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02. 주일예배 <창8:20-22. 예배를 받으신 하나님의 결정.>
성경의 귀한 인물들을 보면 먼저 동일한 한 가지가 발견되는데 그것은 무엇이 시작되기 전에 항상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야곱이 그랬듯이 오늘 본문의 노아도 홍수 후 땅을 밟자마자 먼저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았다는 것입니다. 기억나기로는 추수감사절의 시조인 신대륙의 청교도들, Pilgrim Fathers도 고난의 항해 끝에 배에서 내리자마자 예배부터 드렸고 예배당을 먼저 지었고 예배드린 그들을 통해 하나님은 세계에서 제일의 강대국 미국을 세우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 기독교는 청교도적 초심을 찾아 경쟁하듯 푯대를 오직 예수, 하나님우선으로 나아갑니다. 그렇습니다. 언제나 먼저 하나님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잊지 않으시고 그들과 그 자손들을 품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이러한 의로운 신앙고백을 받으시고 귀한 결단으로 약속하십니다. 그 언약가운데 저와 여러분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복음이요, 오직 주님의 사랑이라는 말 외 설명이 안 됩니다.
대홍수로 땅을 저주하셔서 모든 생명을 쓸어버린 하나님의 분노는 노아의 제사에서 그 향기를 받으신 후 가라앉았습니다. 다시는 사람으로 인해서 땅을 저주하지 않으시겠다고 결단하신 겁니다. 한절씩 살피면서 노아로 시작하는 홍수 후 새로운 인류의 역사가 어찌 시작되는지 보면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기로 합니다. 먼저, 18-19절을 보면 모든 짐승들과 노아의 가족이 방주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0절을 읽습니다.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에덴이 사라지고 새로 시작된 인류의 역사, 하나님 앞에 먼저 단을 쌓았다는 것입니다.
1. 노아는 방주에서 나와 땅을 밟은 뒤 맨 먼저 단을 쌓았습니다.
노아는 함께 구원받은 모든 짐승과 새 중에서 가장 정결한 것으로 구별하여 하나님께 번제로 제단에 드렸습니다. 구약의 제사법에서는 한결 같이 모든 초태생과 첫 열매는 하나님의 것으로 규정하여 하나님께 드리라고(출13:12) 되어 있습니다. 초태생은 첫 열매를 의미하는 것 외에 초심과 최선, 그리고 첫 고백과 첫 발길을 뜻하기도 합니다. 어떤 일 앞에서 맨 먼저 무엇을 떠올리며 무엇을 결단하며 누구의 이름을 입술에 붙이는가를 말합니다.
저와 여러분, 과연 첫 시작이나 첫 열매라고 여겨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을 기억하며 드려지거나 다뤄졌습니까? 노아는 모든 생명들이 물속에 빠져 사라지는 놀라운 현장 속에서 자신의 가정만이 구원받은 그 감격 앞에 방주에서 내려오자마자 단을 쌓고 즉시 엎드렸습니다.
성도여러분. 노아의 방주와 그리스도의 구원은 그 크기나 내용이나 감격에 있어서 우열의 문제나 크기의 문제가 아닌 꼭 같은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사실 앞에 아멘입니다. 어떤 점이 같습니까?
먼저, 죽을 자가 은혜로 살아났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입었고 오늘날 우리도 은혜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사망과 심판에서 영생과 천국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로마서의 주제는 한결같이 믿음으로 받는 의를 말하고 행위로는 구원받을 자는 하나도 없음을 지적합니다.
다음, 예배자는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풍족히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노아는 너무 풍성해서 포도주에 대취해서 수치를 당합니다. 우리도 사방을 둘러보면 어느 새 가득 채우신 것들로 자칫 부패할 수 있는 영혼을 날마다 주님 앞에 엎드려서 지켜야 합니다. 살리신 분이 공급도 하십니다. 내가 주 앞에 엎드리면 환경과 사람과 사단이 내 앞에 엎드린다는 말씀 늘 잊지 않기 바랍니다. 성도는 일어나서 분노의 칼을 휘두르기 전에 먼저 엎드려서 승리를 보장받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자주 엎드려서 깊은 묵상과 교제로 선하고도 아름다운 승리의 사람들 되시기 바랍니다.
21절을 함께 읽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2. 예배를 받으시고 마음을 가라앉히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키게 하는 인간의 예식 중 최고의 예식입니다. 번제물의 타는 향기를 맡으시고 마음을 가라앉히십니다. 그 이유는 제물이 인간의 악한 죄를 대신 한 것이고 그것, 곧 죄악이 태워져 사라질 때 하나님이 그것을 향기로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인간의 악은 일을 저질러서가 아니라 마음이 계획하는 생각자체가 이미 어려서부터, 즉 악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본문은 밝힙니다. 줄여 말하자면 인간은 악하게 태어나 악으로 살다가 죄악 속에 죽어가는 존재입니다. 죄를 지어 죄인이 아니라 죄인으로 태어나 하는 일마다 죄가 되는 인생들, 하나님이 그런 인생을 보시고 뭐라고 다짐하십니까?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라하리라.” 죽여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여서 해결되지 않는 본래 악한 인간의 구원이니 하나님께는 또 다른 계획이 필요하셨습니다. 모든 생명을 없애신 뒤 새로 시작된 인류의 구원은 제물의 죽음이 아닌 또 다른 구원을 길을 마련하시는데 매우 중요한 말씀21절입니다.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사람의 죄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는 않으신다는 것인데 이는 사람의 죄가 결국 하늘을 저주함으로 해결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늘의 저주, 즉 하늘에서 책임진다는 것입니다. 하늘이신 하나님이 예수님의 몸을 입고 직접 해결하시려는 놀라운 계획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육신을 입고 친히 죽어주시는 저주를 당하심으로 죄 값을 치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탄하시면 그 대책으로 떠올리시는 징계가 참으로 놀라운 재앙으로 준비됩니다. 그러나 그 진노를 푸시고 마음을 여시면 인자와 자비가 온 땅에 넘쳐(창8:21-) 그분의 보호가운데 들어갑니다.
우리가 경험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었습니까? 한탄하시는 가운데 만난 하나님이십니까? 아니면 자비로우신 가운데 만난 하나님이십니까? 그때마다 어떤 자세로 주 앞에 서있었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다루셨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지면에서 다 쓸어버리겠다고 하셔서 모두 수장시켜버렸지만 결국 예수님 오셔서 주를 믿는 자마다 살리십니다. 우리의 옛 자아가 회개의 눈물 속에 남김없이 죽어 사라지면 그 때 올려드린 예배의 향기를 맡으시고 영원히 죽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 새 영으로 다시 살리시는 주님을 찬미합니다.
끝으로 22절입니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3. 꾸준히 계속되는 음양의 반복, 땅의 역사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인간의 악함은 징계로 해결되지 않음을 보신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이키신 후 이 땅에는 어둠과 밝음이, 추위와 더위가, 심고 거둠이, 밤과 낮이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습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7:14” 결코 명료하게 해석될 수 없는 삶의 이 끝과 저 끝의 반복으로 장래 일을 모르게 하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사람이 만일 장래 일을 알게 된다면 그는 공포에 잡혀 살 수가 없을 것입니다. 다만 그 희비곡선은 인생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목말라 기다리게 하며 인생의 진정한 의미와 필요를 늘 진지하게 살피게 합니다.
우리는 본절에서 잘 아시는 중국의 ‘새옹지마’란 말을 떠올리게 됩니다. 인생의 좋고 나쁨과 길고 짧음을 예측하기 어려우니 매사 좋게 여기라는 뜻입니다. 새옹의 말이 오랑캐 땅으로 도망가자 새옹은 낙심하지만 어느새 준마 한마리를 데리고 와서 졸지에 말 두 마리가 됩니다. 그런데 그 말을 타고 놀던 아들이 말에서 떨어져 그만 다리가 부러집니다. 새옹은 마음이 매우 상했는데 마침 전쟁이 일어나 다리 때문에 아들이 징병에 면제가 되어 동네 청년들이 다 전사해서 울음바다가 된 가운데 아들은 살아남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새옹이 사건 때마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게 더 좋은 일이 될지 누가 알겠나.” “그게 또 힘든 일이 될지 누가 알겠나.” 기쁘다고 방심하거나 슬프다고 낙심하지 말고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니 세상만사 늘 긍정적이고 감사하면서 의연하게 처하라는 충고인데 잠언서와 본문에 이미 간결하게 깊은 내용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모든 인생들은 하나님을 중심축으로 하여 돌아가는 바퀴여야 한다는 이 강대상말씀이 기억납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의 목적과 이유가 되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을 향해 돌아가는 수레바퀴들은 하나님의 생명력을 공급받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입니다.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 어떤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지속적으로 번갈아 오는 양 끝의 현상은 결국 돌고도는 회전목마처럼 인생을 골고루 풍족하게 할 것입니다. 계속 심기만 해도, 계속 춥기만 해도, 계속 대낮만 계속되어도 인생은 건조해집니다. 어떤 일에서도 우린 우리에게 복된 시온의 길을 결정하신 하나님께 엎드림으로 그 정황에서 가장 값진 것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기쁨을 구해야 할 줄 압니다. 값진 행복은 모두 불행을 바닥에 깔고 엎드릴 때 시작한 것들이었습니다. 기도합니다.
“물로 심판하실 때 다시는 사람으로 인해 땅을 저주하지 않으시기로 결정하신 주여, 이제 불로 찾아오신 줄 믿습니다. 거룩하신 예수님 안에 불러주셔서 불심판을 면하되 성령의 불로 거듭나게 하사 주의 전 삼으셨으니 일마다 때마다 주여 함께 하심으로 거룩한 영, 기쁨의 처소 삼아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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