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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18.11.04.<창16:4-13.(7-9)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by 설렘심목 2018. 11. 4.

2018.11.04.<16:4-13.(7-9)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출발지와 현주소와 도착예정지를 바로 알고 있는 여행자는 방황하지 않고 낭비하지도 않고 여기저기 물으며 기웃거릴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의 길이 되신 그리스도의 몸 된 성전 예배당 안에서 함께 예배하게 하신 주님께 큰 감사와 영광을 드립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람의 씨받이, 사래의 몸종 하갈이 주인의 자손을 잉태했다는 이유로 교만해지자 그만 사래의 분노로 쫓겨난 뒤 하나님의 회복케 하심과 곧 태어날 이스마엘에 대한 예언의 장면을 소개합니다.

주인의 아이를 잉태했다는 기쁨으로 교만해진 애급 여인 하갈은 여주인을 멸시해 쫓겨나지만 자비하신 하나님은 그런 하갈을 즉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가로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오늘 이 질문이 저와 여러분에게 주는 도전은 무엇입니까? “네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느냐.” 오늘 설교제목,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입니다.

 

1. 네가 어디서 왔느냐고 묻습니다.

 

동서고금이후 지금까지 인류는 인생이라는 큰 주제를 놓고 끊임없이 질문하며 살펴왔습니다. 그러나 피조물인 질그릇끼리 아무리 밤이 새워 이야기해도 인생을 지으신 분의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스스로 고매히 여기는 윤리와 도덕정도였습니다. 진정 존재자체의 비밀을 아는 데에는 한 발자국도 다가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날 과학이 매우 발전해서 하나님의 고유주권에까지 침해하려는 그야말로 제 2의 선악과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유전자를 연구하여 종자를 바꾸고 조정하는 참으로 패역한 일은 과연 오늘날 우리가 마지막시대를 가지 않나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고도로 발전한 과학도 하나님만이 갖고 계신 창조의 권능과 비밀을 파헤칠 수는 없습니다. 생명의 신비는 헤아림으로 깨닫는 게 아닙니다. 다만 전적으로 믿어드림으로 알게 되는 놀라운 비밀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사랑하는 자의 몫입니다. 사랑 없는 신뢰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할 때 그 사랑과 경외만큼 창조의 비밀에 감사로 나아갈 수 있음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생명을 주심으로 사랑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오직 사랑을 근거한 믿음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깨달아갈 때 비로소 인생의 바른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서 왔냐고 묻는 하나님의 질문은 곧 네가 나를 아느냐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만큼 인간은 자신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6:3) 작품에는 제작자의 혼과 열과 뜻이 담겨있습니다. 제작자를 만나면 작품을 송두리째 파악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 네가 어디서 왔냐고 묻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려면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하고 내가 누구인지는 나를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께 여쭤야 합니다. 하나님과 통해야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어디서 와서 지금 왜 존재하는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인간이 자신과 본향을 알기 원합니까? 그것은 깨달음의 근원이며 자신이라는 한 존재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에 대한 원초적인 대답이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가는데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왜 가는지를 모르고 간다면 이같이 딱한 일이 세상에 어디 또 있겠습니까? 우리는 모두다 하나님의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지구상 모든 생명들 가운데 가장 존귀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이 땅에 잠시 보내신 하나님이 우리의 본향이며 돌아갈 곳임을 바로 확실하게 아는 일은 각자 자신의 인생을 가장 가치있게 하는 일임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기억합니까?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11:36절 말씀은 만물의 시작과 과정과 결국을 한마디로 정리합니다. 그러므로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반드시 하나님의 손으로 빚어진 것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고 살아가야 최고의 가치를 지니며 가장 아름다운 빛을 내게 됩니다.

 

본문 8절에서 하나님은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라고 묻습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이는 이미 하갈의 신분을 정확히 하는 말씀으로서 하갈이 있어야 할 장소를 말합니다. 사래의 여종은 주인인 사래에게 있어야 합니다. 엄마는 엄마의 자리에 있어야 하고 여종은 여종의 자리인 주인 옆에 있어야 합니다. 거기가 복 받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하갈은 여종의 자리를 떠나 도망하고 있습니다. 복된 터를 떠나 광야로 갑니다. 비록 힘들어도 참고 머물러 있어야 할 곳을 떠나지 않아 말씀으로 세워지는 모두가 되기 원합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느냐?”

예수그리스도의 제자인 너 내 딸아. 내 아들아. 네가 어디서 왔느냐?”

저와 여러분의 정체와 떠나온 곳을 묻는 질문에는 언제나 우리 주 예수님만이 그 답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아빠아버지라 부르는 것입니다.

 

2. 어디로 가느냐고 묻습니다.

 

모든 생명은 시작한 곳으로 다시 돌아가게 돼 있습니다.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진리를 모르고 허탄한 것을 따라 열심히 달려가는 많은 인생들은 어딜 가는지도 모르고 힘을 다해 달려갑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한평생과 전인격이 예수를 향하여 달려가는 것을 말합니다. 즉 목적지가 예수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묻고 또 하갈처럼 분명히 대답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나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출발점인 내 본향, 하나님을 피하여 엉뚱한 곳으로 도망하고 있지는 않는가?” 하나님께서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것은 떠나온 곳으로 다시 돌아가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다른 말로 바꾼다면 하갈. 지금 너 어디로 가나? 돌아오지 않고? 거긴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

 

4절입니다.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쫓겨난 것은 하갈이 자초한 일입니다. 우리 인생길이 광야인 것은 우리의 죄악으로 인한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우리는 모두 죄인의 신분으로 태어났습니다. 이는 마치 태어날 때 받은 신분이 우리의 의지적 선택과는 무관한 것과 같습니다. 어떤 이는 흑인으로 어떤 이는 백인으로, 어떤 이는 부잣집에서 어떤 이는 가난의 대물림 속에서 태어납니다. 죄인의 신분으로 태어난 우리들, 그러나 그 신분보다 중요한 게 있습니다. 살아가는 동안 누구를 만나 어디를 향해 가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묻습니다. “네가 어디로 가느냐?” 과연 자신을 바로 알고 바른 길로 향하는 발걸음인지 순간마다 말씀 앞에 점검받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장 건강한 삶은 어떤 삶입니까? 자신의 생명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를 알고 그 뿌리위에 확실히 세워지는 삶입니다. 인생은 하나님이 지으시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며 의지하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9절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3. 사망의 길에서 돌이켜 돌아와 순종하여 죽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릴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어딜 가든지 거기 하나님의 시선과 관심이 머물러 있습니다. 하갈이 여주인 사래를 떠나 광야로 도망한 것은 전적으로 하갈의 교만 때문이듯 하나님을 떠나 일어난 모든 불행과 죽음은 인간의 범죄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끝까지 인자하시고 사랑이신 하나님은 하갈에게 네 여주인 사래에게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더욱이 아들의 장래에 번성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명령에는 순종할 때 주어지는 상급 즉, 하나님께 돌아오면 놀라운 일이 시작되는 것 우리와 주변이 알고 있고 인정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주님을 만나며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그 명령과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우리의 기울어진 핸들을 바로 잡고 말씀한가운데에서 바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33:11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이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어떤 걸음으로 어떻게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지 그것을 묻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이 시간 이후 바로 지금을 말씀하고 계심을 주지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의 인생은 어디에 있고 어디를 향하여 어디쯤 서 있습니까?

과연 하나님이 선하다고 여기시는 모든 길로 행하십니까?

거기엔 여러분만의 왜곡되고 고집스런 모든 것을 포기한 흔적이 뚜렷합니까?

네 주인에게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말씀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진정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터에서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것만이 이 땅에서 육신을 가장 잘 지도하는 최고최상의 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돌아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감당하고 하나님을 노래하다보면 어느 새 하나님의 영광된 날이 앞에 다가와 있을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는 죽지 않고 잠들 것입니다. 모든 인생의 죽음 뒤엔 심판이 있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을 뜻하지만 우리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예수님 말씀처럼 잠시 자는 것이고 잠은 반드시 깨어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분 앞에서 깨어날 것입니다. 그 잠이 깨어나면 영생과 부활의 영광된 판결이 기다립니다.

 

숨쉬는 순간마다 하나님을 찬양하기 바랍니다. 거기가 하나님의 복된 터가 될 것을 믿습니다.

 

기도합니다. 거룩하심과 순결의 주님. 우리가 경건과 거룩한 길을 가는 힘 겨움에 혹시 하나님과 말씀으로부터 한 치라도 멀어져 있다면 오늘 말씀으로 밝게 비추셔서 즉시 돌아와 복된 출발 새 영을 부어주옵소서. 시기와 질투에 노예된 것들, 지체를 더 사랑하지 못한 것, 작은 것에 정직하지 못했던 것들, 주님보다 선물에 더 마음을 쏟았던 일들, 작은 불편에 주님을 원망했던 일, 크고 작은 허물로 주님을 떠났던 일을 회개합니다. “너 거기서 지금 뭐하나순간마다 부르시는 주의 음성에 귀를 열어주셔서 반응하게 하옵시며 은혜가운데 모든 성도들 하나되어 가정에서 교회에서 생업의 현장에서 주의 나라 굳건히 세워가게 하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