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28. 주일예배 <애3:33. 하나님의 본심>
앞을 못 보는 엄마가 예쁜 딸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딸도 앞을 못 보는 장애인으로 태어났습니다.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억누르며 딸을 키웠습니다. 서로 앞을 못 보아 너무 힘들었습니다. 일찍이 엄마 스파이어즈는 딸을 고아원에 입양시키고 다른 남자를 만나 재혼했습니다. 십여 년이 지나 딸이 20세가 되었을 때 그 때까지 마음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 엄마는 딸을 수소문해 가까스로 찾았습니다. 엄마를 원망하며 어린 시절을 보낸 딸 클로디어는 그래도 한번은 만나야겠다고 생각해 서로 만났습니다. 엄마라는 여자는 얼마나 뻔뻔스런 말을 하려나? 긴장된 순간, 엄마는 손으로 딸의 얼굴을 만지며 말합니다. “오, 클로디아. 많이 컸구나. 이렇게 예쁘게 컸구나. 고맙다. 미안하다.” 클로디아는 그제야 엄마도 자신처럼 앞을 못 본다는 사실을 알고 엄마를 와락 껴안았습니다.
여러분, 상대를 잘 몰라서 화가 난 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또 내 본심을 상대가 알지 못해 얼마나 답답한 적이 많았습니까? 알고 보니 그게 아닌데, 서로 본심을 모를 때 슬픈 일이 생깁니다.
오늘 듣는 말씀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본심을 제대로 알고 그 앞에 바른 자세로 살아간다면 비뚤어지고 잘못 자리 잡았던 불행의 요인들이 모두 사라질 것입니다.
오늘 본문,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시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인생들이 기뻐하며 행복한 가운데 하나님을 찬송하며 복된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근심하고 고생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과 상관없는 엉뚱한 곳에서 시작된 겁니다.
사탄의 존재목적은 무엇입니까?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게 하고 교회를 무너뜨리는 일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 되는 것을 방해하고 어찌하든 예배를 방해합니다. 이 세상뿐 아니라 저 영원한 세상의 이정표이신 예수님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해 인생들로 하여금 길을 잃고 갈팡질팡 낭비하며 불행하게 합니다.
그러면 본문을 통해 증거되는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1. 기쁨과 행복의 원천되시는 분입니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잠22:4.
하나님을 경외하면 겸손해집니다. 경건과 거듭남의 증거는 겸손하고 온유함으로 그 신앙의 깊이가 증거 됩니다. 그렇게 겸손한 자가 하나님을 경외할 때 그 결과는 재물이 풍부해지고 새 생명이 넘치며 주의 영광으로 가득한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결코 헛되지 않고 반드시 믿는 이에게 증거 되고 이뤄짐을 확신하면 그 믿은 대로 이뤄진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저와 여러분 안에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계신 예수의 영, 우리가 하나님을 어떤 무엇보다 우선해 모시고 살기로만 한다면 그분이 말씀하신 약속은 그렇게 최고로 모셔 들인 사람 안에서 활동하시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짐 중에 가장 무거운 짐, 육체라는 짐 보따리 안에 잘 간직된 하나님의 선물, 생명과 영광과 재물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육체라는 짐이 고생보따리가 아니라 선물보따리가 되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 전하지만 분명히 실수는 모두 내가 했는데 아름답고 절묘한 마무리는 주께서 하셨습니다.
왜 끝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덮으시고 편 들어주시고 위로하시며 채워주실까? 우리 안에 있는 당신의 나라, 그 형상, 곧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인한 영광과 기쁨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와 허물로 아파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허약해 만민 앞에 당당히 복음을 증거하기 어려워집니다. 사람들은 복 받지 못한 복음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인생에서 제법 돋보이는 것은 전부 하나님의 활동인 것을 깨닫는 사람은 기쁨과 행복의 원천이 예수님이신 것을 바로 아는 사람입니다.
2. 영생의 주인 되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어디까지로 알고 있느냐에 따라 두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짧은 백년이 자신의 모든 삶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또 다른 거시적 안목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거시적 안목은 영적인 안목입니다. 불멸하는 영혼의 삶이 육신의 옷을 벗은 뒤 드디어 시작되는 영원한 삶에 자신의 인생모두를 거는 사람들입니다. 이는 최고의 가치입니다. 곧 참된 단 하나의 바른 이치, 진리입니다. 허탄한 탐구자들은 잘못된 교리나 사상에 속아 백년인생 안에서 모든 결론을 내려합니다. 그러나 거기엔 하나님이 안계십니다. 진리가 없습니다. 허망한 것입니다. 전도서가 그 허무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독교의 절대가치가 무엇입니까? 여러 측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린 오늘 말씀을 따라 첫째 자비하신 하나님이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이며 다음 그 하나님이 믿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일로만 가능하며 그 외 다른 어떤 길도 없다는 점을 성경은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행4:12
겔33:11절에서 하나님은 “악인이 죄로 인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그 길에서 돌이켜 사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이라도 살려내시기 위해 육신의 옷을 입고 십자가에 오르셨는데 인생들이 깨닫지 못하고 계속 죄로 죽어가니 얼마나 마음 아프시겠습니까?
1987년 4월23일 석가탄생일에 당시 한국불교 최고의 지도자 이성철종정은 다음과 같이 법어를 발표합니다. “사탄이여, 어서 오십시오 나는 당신을 존경하며 예배합니다. 당신은 본래로 거룩한 부처입니다.” 또 1993년 11월4일 이런 양심선언을 남기며 떠났습니다.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인,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 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 도다. 둥근 수레바퀴 붉음을 내뱉어 푸른 산에 걸렸도다.” 매스컴 인용 문구입니다.
인간스스로 노력하여 깨우치라 한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가르침이었고 사탄은 본래 부처였다는 이성철종정의 선언은 불교의 실체를 매우 정직하게 말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연합된 사람들입니다. 이 짧은 인생에서 영원한 삶의 등급과 질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알고 오직 예수님과의 교제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세상 사람들과는 죽음에 대한 견해가 끝과 끝을 오고 갑니다. 저들은 죽음이 인생의 마지막이지만 우리들에겐 죽음은 다만 육신의 장막을 벗는 것뿐이며 그 후 시작되는 끝이 없는 영원한 삶에 모든 것을 다 걸고 이 육신 있는 잠시 나그네 길에서 하나님께 성실과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고후 5:1-2)
그렇습니다. 우리는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합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들의 처소는 하나님의 영원한 집이요, 주님께서 기다리시는 우리들의 본향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본심은 언제나 우리 인생들이 행복한 가운데 기뻐하며 하나님의 자녀 됨을 감사하며 늘 하나님과 교제하며 이 복된 소식을 땅 끝까지 전하며 즐겁게 사는 겁니다.
그리고 그 삶은 잠시 왔다가는 이 세상처럼 나그네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다리시고 불러주셔서 영원히 살며 끝이 없는 평안과 노래가 있는 곳입니다. 거기 우리의 모든 소망과 기대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이 가장 설레며 기대가 됩니까? 평소엔 늦게 일어나다가 소풍날은 깨지 않아도 일찍 일어나는 아이가 묻습니다. 목사님 천국엔 숙제 없지요? 입시지옥, 성인은 말합니다. 취직. 갑질, 고통, 외로움. 무시당하는 열등감, 억울함. 모함. 그리움. 아쉬운 후회. 질병.
이 놀라운 사실은 이미 전능하고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보장하셨습니다. 보장하신 주님의 뜻과 공급을 따라 기뻐하며 감사함으로 행복한 삶을 누리며 기쁨으로 나누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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