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8.05. 주일설교 <행3:2-8. 성전 미문의 평생걸인>
[지성, 학력. 재산. 외모, 품격. 가문과 DNA, 내가 세상에 나가 무엇으로 겨루고 무엇으로 버틸까? 뛰고 나는 자들 앞에 늘 주눅 들어 무엇을 할까? 각 분야에 뛰어난 자들이 가득한 세상에 딱 하나, 내가 해볼 만하고 기뻐하며 노래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복음뿐이다. 부모, 친구, 스승, 배필, 자녀와의 만남에서 모두 실패한다 해도 마지막 예수그리스도를 만나면 승리이듯 모든 것이 시원치 않아도 복음과의 만남은 꼴찌인 나를 총체적 우등생이 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무식한 어부출신 베드로가 성령의 임재로 인해 담대히 복음을 전하니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구원받은 3천명이 모두 제자가 됩니다. 베드로는 이제 갑자기 많아진 군중들 사이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말씀을 선포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도 주님의 일로 너무 바빠서 아플 시간도 없고 해야 할 일 때문에 맘 편히 죽을 수도 없는 그런 삶이길 소원합니다.
걷지 못하는 자로 태어난 한사람이 사람들에게 들려서 성전 미문에 구걸하기 위해 나왔습니다. 평생 그렇게 살아온 걸인의 비참한 삶입니다. 태어날 때 이미 그의 평생은 남에게 얻어먹도록 돼 있었습니다. 베드로일행에게 그는 하던 대로 손을 벌렸습니다.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선포했습니다. 하반신을 못쓰던 걸인은 즉시 일어나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미하였습니다. 본문의 장애걸인을 통해 저와 여러분을 살피며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먼저, 우리는 본문의 장애걸인과 뭐가 같고 다른가?
그날 거기 성전美門(이방인의 뜰에서 동쪽 작은 문)에 앉았던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걸인처럼
1. 우리가 나면서부터 죄인이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형편은 다 달라도 우리는 모두 어쩔 수 없는 죄인들입니다. 세상은 이 죄인이란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를 죄인으로 규정합니다. 에덴에서 죄지은 뒤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영이 떠남으로 모든 인간은 죄인의 신분으로 세상에 태어나게 된 겁니다. 다행히 우리에겐 양심이라는 하나님의 선물이 있어서 그 양심으로 우리가 악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아기들을 보면서 흔히 천사의 모습이라고 하는데 어린 아기를 보면 인간이 과연 악하다는 것을 쉽게 알게 됩니다. 새로 태어난 동생을 질투로 눈을 쑤시고 입을 찢는 것은 우리가 죄 속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밥 세끼 편안히 먹어도 이웃이 잘 풀리면 뭔지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전3:3. 성령이 안 계시는 동안이라면, 우리는 죄를 품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안의 죄성이 활동하면 그대로 범죄가 되는 것입니다. 의인은 하는 일마다 의로운 일이고 죄인은 생각하는 것마다 죄 지을 생각이요, 하는 일마다 죄가 됩니다.
그날 거기 성전미문의 장애인처럼 나면서부터 죄인인 우리가,
2. 예수님을 만나 구원받았습니다.
이 죄인의 신분은 우리의 의지로 바뀌지 않습니다. 돈으로도, 지식으로도 명예와 인격으로도 바뀌지 않습니다. 갚아야 할 죄의 대가를 누군가 대신 치러줘야 합니다. 하는 일마다 죄가 되는 죄인의 삶에 예수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그분은 죄가 없으십니다(히4:15). 우리 죄를 대신 갚아주실 분은 당연히 죄가 없어야만 합니다. 그러니 죄인가운데에는 대속자를 구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죄도 못 갚는데 누구의 죄를 대신 갚겠습니까? 그래서 빚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탕감받은 우리들은 영원히 예수님께 빚진 자들입니다. 우린 평생 그래서 그를 섬기고 높이며 살아가야 합니다. 매우 당연한 일입니다. 당연한 이 찬송과 경배가 자비로우신 주님 앞에선 또 칭찬거리가 되니 얼마나 사랑풍성하신 주님이십니까?
가난한 이웃을 우리는 여러 가지로 도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매우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처럼 먼저 그리스도의 도를 전하는 복음의 나눔으로 하나 되는 일이 다른 선행과 병행되어야 합니다. 복음이 빠진 선행과 구제는 자칫 자신의 이름과 덕을 드러냄으로 자기우상과 위선과 자만에 빠지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에 모든 공덕은 오직 예수님의 이름 앞에 올려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죽었던 자들이었고 예수님이 대신 죽어주심으로 죽은 우리를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이제 우리의 삶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삶이요, 영광입니다. 즉 구원받은 우리의 선행은 우리를 구원하신 그분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이며 그분의 이름 앞에 모든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평생을 영적불구자로 죽은 삶은 살아야 할 우리들,
3. 우리에게 있는 것은 보이는 것보다 더 귀한 복음의 능력입니다.
나면서부터 걸어보지 못한 다리가 벌떡 일어서서 걷고 뛸 때 사람들은 망연자실, 놀랍니다. 하나님이 하셨다는 가슴 벅찬 증거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겁입니다. 이러한 감격의 기쁜 증거가 시간 차(差)일뿐 우리 삶에 충만한 줄 믿습니다.
여러분이 받은 만가지 복과 은총이 행여 여러분의 작은 수고로 인한 것이라고 착각하는 일은 결코 없기를 바랍니다. 15세기 종교개혁의 공로자 칼뱅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묘비와 묘비명을 거부하였습니다. 묘지를 웅장하게 만들고 화려한 관속에 눕고 감동적인 수식어로 그의 생전을 그럴싸하게 장식하는 묘비를 거부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베드로의 고백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저와 여러분.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에게 넘치는 감격일지라도 우리는 하나같이 손에 잡힐 듯한 많은 것을 요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 좋으신 예수님은 그것들보다 훨씬 더 크고 소중한 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원하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가 잊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주신 것을 소홀히 하거나 모르고 산다는 겁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서지도 걷지도 못하는 부자유한 몸, 나면서부터 앉아서만 살아야 하는 이의 맺힌 한을 한번 생각해보셨습니까? 그에게 절실한 것은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 아닙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는 것입니다. 가고 싶은 곳에 내 발로 걸어가 보는 겁니다. 걸을 수 있고 뛸 수도 있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걷고 뛸 수 있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을 우리는 잊고 살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구걸하던 사람에게 말한 것, 그것은 은과 금이 아니라 베드로 안에 있고 오늘 저와 여러분 안에 있는 복음입니다. 본문 8절은 그가 복음의 명령,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에 의지한 명령을 듣고 즉시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 발로 서서 그의 명령, 영생을 받았고 이제 그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는 영생과 소망의 사람들입니다. 넘치는 주님의 풍성이 우리가운데 있는 줄 믿으시면 아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나면서부터 하체장애인 사람이 베드로의 축복을 받고 일어선 것처럼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만나 죽은 영혼을 영원한 새 생명으로 바꾸어 선물로 받았습니다. 성전미문에 평생 앉아 있어야 하는 걸인은 하나님의 복음으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자신을 구해주신 하나님을 소리쳐 찬송했습니다. 이제 우리의 찬송, 우리의 자랑은 우리자신의 부끄러운 이름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드려서 죽을 우리를 구해주신 우리구주 예수님 한 분이십니다. 이제 남은 삶은 우리도 베드로처럼 복음을 선포함으로 믿음으로 받은 구원을 이웃에게 전파하고 축복하며 선포할 수 있기 소원합니다.
복음의 능력은 내면의 크기나 인격이 아니라 영혼의 투명성에 있습니다. 욥기 23:9-10절 말씀이 떠오릅니다.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 쪽에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맑은 영혼, 저와 여러분의 영혼이 어떤 불시련 속에서도 정금, 순금같이 맑아질 줄 믿습니다. 세상 것을 다 빼앗겨도 영혼을 지켜야 합니다. 순간의 땅에서 마지막 최고의 자산은 오직 영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손에 든 것은 없었으나 믿음으로 선포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과 권세, 이 시간에도 믿고 구하는 모든 자에게 넘치게 부어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주의 권세와 능력을 간단히 점검하면서 말씀을 마칠까 합니다.
매우 진지하면서도 철학적인 다음 네 개의 질문이 너무 소중해서 공유하기 원합니다.
1. 나는 누구이며 또 뭘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그리스도의 제자, 하나님의 자녀답게)
2. 나의 잠재력은 어디까지며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능력주시는 이 안에서 무한대)
3. 어떤 기준에 따라 나를 평가해야하며 그리고 그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오직 예수그리스도)
4. 어떻게 해야 나의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으며 나의 한계는 무엇인가?(주께 의탁함으로 무한)
이 질문의 답에는 항상 예수그리스도가 근본이 되신 줄 믿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그의 나라를 위하여 살며 나의 잠재력은 주님이 주시는 능력 안에서 무한한 것이며 오직 말씀만이 나를 평가하니 수군대는 소문이나 모함이나 오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질문 네 개를 머리맡에 붙여두고 잠들기 전 기도 후에 묵상하기 바랍니다.
기도합니다.
일마다 때마다 찬미예수로 기뻐할지어다. 감사할지어다.
복음으로 인하여 걷고 뛰는 자여. 그 복음을 전하고 선포할지어다.
자여손 만대 복음만이 유업이요, 길이 될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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