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01. 부활절예배설교<벧전1:3-9. 살아있는 소망, 그리스도예수>
[늙은 게 죄는 아니다. 그러나 어떻게 늙었는가에 대한 살핌과 돌이킴은 노년에 가장 아름다운 복이다. 얼굴이 아니라 표정이듯 나이나 건강보다 중요한 것은 그 나이 그 건강한 몸으로 무엇을 꿈꾸고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것이고 거기 어느 한 순간에도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다. 복된 자여, 너는 주를 잊지 말지어다. 아멘.]
본서는 극심한 박해 속에서 신음하는 성도들에게 베드로가 보낸 격려와 위로의 서신입니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다른 성도들도 함께 갖고 현세보다는 내세를 소망함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믿음으로 승리하기를 당부하고 있습니다. 한절씩 살피며 잠자던 영이 새 힘 받기를 바랍니다.
3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을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 부활로 인한 영생은 우리의 산소망이요, 하나님은 우리의 찬송
*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최초로 고백한 수석제자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한 이 고백은 훗날 만민이 주를 시인하는 대표적 신앙고백이 됩니다. 그리고 본문의 고백에 따르면 베드로나 저와 여러분의 거듭남의 근거는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죽고 다시 살아나신 역사적이고도 엄연한 사실이 우리들의 거듭남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신앙은 그래서 부활신앙입니다. 고전15:17-20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우리에게 부활이 없다면 우리 신앙은 허무한 것입니다. 부활하셨을 뿐 아니라 살아계셔서 항상 성도의 믿음과 생활가운데 함께 하십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말한 살아있는 소망이란 먼저 죽은 소망과 대비되어 설명돼야 합니다. 간절히 바라는 바를 결국 이루지 못하고 죽어서 죽은 자 앞에 영원한 희망사항으로 남아있는 무기력한 소망을 죽은 소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해 받은 성도들의 살아있는 소망은 살아 성장해 서로 사랑으로 묶여 또 다른 구원과 새 생명을 잉태하고 생산해내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늘 기쁨이 충만한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의 우리처럼 구원받지 못해 어둠가운데 헤매는 다른 영혼을 향해 복음, 산 소망으로 다가서게 됩니다. 성도라면 거의 본능적인 생활문화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가 예수로 인해 살아났고 또 다른 죽은 자들을 다시 주님의 소식으로 일으켜야 합니다. 그것이 산소망의 생명력, 구령의 열정이라는 것입니다.
4절.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 성도여러분. 우리 눈에 뵈는 모든 것 중에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요? 아름다운 풍경도 세월따라 무너지고 꽃과 청춘도 세월 앞에 무상합니다. 그래서 끝에는 다 추하고 허망합니다. 베드로사도는 구약시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썩는 지상의 기업으로 보아,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시들지 않는 하늘의 기업, 영원불멸의 하나님의 나라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산 소망이라는 하늘에 있는 기업의 특징은 무엇인가? 첫째, 썩지 않습니다. 하나님나라엔 부패라는 것이 없습니다. 주님이 영원한 밝은 빛으로 계셔서 태양도 소용이 없는 곳, 거기는 더럽지 않습니다. 부조리와 모순이 없이 완전한 나라, 즐거운 기쁨이 넘치는 하나님의 나라엔 의만 가득합니다. 끝으로 멸망하거나 시들지 않는 나라, 항상 권세와 능력이 넘쳐서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높여 힘차게 찬양하는 나라, 그 나라가 우리들이 받은 기업입니다. 구약시대 선민 이스라엘이 받은 기업, 약속의 땅 가나안보다 나은 천상의 하나님나라에 우리들의 소망이신 주께서 살아계시니 주님은 우리들의 살아있는 소망이십니다. 그 산 소망을 받게 하시려고 하늘에 간직해 하나님의 나라, 그 유업을 영원히 이어지게 하셨다는 것이 본문 내용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영원하니 유업자인 성도의 생명도 영원하다는 것을 기억하고 기쁨으로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5절.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 본 절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소유된 성도들을 보호함에 있어서 그 이유와 방법과 결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하나님의 변함없는 목적은 성도들을 통한 당신의 나라완성입니다. 거기엔 성도와 교회의 절대적 신뢰가 요구되고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해 확장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당신의 귀한 나라이며 거룩한 도구로서의 성도를 보호하실 것을 거듭 약속하셨습니다. 즉 성도가 보호받는 이유는 말세에 받을 완성된 구원 때문입니다. 그리고 방법은 성도들의 믿음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결과는 재림시 이뤄질 그 나라완성입니다.
6-7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 장차 받을 칭찬과 영광과 존귀로 현재의 근심을 차라리 기뻐함
* 어떤 시련이든 그것이 우리에게 가져다 줄 유익을 생각할 때 우린 불평을 하거나 면하게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없습니다. 받기에 따라서는 그 고난이 평생에 귀한 보약이 되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8:18절의 증거입니다.
과거 왜정시대에 일본 홋까이도로 끌려가 강제노동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영양실조와 병으로 죽고 채찍에 맞아죽고 얼어 죽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강한 생명력으로 버티어 돌아온 사람들은 건강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똑똑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지독한 의지의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사랑하는 이의 사진을 갖고 있거나 매일 그들의 이름을 동굴벽이나 작업장 아무데나 하루에도 몇 번씩 쓴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랑의 힘입니다. 살아만 간다면 반드시 사랑하는 이들을 만난다는 신념하나로 버틴 것입니다. 비록 죽음의 고비가 하루에 몇 번씩 와도 그들은 사랑하는 이의 사진을 몰래 보면서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이 아들 꼭 살아서 돌아갈 겁니다.” “여보. 난 꼭 당신에게 갈 거야.” “얘들아. 난 너희들 보기 전엔 죽지도 못해. 꼭 갈게 기다려.” 우린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여기 이세상이 아무리 외롭고 힘들어도 그날 거기 주님나라에서 뵈올 때 그 기쁨을 생각하면 얼마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 그래도 너무 아파요. 아버지, 다만 이 고통 속히 지나게 하옵소서.”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한번 묻고 싶습니다. 저와 여러분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 영생이신 우리의 산 소망이 힘차게 살아 일하시고 함께 하신다는 것을 느낍니까? 본문은 증거합니다. “시련으로 인해 더욱 순결해진 그대의 귀한 믿음은, 불로 녹여 정금을 만들어도 결국 사라질 금보다 훨씬 더 귀해서 주님재림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함을 얻게 할 것이니라.”
돈이 비록 세상에선 큰 힘을 쓰게 하지만 그것은 언젠가 육체가 우릴 떠나듯 모든 것들과 함께 사라질 것입니다. 그때도 전혀 사라지지 않는 것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들의 영혼입니다. 그날 우리들은 새로운 육체를 받아 늙거나 고통 없는 평화의 삶으로 영원히 주님을 찬송하며 기쁨의 삶을 주님나라에서 누리고 나누게 됩니다. 밤이 새도록 재미난 얘기를 하는데 졸립지도 않습니다. 이튿날 출근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육체로 인해 먹을 것과 입을 것과 밀려드는 월말 결제대금을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썩을 몸이 아니니 지치지 않는 심장과 근육으로 하고 싶은 선한 일들을 마음껏 할 수 있습니다. (여자사이에 가장 기분 나쁜 여자 1호는 먹을 거 다 먹고 살 안찌는 여자) 여러분은 그 때 뭘 하고 싶습니까? 저는 바이올린공부를 하고 시를 쓰면서 교향악단을 지휘하고 싶습니다. 가난한 자를 돕고 아픈 자를 치료해주는 게 소원이라면 포기하세요. 거기선 그럴 일 없습니다. 이 땅에서 못한 것들, 너무 서러워하지 말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는 없으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가난이 없는 곳, 아픈 것과 죽음이 없는 곳, 설음과 외로움이 없는 곳, 내편 네편, 네 나라 우리겨레, 싸움과 경쟁이 없는 곳, 생각만 해도 기쁩니다. 이것은 공상이 아닙니다. 지금 지체없이 한발한발 다가오는 현실입니다. 한해한해 늙어감이 핑계할 수 없는 증거요, 막을 수 없는 기쁨입니다.
8-절.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할렐루야.
♤ 믿음으로 인한 영혼의 구원은 영원한 영광과 기쁨
* 참으로 신기한 기적으로 우리들 주변은 가득합니다. 우리들의 믿음이 그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보지도 않고 믿고 또 기뻐합니다. 부활 후 제자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이 도마를 보고 하신 말씀입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믿음은 그래서 엄청 큰 복입니다. 에녹은 믿음으로 죽음을 안보고 하늘로 옮겨졌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인이라 불렸습니다. 성경은 믿음으로 척박한 환경과 유약한 자신을 이긴 승리의 사람들과 불신앙으로 무너진 민족과 실패한 사람들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신5:29)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복이 너희에게 있을 것이며 너희가 차지한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리라.”(33)
사랑하는 개척동지 여러분. 우리가 장차 받을 구원은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상상, 그 이상의 것인 줄 믿습니다. 9절에서 읽은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는 영혼의 구원은 단순히 영혼만의 구원이 아닙니다. 영혼을 뜻한 히브리어 ‘프쉬케’는 전인격적인 자아나 존재 등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구원은 영혼과 육체와 인격 모두를 포함한 존재론적이면서도 전적인 구원을 뜻합니다. 아울러 끝부분의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에서 “받음이라.”는 원어는 현재분사로 돼 있습니다. 즉 전인격적 존재로 받은 우리의 구원은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구원이 과거에 일어났고(3절), 현재에 이뤄지고 있으며(5절), 미래에 거쳐 완성됨(4절)으로 우리 안에서 계속 진행하고 있음을 알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와 우리들의 믿음에 자리를 잡고 꾸준하게 성장해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의 주제는 살아 숨 쉬는 소망, 산 소망입니다. 염려와 근심이 아무리 산처럼 가로막혀도 그 산 너머에 있는 새로운 세상은, 영원한 소망으로 살아있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지금도, 과거에도 미래에도 영원히,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허락된 구원입니다.
땅이 아무리 넓어도 하늘이 덮듯이 우리의 죄가 커도 보혈의 능력이 덮어 보이질 않게 됐습니다. 그 대속의 구원이 주님의 재림시까지 조금도 변함없이 우리에게 산 소망으로 함께 하는 한, 우리들의 근심은 잠시, 장차 받을 구원의 찬란한 영광과 기쁨과 칭찬이 믿음으로 인하여 그 모든 아픔을 덮도록 오직 우리들의 산소망, 그리스도 한분만 바라보십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는 우리들의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그는 우리들의 살아 숨쉬는 소망이십니다. 이제 우리는 그로 인하여 기쁜 찬송을 부를 수 있습니다. 비록 아직도 근심할 일은 많지만 우리의 산소망은 일마다 때마다 생명력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산소망으로 나아갑시다. 주님은 우리의 영광과 기쁨과 찬송이십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과 전인격으로 기쁜 구원의 노래를 불러올리시기 바랍니다. 부른 노래가 신앙고백되어 그 고백 그대로 기쁜 삶이 될 줄 믿으시고 아멘입니다. 아멘대로 이뤄질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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