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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18.09.16. 주일설교<마27:32.구레네 시몬.>

by 설렘심목 2018. 9. 16.

2018.09.16. 주일설교<27:32.구레네 시몬.>


[2018.09.15. 인생은 누구를 만나느냐로 길이 달라진다. 그래서 내가 목회 첫 설교를 다섯 개의 만남으로 시작했고 이젠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내가 대행하는 크고 중차대한 사명을 받은 것에 대해 무거움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누구를 만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그에게 누구냐는 것에 심각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진정 내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 분만 나타나도록 혼신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는 뭔가? 그건 바로 영생하시는 그분의 나라로 지금도 내가 가고 있기 때문이다. 아멘.]

 

백번 고백해도 부족한 감사는 우리가 중환자실이나 법원에서 만나지 않고 여기 주님이 지켜주신 예배당에서 만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와 어둠에 잡혀 절망하지 않고 지금 이렇게 복된 자리에서 예배할 수 있게 된 것, 심판과 죽음대신 죄로부터의 구원, 그리고 영생, 여기에 우리가 치른 대가는 사실상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영원한 생명과 천국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만한 지불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신기하게도 사람들은 돈을 내야 할 것을 배려하면 고마워하지만 돈으로 할 수 없는 놀라운 것에 대해선 아무 감각이 없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잠시 지납니다. 예수 믿기 위해 받는 고통은 순간의 과정일 뿐 진정 구원의 값은 십자가에서 주님이 치르신 대속의 고통과 죽음이었습니다. 십자가 안에는 인간이 저지르고 받아야 할 배신과 저주와 조롱과 핍박과 절망과 사망이 들어 있습니다.

 

세상엔 공짜가 없다.” 기억납니까? 값을 치른 것만이 진정 내 것이라는 말씀, 거저주신 구원과 영생 앞에 만분지일이라도 반응하는 것이 믿음이요,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생명주신 창조주 우리 하나님 앞에 생명 있는 자로서의 마땅한 반응으로 최소한의 양심과 염치입니다. 따라서 에덴의 회복이라는 것은 영혼의 기본양심과 부끄럼을 아는 염치의 회복이기도 합니다.

 

이사야 534절에서 6절까지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수께서 당하신 질고와 슬픔은 그분의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것이라는 증거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떠남으로 피할 수 없이 만나는 슬픔과 질병의 고통 등 수많은 질고의 값이 십자가에서 치러진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을 등지고 떠나는 것과 하나님과 멀어진 모든 것들은 곧 인생의 슬픔과 여러 가지 질병과 고난으로 다가오는데 이것을 주님이 십자가에 오르심으로 대신 값을 치러 해결하신 겁니다.

 

성도여러분. 하나님과 멀어지는 일은 불행의 씨앗을 심는 일이고 하나님을 잘 믿는 일은 기쁨과 복을 심는 일입니다. 그분의 절대주권을 바로 믿는 일이 모든 복의 첫 시작입니다.

본문에서 구레네 시몬은 잠시 예루살렘에 들렸다가 큰 사건을 보게 됩니다. 구레네는 오늘날 리비아수도 트리폴리인데 북아프리카 지중해에서 15km떨어진 고원지대로서 명망 있는 디아스포라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21절 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 가게 했다고 합니다. 구레네 시몬은 분명히 억지로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메는 강제징발을 당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일, 사연은 다 달라도 한 가지 같은 게 있는데 그것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믿을 수 없는 일들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대부분 시몬처럼 강제로 붙잡힌 겁니다. 어떤 경우에도 스스로 믿었다는 것은 엄밀히 말해 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사람의 생각에서 나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생각은 본래 하나님을 떠난 죄에서 출발하므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린 그런 죄인의 신분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건 거룩하신 영, 곧 성령이 함께하신다는 피할 수 없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에 따라 믿음으로 구원받는 일은 한번이면 족하지만 육신의 끝 날까지 계속되는 성화는 경건 훈련을 통해 그리스도의 충만함과 그 구원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자라가야 합니다. 성령의 임재는 마치 우리가 밥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들이 자랄 때 가끔은 아프기도 하고 약도 먹습니다. 우리가 거룩함으로 자라갈 때 간혹은 육신의 아집이나 못된 기질을 타고 들어오는 악한 영에게 속기도 합니다. 그러면 성령의 은혜와 개입이 방해를 받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하나님의 사람처럼 고상하다가도 어떤 때는 교회의 훼방꾼이 되기도 합니다. 이때 한번 받은 구원이 떠나는 것은 아니며 늘 계시던 성령이 영원히 떠난 것은 더욱 아닙니다. 다만 내 생각에 취해서 성령의 앞을 가로막아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며 사탄의 편을 든다는 것인데 이때 활동을 멈춘 성령은 자신의 완고함으로 가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시 시험에 빠져 흔들릴 때는 속히 죄와 사망의 법에 묶였던 나를 돌이켜 성령께 돌아와 생명의 빛을 밝히 드러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3:5절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성령께서 새롭게 하심으로 사람의 마음에 믿음을 주셨다는 결론입니다.

 

구레네 시몬은 얼떨결에 십자가를 짊어졌습니다. 군중 속에 편안히 구경하는 것보다는 힘들고 두려운 일입니다. 로마군인들 횡포는 예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5:21절에선 시골로 와서 지나가는데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시골사람 구레네 시몬에게 예루살렘은 낯선 도시였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어떠한 일로든지 부름을 받을 때는 대부분 익숙하지 못한 일과 엉뚱한 정황가운데 붙잡힙니다. 혹시 여러분에게 황당한 일이나 사람이 나타났습니까? 싫고 피하고 싶습니까? 주님 앞에 묵상하시고 주님께 묻기 바랍니다. 그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주님 외 아무도 모릅니다.

 

그 많은 군중가운데 하필이면 구레네 시몬이었을까? 많고 많은 사람 중에 하필이면 내가 예수님을 믿다니 놀라운 복이요, 선물입니다. 시몬은 놀라서 얼떨결에 십자가를 메고 언덕을 오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서 뵙게 된 것입니다. 신음의 숨소리조차 분명히 들리는 곁에서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최후순간을 가장 생생히 경험하는 놀라운 복을 받은 것입니다. 훗날 이 십자가를 대신 진 구레네 시몬의 가족은 모두 열심히 믿는 성도가 됐고 바울사도는 롬16:13절에서 주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내 어머니니라.”고 합니다. 구레네 시몬의 아내, 곧 루포의 어머니를 자신의 어머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구레네 시몬의 아들 루포는 주의 택하심을 입었다고 말합니다. 얼떨결에 잠시 멘 십자가사건으로 온 가정이 구원받고 영생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바울이 그 어머니는 내 어머니니라고 하면서 그 아내를 친어미처럼 깍듯이 모셨습니다. 바울사도가 자신의 가족으로 여길 정도의 지극한 양질의 선하고도 충성스런 믿음의 가정, 구레네 시몬의 아들, 루포의 가정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1. 택함을 받은 일에 우리가 치른 값이 없습니다. 오직 감사해야 합니다.

 

구레네 시몬은 느닷없이 강제징발로 잠시 당황했지만 영원한 믿음의 복을 받았습니다. 시몬을 택한 하나님의 택하심엔 피조물인 우리가 따지거나 물을 수 없다는 것이 로마서9장에서 밝히는 택정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알 수 없는 기준에 대한 질문보다 내가 택함 받았다는 사실 앞에 늘 겸허해야 합니다. 행위대로 하지 않았으니 빚진 자의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은 택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을 이루시기까지 결코 교회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지치지도 않는 분이십니다. 믿기를 바랍니다.

 

구레네 시몬과 같이 우리들은,

1) 메시아와 구원에 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던 촌사람 구레네 시몬과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2) 자신의 뜻이 아닌 외부의 힘에 의해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십자가를 어깨에 진 것입니다.

3) “주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가정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이 가문을 통하여 성취됩니다.

 

아무 자격이 없는 자를 불러서 예수라는 이름을 개인의 구세주로 주셨습니다. 잠자고 있던 영혼은 미처 알지 못해 환영하지 못하고 강제로 십자가를 지게 됐습니다. 예수 믿는 십자가는 고달파 보여도 믿음으로 주의 영광된 부활의 권능을 알면 결코 양보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환경과 여건에서도 우리가 예수 믿고 그로 인해 당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곤혹스런 일들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영생을 믿을 때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부활이 없다면 세상 어떤 사람들보다 더 불쌍한 사람들이란 바울사도의 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1:24절입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2. 택한 자에게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1:24)이 있습니다.

 

우리가 훗날 그리스도의 영광된 부활에 참여하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에도 참여해야합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8:16-17).” 현대교회의 문제는 모두 편의주의 문화에 길들여져 신앙역시 불편하고 어려우면 피하고 쉽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안일한 신앙생활의 결과로 교회들은 허약체질로 바뀌어 작은 시험에도 흔들리고 무너지기 일쑤입니다. 막대한 유산을 받은 자녀가 고생이 싫어 유산을 관리할만한 아들이 되려하지 않고 여기저기 놀러 다니기만 한다면 그 가문은 미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녕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있다면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께서 이제 여러분 삶속에 놀라운 계획을 세우시고 행하실 겁니다. 다만 여러분을 성능 좋은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활동하실 줄 믿습니다. 우린 종종 십자가를 메라는 주님의 당부를 듣습니다. 그러나 이젠 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활을 보장하셨고 이길 힘을 주시는 주님께서 오늘도 저와 여러분 곁에 계십니다.

 

잠시 눈을 감고 살아계신 주님 앞에 우리 스스로 묻기 원합니다.

느닷없이 내 인생 가운데 찾아오신 주님을 나는 어떤 자세로 맞았는가? 그럼에도 주님은 지금까지 내게 얼마나 융숭한 것으로 베푸시며 후대하고 계신가? 앞으로도 계속 날 찾아오시는 주님의 십자가, 그것은 어김없이 큰 기쁨과 영광과 구원을 보장하고 있다는 것을 믿습니까? 그리고 남은 육신의 삶 가운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무엇으로 채워가야 하겠는가? 무엇을 포기해야 할까? 힘들어도 반드시 성취해야 할 내안의 주님소원은 무엇인가? 그것들을 위해 잘 참고 힘껏 싸우고 순간마다 새 영으로 새 마음으로 빛의 생각들을 체질화하려는가? 그리고 그것은 진정 기쁨인가? 오늘도 말씀으로 우릴 찾으셔서 더 나은 힘찬 영혼의 활동으로 신앙을 깊게 하시고 남은 생애 힘차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예배당 문을 나서면서 주님의 만지심으로 달라진 우리를 보며 우리 스스로 놀라는 구원의 감격이 넘치게 하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