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9.02. 주일설교 <삼상9:20. 하나님의 관심>
[아직 내가 켜는 바이올린의 비브라토나 연주가 다른 이에겐 “야리꼬리”한 민원대상의 소리이다.
서툰 것은 순수하나 매끄럽지 못해 많은 이들이 피하고 싶어 한다. 계속 익어 깊은 맛을 내야 한다. 뇌신경전달 세포줄기인 시냅스가 강화돼 익숙해지는 것이다. 시냅스 길을 비포장에서 포장으로 바꾸면 된다. 반복으로 시냅스의 길을 내야 한다. 비싼 화장품보다 신앙의 시냅스를 강화해야]
삼상 9장에서 소개하는 사울은 매우 인물이 탁월하고 준수한 청년입니다. 엘리와 사무엘선지자의 아들들의 행실이 바르지 못하자 이스라엘백성들은 장자로 이어지는 선지자세습위임에 반대하여 왕을 원하게 됩니다. 왕이신 하나님이 이 말을 들으시고 매우 못마땅해 하시면서도 그들의 간청을 들어주시며 백성들이 장차 스스로 구한 왕의 노예가 돼 그때 신음해 부르짖어도 응답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십니다. 출애굽 후 지금까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듯 사무엘 네게도 지금 그리하는 것이라고 하시며 그런 중에도 가장 출중한 인물을 세우신 것이 사울입니다.
이렇게 백성들이 하나님께 등을 돌릴 때 그래도 하나님께선 이스라엘의 장래를 위하여 사울을 택하시고 사무엘에게 그를 만나 기름 부을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분은 언제나 인간들의 배신과 죄악 가운데에서도 최선을 계획하시는 분이십니다.
하인과 함께 잃어버린 아버지의 암나귀들을 찾아 에브라임 산지와 여기저기 두루 거쳐 수웁 땅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청년사울은 부친께서 잃은 암나귀들보다 자신들로 인해 더 걱정하실 것이라며 돌아가자고 합니다. 이 때 하인이 “이 성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그에게 물으면 모르는 게 없다.”고 해서 함께 사무엘에게 향합니다. 이렇게 하여 사울이 만난 것은 암나귀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선지자 사무엘이었습니다. 오늘 설교제목은 “하나님의 관심”입니다.
성도여러분. 관심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반대는 뭡니까?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1978년 10월 뉴욕 부롱스에서 어느 70대 노부부가 나란히 목을 매 자살을 했습니다. 두 번의 강도를 당해 그때마다 젊은 강도들에게 매를 맞고 자살을 결심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죽어 부패하도록 발견되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미리 관리소에 편지를 보내 죽은 직후에 발견되도록 했습니다. 경찰들이 방문을 열었을 때 방에는 수의 두벌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궁색치 않은 살림도구와 쉴러, 톨스토이, 헷세, 괴테 등 수준높은 책들이 가득해서 가난하지 않은 지식층 노인이란 것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유서에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공포 속에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 우리는 잊어진 인간들이다.” 무관심은 상대방을 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온통 우리에게 꽂혀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성도와 교회입니다. 세상 모두가 구원받아 교회 안에 예배하러 오기까지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구원받아야 할 세상과 거기 함께 뒹구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픈 마음, 렘23:27절입니다. “그들이 서로 꿈 꾼 것을 말하니 그 생각인즉 그들의 조상들이 바알로 말미암아 내 이름을 잊어버린 것 같이 내 백성으로 내 이름을 잊게 하려 함이로다.” 배신당한 사람보다 버림받은 사람이 더 가엾고 버림받은 사람보다 더 비참한 사람은 잊어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운데 비참한 사람이 있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한순간도 잊지 않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소유물가운데 어떤 것이 가장 소중합니까? 그렇습니다. 어떤 것과도 바꾸기 싫은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밖에 없는 당신의 귀한 아들, 그 아들의 생명을 주고 우리를 샀기 때문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잠시도 소홀하지 않으십니다.
사41:17절입니다. “가련하고 가난한 자가 물을 구하되 물이 없어서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마를 때에 나 여호와가 그들에게 응답하겠고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외아들의 피를 주고 사들인 당신의 자녀들을 하나님은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시는 우리는 그래서 존귀한 생명들입니다. 사울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오늘 저와 여러분을 방문하셔서 죄와 죽음에서 구원받은 기쁨과 감동을 더하실 줄 믿습니다.
9:20절을 읽습니다. “사흘 전에 잃은 네 암나귀들을 염려하지 말라. 찾았느니라. 온 이스라엘의 사모하는 자가 누구냐? 너와 네 아비의 온 집이 아니냐?” 다른 말로 하면, “넌 잃은 암나귀들을 찾는가? 난 너와 네 집을 찾는다. 넌 암나귀들을 원하는가? 난 널 원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이 잃어버린 그 무엇인가를 찾을 때 주님은 여러분의 영혼이 제자리에 돌아오도록 기다리시고 기다리다 못해 찾아 나서시는 줄 믿기 바랍니다. 22-24절을 보면 사무엘선지자는 30명가량의 일행가운데 사울을 상석에 앉히고 최상급의 고기를 대접합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후대하는 모습은 16절에서 그 동기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사람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하나님께서 사울을 후대하시는 이유는 택한 이스라엘백성들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할 자가 사울이었기 때문입니다.
불신과 좌절과 절망의 늪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은 우리를 다시 후하게 대접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풍성을 통하여 불신세상을 구원하시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요리사에게 당부한 고기는 넓적다리 최상품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필요를 채우시고 힘을 내게 하실 때 파치, 찌꺼기나 하등품으로 대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풍요와 사랑,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손에는 없는 게 없습니다. 믿어 복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 불신죄악 세상에서 너희를 찾은 이유는 너희가 나를 대신해 망해가고 죽어가는 불쌍한 저들을 구해내라는 건데 너도 저들과 같았고 네가 구원받은 것처럼 저들도 구원해야 한다는 겁니다.
예배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대하신 하나님의 일을 맡기시고자 찾으실 때 우리는 지극히 사소한 일에 온힘을 기울이고 이리저리 찾아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실패하여 주님께 찾아가면 주님은 우릴 끌어안으시고 우리 온 삶을 통째로 요구하십니다. 인생 전체에 만가지 복을 주시려는 겁니다. “주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구원의 대상은 언제나 너와 네 집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나와 내 가정에서 그치는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 믿고 삶의 전체가 바뀐 것처럼 이웃과 친지를 향하여 복음을 전해 구원받게 하는 일입니다. 해야 할 일이 있는 한, 우리는 쓰러질 수 없습니다. 구해야 할 인생들이 있는 한, 우리는 무너질 수 없습니다. 일을 맡기시는 우리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렘32:40. “내가 그들에(네)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널)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네)게 세우고 나 경외함을 그들(너)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네)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내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너를) 이 땅에 심으리라.” 하늘에 심는 게 아니라 이 땅에 심는다고 하십니다. 하늘엔 이미 우리 이름이 심겨졌습니다. 그것의 증거와 그림자로 땅에도 심겨져 각양 만복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증거하게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선 당신의 구원역사를 지금까지 한 번도 멈추신 적이 없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불러주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귀한 일들을 많이 맡기시기 원합니다. 아니 이미 많은 것들로 일거리를 주셨습니다. 이제 얼마나 우리가 충성하느냐는 우리에게 남겨진 몫입니다. 건강한 신앙활동이란 것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릴 죽음에서 구하신 것을 분명히 알게 된 자들이 그 구원에 대한 최소한의 반응이 건강한 신앙생활입니다.
이대로는 나라가 망하겠다며 가까운 대신이 접근하여 어쩔 수 없이 몇 마디 들어준 게 발각돼 역모로 죽게 된 은나라의 정승 성홍은 공개화형시간을 하루 남겨놓고 허공을 바라보며 낙심에 젖어 있었습니다. 드디어 아침 해가 떠오릅니다. 그에겐 죽음의 태양입니다. 장작더미 위에 묶인 채 세워졌고 불이 붙었습니다. 바로 그때 급한 말발굽소리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들입니다. “멈춰라, 어명이시다.” 왕의 특사가 두루마기를 펼치며 전했습니다. 눈물로 고개를 못 들던 가족들이 어전이 있는 쪽을 향해 큰절을 올립니다. 바로 이게 구원의 감격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러한 구원의 감동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원의 감격은 생명에 대한 것입니다. 사형장으로 향하던 자가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이를 뭐에 비교하겠습니까? 고후1:9절은 우리를 모두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사울은 잃어버린 아버지의 암나귀를 찾아 헤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시간에 사무엘을 불러 사울에 관한 계획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사무엘은 사울을 찾아 만났고 기름부어 왕으로 삼았습니다. 당신을 배신하고 왕을 달라는 백성들에게 서운한 마음을 뒤로 하고 왕을 세우셨습니다. 오늘 말씀처럼 우리의 관심과 주님의 관심은 이렇게 다릅니다.
부모님은 자녀의 행복을 위해 뭔가를 계획하고 준비한 다음 자녀를 기다리고 기다리다 못해 찾아 나섭니다. 그러나 철없는 자녀는 부모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만의 생각에 취해 헤매며 다닙니다. 허랑방탕한 둘째 아들을 기다리다가 거지가 되어 돌아온 아들에게 살찐 송아지를 잡는 하나님은 항상 어버이의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시고 계십니다. 오늘도 우릴 말씀으로 이렇게 찾아주신 주님을 깊은 믿음가운데 만나 복된 예배로 모든 것 회복하신 줄 믿기를 바랍니다. 믿은 대로 이루어질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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