노예가 되었고 야벳의 공격으로 야벳의 노예가 되기도 했는데 지금은 주로 아프리카에 퍼져있습니다. <야벳은 훗날 아리안계의 게르만족, 에스파뇰계열, 로마, 그리스, 이탈리아로 이어짐>야베스의 기도 대상4:19. 복을 주시려거든 지역을 넓힘, 환난을 벗어남. 근심이 없음.

 

1. 기름진 땅에서 번창하는 함의 자손들입니다.

 

역사상 첫 용사 니므롯은 여호와 앞에 용감한 사냥꾼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여호와 앞이라 함은 코람데오가 아니라 맞서다.”는 의미로 여호와를 대적하려 그 앞에 서 있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여호와께서도 기억할만한 겁 없는 대적자란 것입니다. 용감한 사냥꾼이란 보통의 범주를 넘어선 사냥꾼인데 단순히 짐승을 잡는 사냥꾼을 보통 사냥꾼이라고 한다면 용감한 사냥꾼은 사람과 사람의 영혼, 그리고 타민족까지 탐내어 매우 호전적이어서 여호와 앞에 거슬리는 공격형사냥꾼입니다. 당시 용사를 사냥꾼이라 했는데 니므롯이 특별하고 용감했다는 것은 짐승을 사냥하는 게 아니라 사람을 따라가 족쇄를 채어 노예를 삼고 부락과 민족을 점령함으로 결국 포악한 통치자가 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니므롯은 이름의 뜻이 대적자란 뜻인데 그만큼 인간포획으로 강력한 제국의 통치자가 돼 철저히 인본문화를 싹 트게 한 영웅입니다. 니므롯, 곧 가나안의 지경가운데 소돔과 고모라가 들어있다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풍요로운 가운데 기름지게 살며 번창해 나갔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저들은 일찍이 할아버지 함이 증조부 노아에게 지독한 저주를 예고 받은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함의 아들 가나안은 축복이 예언된 형제민족들과는 분명 다른, 일단의 각오와 근성으로 다져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함의 손주 니므롯에 의해 두드러지게 나타나 니므롯은 타고난 특별한 능력과 근성과 결기에 의해 함의 가문에서는 보기 드문 영웅이었습니다. 뛰어난 리더쉽과 카리스마 넘치는 됨됨이는 주변을 제압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바벨탑을 건설한 것도 후에 바벨론이란 강성대국의 시작도 니므롯의 영웅다운 활동의 결과였습니다.

물론 셈과 야벳도 번성하지만 분명한 것은 함의 번성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가까이서 불신 중에 풍성한 자를 봅니까? 그래서 힘들 때 자신의 성숙에 대한 살핌은 어디서 출발해야할까? 당장 아픈데 먼 하늘나라약속만 바라봐야 합니까? 말씀대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는 믿음의 실체와 능력을 어떻게 붙잡아 예수의 부활승리를 증거하며 실감하는데 까지 갈 것인가? 말씀에서 얻는 귀한 결론에 힘을 내는 신앙인 되기 원합니다.

 

2. 번창한 가나안은 하나님의 대적이 됩니다.

 

함의 아들 가나안은 할아버지의 허물을 덮지 않고 형제들에게 말한 자였습니다. 함의 자손들을 살펴보면 훗날 하나같이 이스라엘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민족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대적 가나안이란 말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이라는 표현은 묘한 대비를 이루는 말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함이 먼저 차지합니다. 아름다운 가나안복지가 약속의 백성에게 돌아가지 않고 저주받은 함이 차지합니다. 미리 일러드린다면 현재 아프리카 전역을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 가끔 듣는 내용을 진지하게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주님처럼 힘들고 서럽고 두려운 일들은 내가 다 안고 후손은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원하는가의 문제입니다. 물론 누구나 불행은 내가 감당하고 좋은 건 다 후손에게 주길 바라지만 그것이 내가 떠난 먼 훗날이라면 우린 무감각해집니다. 즉 인간의 사랑은 시공에 제한받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시공과 무관합니다.

인간으로서는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극한 고통과 죽음을 십자가에서 통과해 우리의 사망과 죄와 저주를 한 몸에 안고 해결하신 주님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여기서 고달픈 삶에도 약속을 믿고 주를 섬기는 것,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녀와 후손을 사랑하는 일인 줄 믿으시면 아멘입니다.

악인의 누리는 풍요에 대한 저와 여러분의 반응은 인생 100년 안에서만 우리를 기준할 때 일어나는 짧은 생각이었음을 인정하십니까?

 

3. 지금 가나안은 참혹하게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시간표와 우리들의 세월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 그 우렁찼던 가나안의 음성은 기아와 질병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흑인으로 그 땅에 태어난 것부터 모든 것이 던져진 주사위처럼 타고난 불행의 연속과 대물림을 보며 우린 성경의 어김없는 실행에서 두려운 교훈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 두려움은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하나님의 어김없는 약속의 실현이라는 데에 우리의 소망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엄중하게 선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의 노블레스 오블리쥬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 하나로 받은 이 엄청난 것을 받은 자들로서의 의무에 성실해야 할 줄 압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은 비록 불신자보다 못한 형편이라 해도 언젠가 주께서 우리를 높이실 것으로 인하여 지금 어려운 가운데 기뻐하고 감사합니까? 그 영광 우리가 못 보면 우리 후손들이 본다는 것 기쁨으로 믿습니다. 그리고 힘든 것 차라리 우리가 짊어지고 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예배하는 여러분, 셈과 함과 야벳의 소식은 한낱 노아의 후손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이 현실 속에서도 함과 같이 종의 길을 가는 인생이 있고 여호와를 찬송하는 셈의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있고 셈의 장막에 거하는 야벳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길을 가고 있습니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하나님이 보장하신 약속

의 길입니다. 한 치의 오차와 빈틈도 없는 하나님 예수의 손을 잡고 복음으로 가는 영원한 생명의 길입니다.

 

廉恥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 청렴하고 곧아서 부끄럼을 안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저는 주님 앞에 이 종이 최소한의 염치를 갖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이 엄청난 구원을 종종 잊은 채 불평과 스트레스에 심심치 않게 눌리기 때문입니다.

감사 외에 할 말이 없는 자인데 이것은 염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감동의 믿음만큼 우리는 헌신할 수 있고 그 믿음만큼 성경도 열리고 열린 만큼 변화 받습니다. 예배승리, 인생승리의 시작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능력의 삶을 살기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