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11.주일설교<빌3:8-9. 버림으로 얻는 것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게 곧 여러분 인생의 목표이자 삶이며 길입니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 잠23:7a) 우리들의 목표점은 우리의 삶과 인격을 그 방향으로 인도해 가게 됩니다.
바울사도는 부활예수 우리주님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한 것으로 여겼으며 이 고상한 지식을 위해 모든 다른 것들의 가치를 무시할 뿐 아니라 해(害)로운 것으로 여긴다고 증거합니다. 이 고상이란 말로 사용된 헬라어 ‘휘페레콘’은 가장 뛰어남, 곧 탁월함을 말합니다. 가장 우수하고 월등한 것을 위하여 다른 것들을 버리고 더 나아가 배설물로까지 여긴다고 했습니다. 이 표현법은 앞에서 말한 고상한 지식 예수님을 아는 것에 대한 깊은 경탄과 감격을 고백하려는 의도적인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진정 최고의 가치와 가장 고상한 것 곧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위하여 우리가 버려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를 살피며 택한 자의 정결에 대하여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기로 합니다. 예수를 아는 고상한 지식풍성, 어떻게 가능한가?
1. 예수그리스도를 위한 관계로 거듭나야 합니다.
인생이라는 큰 건축은 콘크리트나 석재 혹은 목재와 같은 성품에 관계라는 얼개(틀.구조Frame), 그것은 평생을 결정하는 기본이 됩니다. 사람들은 관계라는 철근얼개 위에 양심과 지혜와 결단과 의지로 부단히 인격과 인생이라고 부르는 그림을 그려가게 되는데 세상사람들이 그려가는 인생이란 그림은 갑에게 끌려가는 부조리입니다. 실력대로 그려지질 않습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은 전8:14에서 “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설정되지 않으면 다른 모든 관계가 바른 가치관을 갖지 못합니다.
바울사도가 주를 아는 고상한 지식을 얻고자 미련없이 버린 것 가운데 결코 쉽지 않았던 것이 관계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다는 건 가족혈통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가족 외 모든 관계와도 단절입니다. 한 유대교자매가 예수를 믿자 가족회를 열어 그를 처벌하기로 결정을 합니다. 그것은 자칫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아는 자매의 아버지는 오빠를 시켜서 그 결정을 은밀히 전하고 도피자금을 주어 외국으로 도망치게 하는 일은 이스라엘에서 종종 있는 일입니다.
막10:29-30입니다.“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바울사도는 주를 위해 모든 걸 포기한 사람입니다. 눈으로 보기에 바울사도만큼 가난하고 비참한 인생도 찾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만큼 행복을 고백하면서 복된 삶을 풍미한 영적거인도 드문 것이 사실입니다.
성도여러분. 주를 위하여 관계의 포기를 통해 거듭나기를 축복합니다. 이보다 더 큰 복이 없습니다.
일찍이 우리교회는 관계를 두 가지로 단언한 바 있습니다. 즉 모든 관계는 둘 중 하나라는 것을 잊지 말라 했습니다. 하나는 끝까지 함께 하는 동역자요, 그 외의 모든 관계는 전도대상자라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 중 이도저도 아닌 관계가 있다면 그 관계는 전혀 무의미한 관계요, 도리어 자신을 오염시킬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평생에 기억되는 복이 있길 바랍니다.
예수를 아는 고상한 지식풍성, 어떻게 가능한가?
2. 예수그리스도를 위한 사람, 내면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하신 이름 예수를 위하여 버려야 할 것 중에는 우리 심령을 차지해 병들게 하는 많은 오류를 봅니다. 롬1장 29절은 하나님이 버려두신 사람들의 불의를 이렇게 밝힙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背約)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이 외에도 바르지 못한 고정관념, 잘못된 전통과 습관과 가치관, 열등감과 우월감, 거절로 인한 상처, 자기우상, 상실감, 원망, 거짓말, 혈기, 이기심 등 버려야 할 너무나 많은 것들이 우리구주 예수님을 정면으로 가로막고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가장 귀한 예수를 더욱 얻기 위하여 버려야 할 지금 열거한 불의는 결코 만만치 않은 것들입니다. 우리자신의 힘으로 그것들을 툭툭 털어버릴 용사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갈2:16절은 이러한 세상적 불의를 물리치고 의로울 수 있는 길을 정확하게 제시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다른 말로 한다면 “인생이 결단과 행위만으로는 결코 불의를 멀리하여 의로워질 사람이 없으니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불의를 이겨 의로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 내면이 거듭나려면 인생의 목적인 예수를 절대신뢰해야 합니다.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어서 당대에 의인이 되었고(창15:6), 아브람의 의는 여호와를 믿음으로 그렇게 의로 여겨주신 칭의였습니다.(창15:6)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끝날까지 변함없는 진리가 저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하실 줄 믿습니다.
아무 육체라도 율법으로는 의로울 자가 없다는 성경의 말씀처럼 이제 불의에서 의로 거듭나는 길은 오직 예수그리스도께 속해 말씀 앞에 믿음으로 나아갈 때 놀랍게도 우리의 내면이 예수그리스도를 위한 것으로 거듭 태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탁월함과 소중함의 가치를 지닌 내면의 삶과 이 땅에서의 승리는 오직 예수 이전의 옛 자아, 곧 불의한 것들을 남김없이 버림으로 시작되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오늘 우리는 성경을 통해 들었습니다. 이렇게 내면이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전적으로 의지하면 바뀌는 중요한 몇 가지를 살펴보고 소망을 나누고자합니다. 먼저,
1) 정직하게 변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붙드시고 늘 동행한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 안에 예수의 영이 계셔서 거짓말을 멀리합니다. 비록 손해를 보더라도 있는 그대로 말하게 됩니다. 거짓말이 그럴싸한 옷을 입고 위장하면 그게 핑계라는 것인데 우리말로는 둘러댄다는 것입니다. 주의 영이 함께 하시면 절대 둘러대지 않습니다. 둘러대서 얻는 유익보다는 정직하게 말해서 보는 손실과 수치가 차라리 훨씬 편하고 유익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게 됩니다.
2) 이웃을 배려하는 이타적인 사람이 됩니다. 이미 불의로 정의된 열등감과 우월감, 거절로 인한 상처, 상실감, 원망, 자기우상, 거짓말, 혈기, 교만, 배약, 탐욕,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수군거리는 거, 비방, 자랑, 무자비한 거 모두 한결같이 이기적인 마음에서 나타나는 일들입니다. 즉, 한평생을 살아가는 목적이 자기자신인 경우 필경은 자기생각에 묶이고 모든 활동과 목표가 자기의 유익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그런 이기적인 사람은 항상 무엇을 생각할 때 이것은 나와 무슨 상관인가를 놓고 따집니다. 그러나 이타적인 예수의 제자들은 이것이 우리 주님과 교회부흥과 주님나라확장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근본부터 생각의 시작이 다른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는 철저히 자기로부터 모든 생각과 활동이 전개되고 다른 하나는 오직 하나님의 뜻과 연계되어 생각하고 활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그리스도를 믿어 불의가 사라지기 시작하면 이렇게 생각의 시작과 행동의 동기가 근본부터 변화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열등감과 우월감이 사라지고 건강한 자존감이 세워집니다. 나는 못나도 날 차지한 주님은 대단하시고 위대하신 것을 믿으니 언제나 주님을 모신 건강한 자존감이 당당하게 말하고 행동하게 합니다.
4) 온갖 상처가 치유되기 시작합니다. 상처는 열등감이 구체화되었던 흔적입니다. 구원받아 주님을 모시고 살면 그 상처들은 도리어 귀한 간증과 이웃을 향한 권면과 위로의 증거들이 됩니다. 이러한 나에게도 주님이 찾아오셔서 죄를 용서하셨고 거듭남과 복된 영생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5) 원망하지 않습니다. 생각해보면 문제가 다른 데서 시작한 일들도 자신이 좀 더 기도하고 신중하게 대처했더라면 피할 수 있었던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즉 모든 문제의 원인을 일단 자신을 살피며 내안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6) 자기자랑과 자기우상이 사라집니다. 주님께 붙잡힌 성령의 사람들, 내면의 변화가 일어날수록 자기자신이 얼마나 허약한 존재인가를 알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얼마나 놀랍고도 크신 분이신가를 깨닫게 됩니다. 결코 자신에게는 자랑거리가 없는 것을 절실히 알게 됩니다. 모두 거저얻은 선물인 것도 알게 됩니다. 겸손히 엎드려 모든 것을 베푸신 하나님 앞에 늘 어찌 이 몸을 드릴 것인가를 묻게 됩니다.
7) 혈기와 교만이 줄어듭니다. 모든 혈기는 자신에게 맞춰져 있습니다. 발끈하는 순간 아무 것도 뵈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맞추지 않고 공공의 유익을 위한 의로운 분노를 사람들은 혈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의분은 거룩한 분노요, 그것은 행동하는 양심 곧 지성의 발원이기 때문입니다. 안중근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쏜 것을 혈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성전 안에서 환전상과 비둘기상을 뒤엎고 채찍을 휘두르신 것은 혈기가 아니었습니다.
시인변영로는 논개를 향한 찬미시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타는 정열은 사랑보다 강하다.”
주님나라를 위하여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의분을 이기지 못해 의로운 데에서 사용되면 그것은 거룩한 분노입니다. 이 말씀받은 모두에게 혈기변하여 거룩한 분노되기를 축복합니다.
8) 악한 습관과 잘못된 전통 민속이 떠나갑니다. 아프리카 졸라족 여인들은 모두 아랫입술을 찢어 둥근 돌판을 끼워놓고 그것이 클수록 아름답다고 여깁니다. 남자들은 장대겨루기를 한 번씩 하는데 거기서 사망자가 속출합니다. 의미 없는 일에 생애와 모든 것을 겁니다. 또 piercing환자들은 얼굴에 수백 개의 다양한 고리를 달고 뽐냅니다. 혀에도 몇 개씩 고리를 꿰어 달아놓았습니다. 제가 블로그에서 이렇게 주석을 했습니다. “모두들 인생은 밀양아리랑을 부르며 간다. 날좀보소 날좀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모두 자기좀 봐달라고 아우성인 게 인생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한 일은 숨기고 죄는 엎드려 고백합니다. 끝으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내면이 거듭나면,
9) 세상과 육체와 귀신 앞에 당당해집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모릅니다. 그래서 육신 끝나기 전에 좀 더 의미와 보람이 있고 풍성하게 살라고 가르치면서 이웃을 도와 공공의 유익에 기여하라고 합니다. 문제는 그러기 위해선 때로 방법보다는 결과를 중시해 이긴 자의 소리가 법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기 위해 양초를 훔치는 것을 묵인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론이 살아계신 하나님께 있고 과정은 성실과 최선을 다한 인간의 몫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해질 때 모든 것 승리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과 육체는 끝까지 하나님을 방해하는 존재로 우리의 믿음을 훈련하며 끝까지 함께 가게 될 것입니다.
세상과 육체가 하나님을 방해할 때 종종 귀신이 주관하는 것을 봅니다. 신약에서도 귀신들린 자들을 주님께서 여러번 회복시키셨습니다. 세상에 가장 어리석은 자는 귀신도 없고 예수도 안 믿겠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영의 세계를 부정하고 육체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귀신은 영이 허약해 질 때 파고들어와 교회를 방해하고 어둠으로 끌어내립니다. 불평, 시기, 각종 악한 것을 주입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냥 자신이 우울하다고 느끼게 됩니다. 주님의 손을 놓치는 순간 침입합니다. 좀 수상하면 즉시 주님을 간절히 모셔야 합니다. 육체에도 윤리가 있고 낭만이 있고 도리가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육체가 있을 동안에만 유효합니다. 그것은 끝까지 허망입니다. 사람은 반드시 한번 죽게 되는데 죽은 후에는 심판이 있고 심판은 불신자의 징벌심판과 성도의 영생심판이 있을 뿐이라고 성경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면의 변화와 성숙을 통해 보다나은 미래를 보장받고 훈훈한 주변으로 날마다 찬송과 감사가 멈추지 않기를 원합니까? 오늘 들은 말씀을 그대로 믿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분량만큼 여러분의 내면은 달라질 겁니다. 성장한 만큼 여러분과 그 가정과 주변에 놀라운 기쁜 소식이 꾸준히 들릴 것입니다. 잠시 후면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소망을 둔 자, 믿은대로 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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