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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18..08.19.주일설교<막 7:25-30. 엎드려 받은 헬라여인의 구원.>

by 설렘심목 2018. 8. 26.

2018..08.19.주일설교<7:25-30. 엎드려 받은 헬라여인의 구원.>


[이 큰 죄인 이 큰 복을 받아 빌 길을 얻되 거룩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이요, 살 길을 얻되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품입니다. 이 놀랍고 복된 소식을 전하는 것만이 남은 생애의 의미요, 목표가 되게 하신 좋으신 주님만 위해 살도록 주 인도하시고 영광 받으소서. 종이 다 안고 갑니다. 교회와 후손에게 복을 내려 주옵소서. 아멘]

영혼의 방황은 인생의 방황입니다. 그리고 그 방황은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고 바른 목표와 가치가 설정되면 방황은 끝납니다. 그리고 건설적인 삶의 새로운 출발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받아 거듭난 자들이 정녕 그리워하는 누군가를 찾다가 이윽고 자신이 그렇게도 찾던 한 놀라운 인격체, 그 안에 감추어진 영생의 비밀을 그리스도로부터 발견하고 자신도 그렇게 누군가의 방황을 멈추게 할 만한 사람이 되고자 결단하며 시작됩니다. 오늘말씀의 주제는 설교 그대로 엎드려 받은 구원입니다. 그 겸손이 수로보니게 여인을 통해 어떻게 열매를 맺어 가는지 보게 됩니다. 본문 25절을 함께 읽습니다.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아래에 엎드리니.”

 

수로보니게 여인은..

1. 예수님의 소문을 소문이 아닌 복음으로 듣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딸이 정신병에 걸려 매우 절박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게 되는데 그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속히 달려갑니다. 어린 딸의 비참함이 그녀로 하여금 소문을 소문으로 흘려 듣지 않고 간곡히 붙잡게 한 것입니다. 딸로 인하여 간절한 그녀에게 소문은 믿음으로 인해 복음이 된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보고 믿은 것은 보고 확인한 뒤에 인정하는 인지의 과정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 과정을 통해서 믿음에 이르기도 합니다.

 

수로보니게출신 이 헬라여인은 딸의 질병을 통해 예수님을 찾아 병을 고치는 것은 물론 주님을 만남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여인에게 딸의 정신병이라는 고통이 없었더라면 예수님을 찾을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5-7장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입니다. 첫 교훈은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가난이란 단어는 원어적으로 의존이란 뜻이 있습니다. 즉 가진 게 없이 텅 비어 어딘가 의존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상태인데 이러한 심령을 보통 갈급한 심령, 또는 목마른 영혼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텅 빈 심령이라야 하나님의 통치아래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뭔가에 눌리고 뭔가에 쫓겨 목마르고 답답합니까? 환경에 집착해 탓하지 않기 바랍니다. 힘겨운 환경이 마음을 누르고 결국 그리스도 외 답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갈급한 심령은 복된 심령입니다. 긴박한 위기는 위대한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환경은 반드시 우리 곁은 떠나가지만 받은 구원과 주님은 영원한 우리의 기업이기 때문입니다.

순간의 절박한 고난에서 영원한 생명의 기회를 보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2. 예수님의 치유능력에 확신이 있었습니다.

 

헬라출신의 그녀는 자신의 상식이나 민족문화에 무관히 예수님께 적극적으로 어린 딸의 문제를 의뢰했습니다. 그것은 확신에 찬 당부였습니다. 헬라여인이 히브리랍비를 찾아온다는 것은 당시의 사회통념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오직 능력의 예수님께만 집중했습니다. 딸을 고칠 그분이 동양인이든 서양인이든, 흑인이든 백인이든, 아무 상관없습니다. 복음의 본질은 예수님 그 자신입니다. 오늘 날 교회나 성도에게 믿음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주님대신 주님을 포장하고 전하는 것들이 본질인 주님보다 더 중요하게 다뤄진다는 데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예배당의 사이즈와 화려한 인테리어, 기막힌 음향장치, 성도수, 성도들의 사회적 명망, 직업, 다채로운 프로그램, 거기에 교회의 본질인 예수님이 가려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을 둘러 싼 세간의 잡다한 정보나 출신성분과 지위나 다른 어떤 것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다만 예수님이 딸을 고치실 것이란 확신하나로 달려간 것입니다. 복음이란 이러한 확신으로 예수님을 꾸준히 소개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행하고 잘 전달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야 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3. 겸손한 마음으로 소원했고 그 겸손함으로 인하여 주님께 응답받았습니다

 

예수님은 겸손하고 온유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어린 딸의 귀신들린 병을 고쳐달라고 간청하는 이 여인에게 내 자녀에게 줄 떡을 개(쿠나리온:애완견들개:케데흐)들에게 던질 수 없다.”고 매몰차게 말씀하십니다. 사랑과 자비의 주님답지 않은 대목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완전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여인의 낮아진 겸손의 믿음을 한눈에 보셨고 그 겸손한 자세에 구원을 확정하셨습니다. 그 매몰찬 주님의 확정은 동시 겸손한 수로보니게여인의 구원에 대한 놀라운 확정이요, 딸의 치유에 대한 결론이었습니다. 더 심한 욕설을 할지라도 그것은 분명, 확실히 결정된 구원에 관한 놀라운 복음의 시작이었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오늘 분명히 붙잡아야 할 중요한 우리 기독교신앙의 덕목은 변함없이 겸손이라는 것을 잊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 이 겸손은 자신에 대해선 No라고 말하는 반면, 주님을 향해선 항상 아멘이라고 말할 수 있는 철저한 자아부인으로 시작합니다. 자아부인은 자기십자가를 지는 것이며 자기십자가는 주께서 거기 달려 죽어주신 것처럼 우리도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몰라 그리스도밖에 있던 모든 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을 말합니다. 십자가의 삶은 그동안 하나님을 등진 채 형성된 모든 것, 곧 죄성에 대한 죽임이며 이것을 자존심의 죽음과, 특권의식의 죽음과, 편견과 야망의 죽음과 야망과 안락의 죽음에 이어 열등감이나 우월감의 죽음, 낙심과 절망의 죽음, 특별히 예수 없이도 잘 할 수 있다는 자존심의 죽음으로 나누어 말합니다.

이 죽음이 겸손을 이끌어내고 겸손이 구원의 기쁜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여인의 대답이 어떻게 시작합니까? “주여 옳소이다마는겸손한 사람들의 전형적인 화법입니다. 첫 시작의 말이 부정이 아니라 긍정입니다. 부정적인 사람이나 교만한 자의 말은 대부분 아니. 그게 아니라..” “말도 안 되지요.” “천만의 말씀” “쓸데없는 소리..” 등으로 시작합니다. 사단 앞에 이런 말들이 내면에서 단호하게 사용되길 주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때 누군가의 어투가 유행된 적이 있는데 매우 교훈적이라 기억됩니다. “맞습니다. 맞고요.” 부드러운 말의 시작은 상대의 긴장을 풀게 하고 무장을 느슨하게 해 평화로운 해결을 향해 가게 합니다. 교회에서는 아멘의 사람 되시길 바랍니다. 마음에 새기세요. -아멘풍성-은혜풍성. 예배성공-인생성공-

 

성도 여러분.

수로보니게여인은 이 겸손으로 귀신들린 어린 딸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고쳤습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딸이 고침 받은 것 못지않게 딸로 인해 낮아지고 간절해진 엄마가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숨 막히는 불행이 주의 간섭으로 속히 떠나가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 지리멸렬한 긴 고통의 날들이 가져다주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보지 못합니다. 그 고난 중에 진행되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지 못해 불평하고 낙심하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은 즉시 감사와 기도와 찬양으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그 분 앞에서 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다스리고 계시며 원하시는 모든 것 다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 분 손 안에는 우리가 구하지 않아 주지 못한 갖은 복이 가득합니다. 다만 사랑하는 자녀가 스스로의 의견과 결정으로 당신을 신뢰하며 교제하며 구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에 태어나 성공해 다 가진 자라도 진정 중요한 하나님의 영생이 없다면 그의 모든 것은 육신의 죽음과 함께 다 사라집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험한 꼴을 다 만나 온갖 슬픔 속에서 슬피 울며 가도 영생의 주님을 만나면 우리 인생, 육신의 끝이 모든 것의 새 출발임을 압니다. 우리는 예수의 손을 붙잡고 영원한 소망 천국을 향해 가는 나그네들입니다. 나그네는 비록 피곤해도 희망이 있습니다. 거기서 기다리는 아버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수로보니게여인을 하대하시고 구원하신 예수그리스도, 어둠 한가운데 방치돼 있던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그리스도, 그분에게서 새롭게 발견되는 모든 것은 우리에게 복음입니다. 그분은 끝없이 우리에게 새로움으로 드러나실 만큼 크신 하나님이시며 우리생명의 근원 아버지, 찬송받아 마땅하신 한분 주님이십니다.

천한 개들도 주인의 아이들이 흘린 부스러기로 구원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 우리는 복음의 생명방주를 타고 천국까지 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절박한 정황은 간절한 마음, 가난한 심령을 만들고 가난한 심령은 주의 말씀에 목마른 심령이 되어 복음을 꿀같이 받아 천국을 소유하게 됩니다.

 

저와 함께 여러분, 엎드려 겸손하기 애쓰는 사람되어 우리 안에 옛사람 속히 떠나고 새 영을 받아 기쁨의 삶과 믿음과 관계를 누리게 되기 주님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