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04월08일 주일설교<렘29:10-14.사로잡힌 자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
[암탉은 뱃속에 알을 키워감으로 밥값을 하고 개는 집을 지키고 귀염을 떨어 삶을 유지한다. 모든 생명들이 자신을 지켜가는 방법과 이유가 있다. 한주간이 놀랍도록 빠르게 지난다. 빠른 세월 속에 나는 어떤 씨를 품고 싹을 틔워 어떤 열매를 바라며 나라는 존재를 규정하고 있는지 살펴 그 목적을 잊지 않아 지치지 않도록 스스로를 챙겨야 한다. 목적이 흐려지면 지치기 때문이다.] 좌표 잃은 배는 지친다.
“나는 이 좋은 백향목궁에 있는데 하나님의 궤는 천막가운데 있으니 어찌할까?” “내가 언제 너희에게 집 지어 달라던가? 그 맘 알았으니 도리어 내가 네 가문을 세워 네 왕위가 끊이지 않게 할 것이고 네 자손가운데 영원한 평강의 왕을 내리라.” 다윗은 그때 낳은 아들을 크게 기대하고 나단선지자로부터 받았던 여디디야라는 이름을 솔로몬으로 정합니다. 여디디야는 여호와께 사랑을 입은 자라는 뜻인데 다윗은 자신의 파란만장한 삶을 다시는 이어받지 않기 바라는 마음에 평화의 아들이란 뜻의 솔로몬이란 이름을 택합니다. 오늘 우리는 나단이 예언한 평강의 왕은 예수님인 것을 압니다. 솔로몬은 이름처럼 태평성대를 이루었지만 결국 그도 풍요가 가져다주는 부패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노년은 치마폭에 싸여 우상을 숭배했고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은 둘로 쪼개집니다.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은 계속되는 범죄 속에서 결국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고 유다는 138년이 지난 주전 585년 시드기야의 뼈아픈 비극으로 막을 내립니다.
동쪽에는 앗수르, 남쪽에는 애굽과 북쪽으론 바벨론을 두고 있는 이스라엘과 유다는 늘 강대국의 경제와 전략적 요충지가 돼 크고 작은 전쟁이 있었습니다. 강대국틈바구니에서 생존을 위해 늘 고도의 전략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는 하나님의 백성들, 강대국들 사이에서 그들은 여기서 밟히고 저기서 두드려 맞는 샌드위치 환경이 오히려 하나님께 전적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어서, 믿음을 키우기엔 최적이었으나 신앙 없는 왕들은 한사코 전략 짜기에 온 마음을 다하고 선지자의 음성을 무시했습니다. 당시 예레미야는 차라리 유다가 바벨론에게 복종, 포로로 끌려가서 앗수르와 애급의 칼을 피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냐 등 일파들은 곧 느부갓네살의 목이 꺾인다고 예언해 시드기야왕은 애급에 지원병을 요청하기에 이릅니다. 바벨론에 본격적인 반기를 들게 된 시드기야, 결국 눈앞에서 두 아들이 처형되는 것을 본 뒤 두 눈을 뽑히는 비참한 유다의 마지막 왕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시드기야는 인간적으로 착한 심성의 사람이었습니다. 신앙이 약한 데다가 귀가 여려서 우유부단하고 용기없고 단호하지 못했던 착한 시드기야, 그는 착하기만 한 것이 얼마나 악한 결과를 부르는지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우리 모두 하나님이 아닌 다른 어떠한 것에 사로잡히지는 않았습니까? 우리를 포로로 잡은 세상의 권력들, 돈의 권세, 칭찬의 힘, 예술혼의 영향력, 그럴싸한 인본사상들과 철학과 고상한 정서의 유혹, 육체, 이름을 내고 싶은 마음, 알아주기 원하는 몸부림, 수많은 달콤함 앞에 우리 과연 얼마나 자유로운가? 사랑이라는 이름아래 여기저기 포로된 영혼이 하나님보다 인간을 더욱 소중히 안고 가는, 우리가 오늘 시드기야를 보기 원합니다. 진정 주님께만 포로 되어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함을 더하는 오늘 이후의 삶이기 원합니다. 10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니라. 바벨론에서 칠십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사로잡힌 자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 그 첫 번째..
1. 깨달아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애굽이나 앗수르에 손 내밀지 말고 바벨론으로 가서 통치를 받아 70년 간 포로로 살라고 합니다. 당시 쇠퇴기에 있던 애굽은 이스라엘의 지도층을 그대로 유지하는 권력우대정책을 폅니다. 그래서 서민들은 더욱 쪼들렸지만 부유층은 비록 패전국이라 해도 살만했습니다. 그러나 신흥바벨론은 애굽의 지도층우대정책과는 달리 천민을 뽑아 관리로 등용하는 등 권력재편을 단행하여 그간 누리며 잘 살던 지도층은 본국으로 끌고 가 노예로 삼는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지도층들은 권력의 시녀가 된 선지자 하나냐와 함께 시드기야를 설득해 바벨론에 반기를 들고 애급에 원조를 요청하게 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회개를 원하시는 하나님은 타락한 지도층의 기고만장했던 그동안의 우상숭배와 부패를 근절하고 회개시키기 위해 바벨론에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결국 3차에 걸쳐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겸손히 선지자의 음성을 듣지 않고 자신들이 유리한 애급으로 가자며 왕을 설득했고 본문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 칠십년을 보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때 이스라엘로 하여금 다시 고향땅을 밟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칠십년이라는 기간은 첫째, 하나님이 정하신 회복과 치유의 기간입니다.
믿음이 회복함으로 양심과 정의가 회복해서 반듯한 제사가 회복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신앙회복은 인격과 양심의 변화를 가능하게 합니다. 그런 내면의 변화는 이어 모든 변화로 나타납니다. 70년 세월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로 타락한 사회의 부패를 철저히 돌아보며 자녀들을 바로 가르치고 온전한 믿음으로 돌이키는 충분한 세월입니다.
70년이란 기간은 둘째, 회초리로 인해 당할 손실을 막고 자생력을 키워주는 하나님의 양육장치였습니다. 애급은 서서히 시들어갔고 신흥강국 바벨론은 정치, 경제, 문화, 국방 모든 분야에 있어 신선한 바람이 일어나던 때입니다. 패전국에 대해서도 상당히 공평관대해서 어느 정도 자치권을 주되 자신들에게 대항해서 나라를 그 지경으로 만든 지도자들은 낮추고 똑똑해도 머리 못 들던 하위계층 서민들이 등용됐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을 쇄신하는 귀한 세월 70년은 이웃나라의 횡포로부터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한편 하나님의 경고가 확실하게 성취되는 현장가운데 소망으로 하나님의 공평과 계획을 경험하며 부패했던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 앞에 돌아오도록 했습니다.
11절을 읽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사로잡힌 자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 그 둘째,
2. 사로잡힌 것이 재앙이 아니라 미래와 희망의 출발이었습니다.
11절 앞에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라고 시작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인생이 쉽게 깨닫지 못해 종종 오해합니다. 그래서 불평하고 믿어 들이지 못해 실패하고 다시 낙심하고 또 불평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향한 깊은 믿음과 신뢰로 주님의 마음과 생각을 믿고 안다면 우리는 불평대신 날마다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본심은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시는 게 아니시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깊으신 생각을 알게 되면 우리가 저지른 모든 실수와 범죄조차 일련의 과정을 거쳐서 결국 하나님가까이 나아가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놀라운 감격가운데 주를 높이게 됨을 알 것입니다. 본문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애급에 군사원조를 청함으로 바벨론을 거역하지 말고 바벨론의 포로가 되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그건 본문처럼 재앙이 아니라 미래와 희망의 길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로잡힌 억울한 세월이 있습니까. 우리를 사로잡은 뭔가 있다면 우리는 즉시 돌이켜야 합니다. 돌이키는 순간 우리 주님은 그 사로잡힘이 재앙이 아니라 미래와 희망의 시작이 되게 하십니다. 이제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받은 우리는 어느 것도 우리를 속박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만 우리를 피로 값주고 사신 주님만 우리를 말씀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붙잡아 주십니다. 칠십년의 궁극적인 목적은 제사의 회복, 즉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었습니다.
12절입니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사로잡힌 자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 그 세 번째.
3. 부르짖어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하나님을 찾고 만납니다.
본문은 부르짖으며 기도하라고 합니다. 의례적으로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간절하고도 애가 타는 기도입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생존을 두고 하는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본문에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고 했습니다. 찾는 것과 만나는 것을 나눠 기록해놓았습니다. 찾는 것은 잃었던 것을 도로 손에 쥐는 것, 즉 죄로 인해 가려있던 하나님의 진심을 알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대면과 동행을 말합니다. 부르짖어 기도하면 하나님을 찾아 만나서, 약속하신 일들, 곧 하나님 앞에 패역하여 쫓겨났던 곳에 다시 돌아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멀어졌던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이 화목으로 만나 기쁨의 찬송이 울려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우리가 즐거워하든 슬퍼하든 어떤 현장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욕심으로 어긋 맞춰놓은 모든 병폐와 부조리 중에도 주님은 거기 합당한 계획을 세우신다는 것을 믿기 바랍니다.
성도여러분. 오늘 이후 하나님께만 사로잡히시기 축복합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 사로잡히는 것은 하나님을 아프게 하는 것이고 그것은 불행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사로잡히거나 또는 불신앙과 허물가운데 다른 것에게 사로잡히거나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은 하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방법, 어떤 정황을 통해서라도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외아들의 생명을 주고 사들인 당신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깨달아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은 사로잡힌 모든 상황 그대로 소망과 미래가 되게 하십니다. 그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로 나아가 주를 만나고 그 진실하신 사랑을 찾아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넉넉히 증거하는 복된 저와 여러분이시기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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