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8.12. 주일설교 <요 19:26-27. 보라 네 어머니라.>
[내가 누구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확고한 소신이 있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의 삶은 격이 다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없다. 본래의 나는 한없이 부족하고 악하지만 주께서 택하셔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우셨고 거룩한 나라와 그분의 소유된 천국백성이 됐다. 그리고 그 이유는 어둠에서 부르시고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이끌어 내신 그리스도의 기이하고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함(베드로전서 2:9-10절)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할지가 분명해진다. 나는 사라져 안 보여야 하고 오직 날 위해 죽으시고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만 보여야 한다. 주님의 목적은 내가 어떤 생각을 하며 어딜 가든 달라지지 않는다.]
세상에는 많은 기관과 단체가 있지만 하나님이 친히 세우시고 운영하시는 기관은 가정과 교회 둘뿐입니다. 가정은 이미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를 통해 이루시고 교회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베드로의 고백위에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이 두 기관을 통해 주님의 하나님나라운동은 어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정과 교회는 결코 별개의 것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가정이 작은 교회라면 교회는 큰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는 기도와 찬송과 말씀묵상이 끊이지 않는 것이 정상적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모든 가정의 기능이 확대돼야 합니다. 가정은 세상에서 지친 몸과 마음이 위로와 쉼을 얻고 고침을 받아 그렇게 새로운 힘으로 충전돼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는 보금자리입니다. 그렇게 가정과 교회는 위로와 안식과 기쁨과 회복이 이뤄지는 곳입니다.
우리 교회가 적어도 건강한 교회인 것으로 인하여 주님께 감사하며 기뻐합니다. 건강한 교회는 건강한 가정으로 구성됩니다. 건강한 가정이란 건강한 가족들로 세워지는데 건강한 자아상이 가족구성원마다 충만해야 합니다. 건강한 자존감으로 육체마저 건강해지는 것을 믿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자신을 발견하고 제자리를 알아가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는 가정이 갖는 모든 기능을 갖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갑니다. 어머니는 어머니의 역할을 수행하고 아버지는 아버지의 책임을 다하게 됩니다. 자녀는 자녀대로 할 일을 합니다.
오늘 본문은 주께서 십자가에 달린 채 운명직전에 하신 유언 중 육신에 관한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감당하시는 중에 유일하게 육신의 예수님을 읽을 수 있는 부분으로서 매우 중요한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은 짧은 순간 마리아의 아들 인간 예수로 돌아와 어머니 마리아의 애끓는 모습을 보시고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합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제자와 어머니를 모자로 이어주신 뒤 주님은 곧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뒤 숨을 거둡니다. 자신의 빈자리를 사랑하는 제자로 채우시고 어머니를 부탁하는 주님의 마지막 모습이 우리를 숙연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인 동시에 하나님의 신이 잠시 육체를 입으신 하나님의 실존이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직관과 예지와 권능은 아무도 따를 수 없습니다. 그분이 죄인들을 위해 이 땅에 오셔서 그 마지막 사역을 향하여 지극히 고통스런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시기 직전에 하신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깨워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육신으로 낳아야만 내 자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선 그러한 인생들의 세상적인 통념 밖에서 부모자녀의 관계를 선포하셨습니다.
4복음서에서 이름대신 그의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기록된 사람은 훗날 밧모섬에 유배돼 뼈만 남았을 때 주께서 나타나 보여주신 환상을 그대로 받아 적어 계시록을 기록한 요한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요한이 부러웠습니다. 요한처럼 이런 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영광이며 인생의 대변혁인지 모릅니다. 어린 시절 누군가를 뼛속 깊이 존경하고 따르고 싶었던 많은 날들을 기억합니다. 지금도 젊은이들이 말할 수 없는 외로움과 허탈감으로 엉뚱한 곳을 찾아 밤을 새워 방황합니다. 위대한 스승은 지식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학력이나 재산이나 외모나 건강이나 명예가 결코 존경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내면의 향기가 그윽한 인품 그것을 사람들은 기쁨으로 섬기기 원합니다. 그건 돈으로 살 수 없고 어떠한 것으로도 대신 할 수 없습니다. 나이 들고 보니 주변에 퍽 좋으신 분들이 제법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 것이 이제 더욱 마음이 아픕니다. 깊은 상처로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억울한 장기복역수가 위대한 소설을 쓰듯 여전히 모든 것은 받는 자의 몫이라는 말이 맞습니다. 이제는 내가 그런 훈훈한 사람이 돼 과거의 나처럼 한 스승을 찾는 젊은이를 품고 싶은데 그것은 너무 버거운 평생의 과업임을 알고 기가 죽습니다. 그때마다 한분이 나를 향해 다가오십니다. 예수그리스도십니다. 그렇게도 사모하던 큰바위얼굴은 바로 내 안에 계셨던 겁니다. 이제 우린 다만 그분의 끝없는 사랑과 훈훈한 품을 그리고 거기서 흘러넘치는 새생명을 만나지 못해 평생 목말라하는 젊은 인생들과 뭇 영혼들에게 잘 전달하는 것만이 우리의 소원이어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주님을 스승으로 만난 요한보다 더 복된 자는 바로 예수님을 신랑주님으로 맞이한 우리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요한은 말할 수 없는 핍박과 고난 속에서 험난한 제자의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12제자 모두 예수님의 제자라는 신분의 대가를 톡톡히 치렀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분이 손 내밀 때 도리질을 치던 자들입니다. 이젠 너무 편하여 오히려 믿음을 유지하고 키우기 어려울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간혹 시련이 도리어 복된 우리네 풍요의 삶입니다.
오래전 일입니다. 가난한 친구들이 부모님따라 채석장일하다가 숙제를 못해서 손바닥을 맞고 앞에 나와 한 줄로 서 있었습니다. 선생님도 친구들의 사정을 알고는 심하게 나무라지 않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너희들 채석장에 가서 부모님 돌 고를 때 도와 드린 것 나도 안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욱 열심히 공부해야 가난을 면하게 된단 말이다. 숙제 안하는 놈들은 부자가 못돼요.” 선생님은 아이들이 훌쩍거리기 시작하자 아픈 마음을 참고 모두 자리에 들여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숙제 잘해온 아이 하나가 훌쩍였습니다. 그 아이는 서울서 이사 온 뚱뚱하고 착한 부잣집아이였습니다. “넌 왜 우니? 이놈.” 아이가 말합니다. “선생님. 우리집 기사아저씨네 강아지가 죽었는데요.” “근데 강아지도 채석장일 하느라 숙제를 못했냐?” “아뇨. 장례식에 돈이 모자라 예쁜 관에 넣지 못하고 사과 궤짝에다 넣었대요. 강아지가 너무 불쌍해요.”
주변을 보세요. 서울서 이사 온 그 뚱뚱하고 맘씨 착한 아이가 참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같이 다 말할 수 없는 풍요가운데 편안한 신앙생활을 합니다. 평화의 시대를 살아가는 자는 그 값을 치루며 살아가자고 했습니다. 그 값은 무엇입니까? 기도로 겸손함을 유지하려는 몸부림이며 거저 받은 구원과 풍성을 이웃에게 값없이 나누려는 고민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지막 결론은 겸손과 희생과 섬김입니다. 겸손한 자 누구에게나 스승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한 사람의 훈훈하고 넓은 품에 안기고 싶어 합니다. 겸온한 자에게 많은 영적자녀와 벗들이 달려와 안길 것입니다. 우린정녕 그리스도의 피로 한 교회안에서 한 가족이 된 귀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서로 사랑하지 않고는 전도하지 않고는 본인이 가장 큰 외로움을 느낍니다.
주님 말씀하실 때 그 형제들과 어머니가 찾아왔습니다. “주여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찾아오셨나이다. 누가 내 어머니이고 누가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영적인 부모는 그 값을 평소에 치러야 합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주님이 보이신 겸손과 희생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을 순 없어도 지극순결, 그윽한 사랑으로 주변의 영혼들을 품고 기도해야 합니다. 내자녀, 네자녀 모두 주님의 귀한 생명들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람이 소유한 사랑, 거긴 눈물의 기도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자녀들도 영적인 부모님인 어르신들을 위하여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육신의 부모나 영적인 부모들의 삶은 청년들에게 있어서 실패든 승리든 여전히 피할 수 없는 교과서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성도의 가족에 대한 새로운 성경적 정의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이룬 가정과 교회는...
1. 하나님의 뜻으로 하나 된 자들의 모임입니다.
세상은 여러 이유로 하나 되길 즐거워하고 모이기에 노력합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기에 힘을 다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하나 됐다는 건 자신의 고집이나 유익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구원과 주의 뜻을 삶의 뿌리로 삼아 기쁜 마음으로 양보하고 희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2. 그리스도의 피가 온 몸에 흐르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자신 안에 흐른다함은 나의 죄악된 생명은 이미 죽고 내안에 예수의 새 생명과 삶이 시작되었음을 말합니다. 나를 온전히 내어 드린 것입니다.
3. 자신의 십자가를 겸손하게 지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스스로의 십자가는 자신 안에서 끊임없이 올라오는 죄의 싹들을 잘라내는 일상의 전투를 쉬지 않고 할 때에 힘을 다한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께서 운명직전 먼저 모친에게 “여인이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떠나는 자신을 대신해 사랑하는 제자를 어머니에게 아들로 드리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제자에게는 “보라, 네 어머니시니라.”고 하시며 어머니로 모실 것을 당부하십니다.
이 말씀을 우린 그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되어 이렇게 듣기 원합니다. “보라, 내 보혈로 거듭난 네 형제요, 네 자매요. 네 골육치진이니라.”이게 오늘 결론입니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마리아처럼 우리의 주변은 예수복음으로 인도해 구원해 들여야 할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영혼의 눈이 감겨 있어 어둠 가운데 사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줄도 모릅니다.
부모는 부모의 도리를, 자녀는 자녀의 도리를, 제자는 제자의 도리를 십자가를 지는 겸손한 맘으로 잘 감당한다면 건강한 관계의 기초가 단단해 어떤 바람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을 줄 압니다. 혹 가정에서 지친 분이 있습니까? 부모, 형제로부터 뼈저린 상처가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보혈로 이루신 교회라는 하나님의 가정에서 새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감격을 통해 새 힘 얻어 모든 것이 회복돼 전도승리로 이어지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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