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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18.12.30.주일설교<롬418-22.성도는 무엇으로 사는가?>

by 설렘심목 2019. 1. 1.

2018.12.30.주일설교<418-22.성도는 무엇으로 사는가?>

[못마땅한 이의 모습에서 자신을 봐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도 못마땅한 자신을 보라고 주시는 기회를 안타깝게도 우리들은 종종 분노로 놓치고 만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본명은 아브람이었습니다. 큰 아버지가 열국, 모든 나라의 아버지가 된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허락하신 뛰어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에서 밝히듯 아브라함은 매우 가난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조부 나홀부터 가세가 기울어 아브라함의 부친 데라 때부터는 선조들이 보통 20후반에서 30대 초반인 것과 달리 70이 돼서야 간신히 총각신세를 면합니다.

아브라함은 장가를 간 후에도 여전히 가난하였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75세의 나이로 식솔들을 데리고 고향집을 떠날 때 정한 곳이 없이 하나님의 약속만 붙잡고 출발했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기근에 못 이겨 애굽으로 내려가면서 아내를 누이라고 둘러대는 웃지못할 일이 두 번이나 일어납니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서 씨를 주신다는 약속을 기다리다 못해 애굽 여인 사라의 여종 하갈을 통해 언약의 자손이 아닌 육체의 자손, 이스마엘을 얻습니다. 이삭을 낳은 건 그러니까 약속을 받은 후 25년이 지나서였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99, 이삭을 잉태하기 전 해에 이름이 바뀝니다. 믿음의 조상이 되기 위해 이렇게 길고도 험한 여정을 거쳐야 했는데 그 절정은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번제로 드린 사건입니다. 25년을 기다려 얻은 외아들 이삭은 아브라함부부에게 있어서 생명 그 이상의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 아브라함은 말없이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 산을 향합니다. 오늘 설교제목이 성도는 무엇으로 사는가?”입니다. 본문 18절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하신 말씀대로 되는 것, 곧 이뤄지는 약속이 성도가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요, 권세입니다.

 

1. 성도가 살아가는 힘은 하나님의 말씀인 약속에 근거합니다.

 

인간이 태어날 때 벌거벗은 알몸 하나로 오니 이는 마치 사막에 던져진 작은 벌레와도 같습니다. 부모를 비롯한 누군가의 도움이 없었다면 인생 그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 사람입니다. 잘 알듯이 모두가 거저얻은 선물이 인생입니다. 누가 이 많은 것들을 거저 준 것입니까? 세상을 창조하셔서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고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그 말씀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셨는데 사랑이신 하나님은 선포하시는 말씀마다 결국은 사랑을 완성하는 것들로 돼 있습니다. 사랑의 완성을 약속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골고다에 나타나신 것도 약속의 성취였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사람의 약속과 같은 개념에서 보는 일이 우리에게 없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첫째 영원불변하는 약속입니다. 다음, 하나님의 언약은 시공을 초월합니다. 수천년 전 아브라함시대나 오늘 우리시대에도 시간과 공간에 상관없이 동일하게 이뤄지는 약속입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언약은 민족과 이념을 초월해서 이뤄지는 전 인류를 향한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곧 언약의 백성과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인 약속에 근거하여 존재하고 그 언약에서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본문 18절 앞에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라고 그의 믿음을 증거합니다. 여기서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는 믿음은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그 말씀에서 힘을 얻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20-21절을 함께 읽습니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 성도가 살아가는 힘은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믿음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약속이 약속으로 그 가치를 지니려면 그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지켜진다는 불변의 보장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사이엔 이 보장이 불안해서 여러 가지 안전장치를 하지만 결국 완전하지 못합니다. 생명이 유한하니 죽은 뒤엔 그 약속이 무력해 인간에게는 결코 완전한 약속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영원에 이르기까지 계시니 하나님과의 약속은 영원불변의 약속입니다. 본문에 아브라함은 믿음이 없는 자처럼 약속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견고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했다고 합니다. 즉 뛰어난 믿음의 첫 조건은 어떤 경우에도 의심하지 않는 순도 100%의 순백색 믿음입니다.

 

19절에는 그가 나이 100, 아내 사라의 나이 90에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잉태와 출산이란 사건을 사람의 생각으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언약으로 받아서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백발의 노인, 이 노부부의 몸은 이미 늙어 잉태와 출산기능이 멈춘 지 오래입니다. 아이가 생긴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아브라함의 믿음을 아브라함의 의로 여기셨으며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의롭게 여기시기 위함이라고 22절에 증거합니다. 우리의 의는 행위에서 온 것이 아니라 의로우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오는 칭의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신 이유입니다. 25절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하나님은 왜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까? 우리의 범죄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심으로 우리의 죄값이 깨끗하게 청산됐는데 그렇다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이유를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25절 끝입니다.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 나셨는니라.”

 

십자가는 우리들의 믿음을 완성하여 구원을 이루며 선악과를 덮어버린 생명나무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아담의 역사적 비극은 이제 두 번째 아담인 예수그리스도께서 오르신 십자가, 곧 생명나무에서 해결돼야 합니다. 선악과는 불순종의 열매로 믿지 않고 따져 헤아리는 불신의 열매요, 생명과는 따지지 않고 믿어드리며 순종할 때 주어지는 영생하는 십자가의 부활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백성들도 세상 사람들처럼 불행한 일과 실패를 당할 수 있습니다. 열악한 환경과 힘겨운 씨름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영원한 생명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십니다. 그를 믿는 믿음으로 세상 이길 힘을 얻습니다. 이는 구호나 고백에 그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현실이요,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결과도 현실입니다. 본문 22-24절은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그 믿음이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됐다고 합니다. 그리고 의인, 곧 성도는 오직 믿음으로 산다고 성경은 정의하고 있습니다. 백세가 다 되도록 대를 이어 유업을 받을 자녀가 없는데다 심하게 가난했던 아브라함의 절망적인 가문, 그런 가문에 뭇별처럼 셀 수 없는 많은 후손을 주신다고 했는데 백발의 부부에게 일어난 기가 막힌 일들,

성도여러분. 생각은 자신을 움직이게 하지만 믿음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일하시게 합니다. 내가 움직이는 것과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돕지 않아도 잘 되는 것들, 눈에 드러나고 간절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 안에 감사는 있지만 믿음이 요구되진 않습니다. 믿음이 요구되는 것은 대부분 보이질 않고 간절히 바라되 보통 인간의 능력 밖의 일들입니다.

인생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손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들로 꽉 차 있습니다. 예컨대 배가 고프다는 식욕은 감사할 일이지 믿음이 요구되진 않습니다. 그러나 배가 고파 뭔가 먹고 싶을 때 식욕을 채울 음식은 눈에 뵈지 않습니다. 이것은 의지적으로 찾아서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돈도 없고 음식도 구할 수 없는 곳이어서 인간의 의지와 노력이 소용없는 곳이라면 그는 굶어죽지 않기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감사와 감사기도를 할 순 있어도 믿음으로 간절히 구하는 간구의 기도가 절실하지 않은 경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나만 더 예를 들어봅니다. 가족과 나지막한 산에 가서 계곡에 갔습니다. 산세가 아름답고 물이 시원해서 그들은 감사의 기도를 합니다. 감사의 기도도 믿음으로 하지만 아직 그들에게 절실한 것을 믿음으로 구하는 간구의 기도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밤새 물이 불어나 고립돼 심각합니다. 구조요청을 하려해도 폰 배터리가 나가서 그냥 두려움에 행여 있을 수 있는 인기척을 기다립니다. 불을 피워 연기를 내보지만 모두 젖어 불도 안 붙고 연료도 다 떨어져가고 시시각각 위험이 다가옵니다. 소리쳐도 메아리만 돌아오고 어린 자녀들의 몸이 아파옵니다. 이제 이들은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의 도움을 청합니다. 이 기도는 가족의 생존을 걸고 드리는 절박한 기도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럴 때 무엇으로 산다고 합니까? 성도가 살아가는 힘, 살아날 수 있는 힘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에 근거한다는 것입니다. 태가 말라붙은 지 오래지만 아브라함부부는 과학을 뛰어넘는 능력의 주님을 단순하게 믿었습니다. 이것저것 헤아리고 분석하면 믿음은 사라집니다. 분석은 과학적이고 상식과 경험으로 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지극히 명료하고 단순한 것입니다. 어찌 그런 일을 믿고 기다리냐며 하면 그냥 그가 하나님이시니 믿노라.”고 말해야 합니다. 끝으로 성도가 살아가는 힘은 말씀에 사로잡히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3. 성도가 살아가는 힘은 성령의 능력입니다.

 

사도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여기 사도들에게 죽음조차 두렵지 않게 했던 것은 성령의 능력이었습니다. 힘든 세상에서 낙심치 않고 절망과 슬픔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유일한 성도의 능력은 땅 끝까지 우리를 인도하실 성령의 능력입니다. 성령의 충만하심이 그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성령이 임하고 우리가 순종하면 못 이룰 어떤 일도 없습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이 친히 사도들을 사용하셔서 일하는 기적의 사건들로 모든 지면을 채웁니다. 인간충만, 계산충만, 세상충만이 변하여 말씀충만, 예수충만, 하나님주권충만 곧 성령충만이 되기 바랍니다.

 

주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어떠한 것보다 먼저 성령의 임재를 간절히 구하시기 바랍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신이 여러분 안에 깊이 들어오시기를 간곡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은 간절히 원하는 여러분 안에서 여러분과 함께 세상 이길 힘과 평강과 기쁨을 주십니다. 함께 기도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4:6-7). 너희가 내안에 거하고 내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14:7).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5:18).” 살아계신 주여. 오늘 말씀가운데 능력으로 우릴 찾으신 주님을 송축하나이다. 우리 안에 계셔서 늘 우리와 함께 하사 성도의 찬송과 기도와 아픔을 다 받으셔서 주님의 놀라운 계획을 드러내는 일이 되게 하실 줄 믿습니다. 한해를 마무리하며 마음의 옷깃을 여밀 때 주의 영이 힘께 하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