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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2018.09.09. 주일예배<마17:1-8. 변형된 주님모습.>

by 설렘심목 2018. 9. 9.

2018.09.09. 주일예배<17:1-8. 변형된 주님모습.>


[인격과 교양의 기본은 가정에서 어린 날 이뤄지는데 십중팔구 실패한다. 그래서 기본을 배우지 못하고 문밖으로 나온 아이들은 곳곳에서 부딪치며 배우는데 지불하는 댓가가 만만치 않고 드물게는 자살로 이어지기도 한다. 교회는 모든 교육, 즉 공교육, 또래집단에서의 학습, 사회교육 등에서 놓친 것들을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치유하며 바로 잡아주는 곳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뵈는 것을 이끌어가는 안 뵈는 것에 대한 설교와 교훈을 예수의 영을 섬기며 의존하여 하는 곳이다. 이는 죄에 물든 인생들을 옳은 데로 인도하는 세상이 마지막으로 찾을만한 유일한 사실상의 소망이다. 그래서 교회의 부패와 타락은 곧장 국가의 쇠락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마지막 책임은 교회지도자에게 있다는 엄중한 사실이 오늘도 나를 억누른다.]

 

열두 제자 중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사람은 특별히 총애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여기서 제자 세 사람은 특별한 광경을 보게 되는데 이 산을 훗날 사람들은 변화산이라 부르게 됩니다. 제자들이 본 장면은 모세와 엘리야와 주님이 함께 대화하는 장면입니다. 왜 이런 광경을 제자들에게 보이셨을까? 그리고 이 장면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는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걸까? 성경은 토씨하나에도 깊은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습니다. 변화산에서 제자들에게 보이신 변형된 주님의 모습과 모세와 엘리야, 오늘 우리도 영의 눈으로 보면서 함께 주님의 뜻을 구해 능력 있고 알찬 제자의 삶이되기 주님이름으로 기대합니다. 본문 2-3절을 함께 읽습니다.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변화산에서 일어난 일 그 첫째,

 

1. 변형된 주님의 얼굴입니다.

 

주님의 얼굴이 바뀌며 해처럼 빛납니다. 변형이란 원어는 형질을 포함한 형체의 변화를 말합니다. 즉 이후의 예수님은 그 이전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형질과 형체를 받은 겁니다. 당시 잘 믿어도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더욱이 멀지 않은 곳에 한 목수의 아들로 살던 청년을 이스라엘의 구세주로 믿기에는 무리였습니다.

 

제자들은 상당한 수준의 믿음에 이르렀으나 주님은 아직도 더 보여줄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의 변화산 사건은 예수님의 완전성가운데 신성을 드러낸 것 중 하나였습니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을 받아 내려올 때 백성들이 보았던 모세의 빛나는 얼굴은 율법이 갖는 권위의 표징이었습니다. 그 증거가 모세의 얼굴에 빛으로 영광을 드러낸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얼굴이 빛나 옷조차 희어진 것은 주님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나고 있음을 뜻합니다. 주님은 부활의 능력이요, 그것을 증거하는 복음이셨습니다. 시나이 산에서 율법, 십계명을 받은 모세의 얼굴도 빛이 났는데 복음이신 주님께서 어찌 빛이 나질 않겠습니까? 복음의 빛은 용서하시는 사랑의 빛이요, 율법의 빛은 공의를 앞세운 사랑의 빛이었습니다. 모세는 얼굴꺼풀의 광채였다고 했으나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은 변형이라는 표현으로 구분되고 있습니다. 율법과 복음의 차이를 말할뿐더러 전달자인 모세와 하나님자신의 영광인 예수그리스도와의 분명한 구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이 예고되고 본격적인 구원사역이 시작되기 전 예수님의 형질과 형체를 인간의 것과 구분해 완전한 변화를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믿고 세례받아 변화받으면 때를 따라 채우시고 성장시키시는 성령의 역사에 힘을 입어 감당할 수 없던 일들을 감당하게 됩니다.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단순히 겉모양뿐입니까? 겉은 속을 표현합니다. 내면에는 우리가 다 알 수없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질만한 능력과 권세였습니다. 주님은 권능자체이시지만 변화산은 아직도 인간의 육체에 계신 우리 주님의 신성을 제자들에게 증거하시는 하나님의 순서였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에게 신기하고 놀라운 체험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을 하라고 미리 주신 능력의 선물인 줄 믿기 바랍니다. 제자들은 충격적인 광경에 놀랍니다. 더욱 놀란 것은 모세와 엘리야를 본 것입니다. 3절을 함께 읽습니다.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변화산에서 일어난 일 두 번째,

 

2.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모세하면 다른 말로 율법의 선지자입니다. 그리고 엘리야하면 다른 말로 예언의 선지자입니다. 두 선지자는 율법과 예언의 대표적 선지자입니다. 변화산에서 그리스도를 만나 상면했다는 건 어떤 의미를 제자들에게 일러주는 것일까? 5b에서 들려주신 하나님의 음성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영적신분의 확증과 권위의 선포는 물론, 우리는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을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그들을 산에서 만나셨을까? 율법과 예언의 상징인 두 선지자, 그렇다면 우리주님 그리스도는 무엇의 상징입니까? 그렇습니다. 성취의 상징이요, 그 성취는 언약과 복음의 성취이며 완성의 선포입니다. 제자들에게 보인 것은 그러므로 율법의 완성이요, 예언의 성취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으로 이뤄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이전의 16장에서 주님은 이미 당신의 십자가수난과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을 예고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높은 산, 변화산에서 율법과 예언과 완성이라는 큰 주제를 중요한 제자들 세 사람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주제인 완성은 부활이라는 영광으로 모든 것의 마침이 되게 하신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제자들을 통하여 만민에게 알게 하시려는 일이었습니다. 즉 부활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통해서 모든 율법과 예언을 끝냅니다. 그리고 오직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만민에게 유업으로 주실 그리스도로 인하여 언약을 성취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변형사건은 이제 언약이라는 측면에서도 우리에게 상당한 의미와 증거로 자리잡게 됩니다. 7:14절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다음 미5:2절입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족속 중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오래전 선지자들을 통한 예언의 말씀은 불순종으로 고통당하며 비참한 노예생활로 살아가던 이스라엘에게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그 메시야대망의 꿈이 지금 변화산 꼭대기에서 제자들에게 분명한 비전을 눈에 보여주신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제자들은 너무 놀라 흥분했습니다. 베드로는 생애 최고의 날, 입을 다물고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4절입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변화산에서 일어난 일 세 번째,

 

3. 영광의 자리에 머물고 싶은 인생들, 대표적인 베드로입니다.

 

변화산에서 보여준 광경은 율법과 예언이 복음으로 통합되어서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첫 출발, 그 위대한 만남이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와 주님의 만남은 언약성취, 율법완성의 현장으로서 인생들에게 최고의 복음이 눈에 보였다는 점에서 계시록에 버금가는 귀한 장면입니다. 베드로는 더도 덜도 아닌 그대로가 최고최상이라는 확신에 흥분했습니다. 초막 셋을 짓자는 겁니다. 산 아래 세상은 아랑곳없이 여기서 환상적인 최상의 삶을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모시며 살고 싶은 겁니다. 베드로의 이 웃지 못 할 정중한 제의를 우리는 진지하게 살펴야 합니다. 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골고다수난을 예언한지 얼마 안 돼 보게 된 이 놀라운 광경, 이는 실로 너무나 감격스럽고 황홀한 장면입니다. 이대로 여기 눌러 살면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힘을 모으면 십자가로 갈 이유가 없을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입장에서 생각하고 말합니다. 참새가 감히 어찌 봉황의 뜻을 알겠냐는 말처럼 하나님의 계획과 하시는 일을 우리는 감히 짐작조차 못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몸을 입고 오신 이유는 죄인구원입니다. 죄인구원은 반드시 죄를 용서해야 한다는 부담을 안고 있습니다. 그리고 죄용서는 반드시 희생을 드려 죄값을 치러야 하는 제사를 통과해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켜드려야 합니다. 희생의 죄값, 여기에 십자가는 건너 뛸 수 없는 중요한 과정으로서 그것은 하나님의 숙제였습니다. 다시 전합니다. 이는 죄인의 숙제가 아니라 우리 주님의 숙제였습니다. 죄인들인 저나 여러분은 죽어 있어서 아무감각도 없고 깨달음도 없습니다. 죽은 자에겐 과제도 주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거듭 태어났으니 이제 구원받은 새생명으로서 희생과 섬김과 헌신이라는 숙제를 십자가로 받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희생의 보혈이 하나님께 올려드려지자 인간의 죄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모든 자에게 용서되는 길이 열렸습니다. 베드로는 그대로 거기 머물러 살기를 원했지만 그것은 앞으로 펼쳐질 구원의 사역을 몰라서 한 말입니다. 찬송가 4423절에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로운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고 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종일 말씀 듣고 찬송 부르면서 살았으면 좋겠단 생각도 해봅니다. 그렇다면 거긴 필시 천국일 것입니다. 천국에선 돈 벌지 않아도 됩니다. 종일 기쁜 노래만 할 수 있는 곳, 눈물 없는 거길 가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주님과 함께 이 세상을 십자가라는 다리를 통과해야 합니다. 성도의 영광은 항상 십자가 너머에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힘으로 감당하지 못합니다. 주님을 믿고 그 뒤를 따라가야 가능합니다. 5절을 함께 읽습니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변화산에서 일어난 일 네 번째,

 

4. 주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제자들이 할 일은 초막 셋을 짓는 일이 아니라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입니다. 구름 속에서 음성이 들리는 초자연적 현상 앞에 그들은 두려워 엎드렸습니다. 주님이 오셔서 손을 대며 두려워말고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일어나보니 모세와 엘리야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치 무슨 꿈을 꾼 것 같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은 두려워 말라는 예수님과 그 예수님의 말을 잘 들으라는 하나님의 명령뿐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은 변화산에서 하나님이 하신 말씀과 주님이 하신 말씀, 두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둘째, 두려워 말고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앞에 어떤 환상도, 정황도 다 주께서 권세로 다스리시는 줄 믿기 바랍니다. 필요해서 주신 모든 것들 때로는 우리들의 실수조차 그의 권세 앞에 귀한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에겐 율법과 예언의 구약과 그것들을 완전히 끝내셔서 죄인들을 구하신 복음의 신약이 새 계명, 새 언약으로 함께 하고 있습니다. 거긴 어린양의 보혈이 생명의 강을 이룹니다. 누구든지 와서 마시면 영생을 얻어 세상과 율법의 정죄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자유로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이제 다만 그리스도께만 노예요, 종이 되기 원합니다. 주를 따르는 겸손한 자, 그 이름을 종에서 자유자로, 백성에서 신부로 높여주십니다. 오늘 말씀을 들은 우리 모두의 심령 속 높은 산 지성소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주님의 만남이 늘 증거 되기 바랍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