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2.19.목요. 구정. 상도동 모친을 찾아뵈다.
지금까지 나를 경험한 모든 이들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단 말을 전하고 싶다.
나는 날마다 죽으며 날마다 다시 태어난다.
그리스도 우리 예수께서 주시는 깨달음가운데 나는 순간마다 새롭게 태어난다.
깨달아 돌아보니 얼마나 부끄러운 날이었는지...얼마나 잘못 돼 있었는지...
어떤 어린이가 말했다. 생각은 자기가 자기에게 속으로 말하고 대답하는 거라고...
내가 이 일기록에 의지하고 혼자 말하고 혼자 대답하지만 훗날 이글을 읽을 사람은 거의 없이 그냥 사라져 버리는 글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도 나는 거룩하신 영 주님 앞에서 끊임없이 돌아보고 살피며 아파하려고 애를 쓴다.
안 그러면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던 내 소원은 이뤄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려놓음과 죽음의 미학(美學)이 나를 온전히 감싸 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나는 성숙의 고통을 스스로 취하면서 하나님 주시는 평화와 기쁨가운데 들리라. 아멘.
<자기성숙을 꾀하는 자, 끊임없이 고뇌한다. - 어린 날의 일기록 중 발췌>
2015.02.21. 토요.
내가 피해자라고 억울해 하는 동안, 그 시절은 불행이고 함정이었다.
내가 가해자임을 알았을 때 비로소 거기가 주님나라의 입구였다.
오늘도 이른 아침 주 앞에 앉으면 끊임없이 부어주시는 은혜로 한발씩 주님나라 가까이 다가서는 감동,..
신앙생활이 때로는 버거운 짐이요, 천국이라는 도피성이 위안이지만 주께서 간절히 바라시는 것은 여기 이 땅에서의 주님형상회복이 아닌가? 우리는 오직예수라는 말을 애용한다.
그러나 예수 외엔 일체의 구원이 없다는 구원론의 배타적선포는
자칫 무한하신 하나님의 구원권역(救援權域)과 능력과 자비에 대한 제한이 될 수도 있음에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예수 외에 우리가 모르는 구원이 있을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인생을 사랑하시고 피조계를 아끼시는 방법은 무한하다는 것이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간과했으나” 행17:30<롬2:12.14.15>에는 우리가 모르는 예수 밖의 사람들을 하나님이 어찌하시는지를 보여준다.
세종대왕과 이순신장군은 그래서 지옥 갔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옥의 운영은 자비하신 하나님이 하시되 구체적으로 어떤 지침으로 하는지 알 수는 없으나
운영권자이신 하나님이 공의이시되 사랑이신 것을 잊어선 안 된다.
즉 공의는 본디 사랑을 구현하는 다른 방편이며 지옥은 지옥에 목적을 두지 않고 천국과 주의 형상회복에 목적을 둔다는 것이다.
회복된 형상은 그러므로 하나님을 생각할 때 두려움이 과정이되 그것이 변하여 오직 기쁨이 넘쳐나야 한다. 아멘.
2015.03.21. 토요.
두어해 전 끊임없이 나를 지배한 말씀은 “주여, 사랑 밖에 길이 없어 사랑하겠나이다.”였고
이즈음엔 “회개만이 길이다.”라는 것이다.
세상과 아내와 성도를 고치려는 내 의도는 다분히 이기적인 오류였고
내가 바뀌면 모두 바뀌고 평강이 찾아든다는 것을 이제 기쁨으로 받아들여
늙음의 준비를 “글로 말하며 글로 만난다.”는 노년의 생활강령 기초로 삼아 다짐한다.
늙어 잘 지켜야 하는 것은 입과 몸과 재물일 것이며,
노후의 사명은 그간의 실패로 얻은 지혜를 제시하며 본이 되는 삶을 후손과 주변에 남겨주는 것이 황혼의 열매여야 한다.
이제 얼마 안가서 경쟁도, 공부도, 출근도, 아플 치아도, 빗질할 머리칼도 멀리 떠나겠지.ㅎㅎ
한없이 고맙고 가여운 아내의 마주하고 싶지 않은 그 고집도 그리움 안에 갇혀 보이지 않겠지.
진정한 자유가 해방의 기쁨으로 다가오면 밀물처럼 밀려오는 고독의 본질을 뼈저리게 알게 하려나? 노
후를 준비한다고들 법석이지만 참 준비는 혼자서도 즐겁게 노니는 고독의 승리일 것이다.
이 승리에는 반드시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이 넘쳐나야 하리라.
갑자기 이 노래가 생각난다. 박목월 시 이별의 노래던가?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인생도 저물었네.
아~~너도 가도 나도 가야지.♬
육체는 감동과 기쁨이요 동시에 함정과 통증이다. 천국과 지옥을 품은 더없는 우주이다.
진정한 해방과 자유는 육체와의 이별일진대 오직 할렐루야. 아멘.
2015.03.28. 토요. 낮은 갑자기 초여름. 밤엔 초겨울.
인생들이 어디까지 깨닫기를 바라는가? 세상을 부조리와 모순으로 보는 깨달음은 초보요,
모든 사물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보는 눈은 약간 진보된 각성이다.
여기서 걸음을 멈추고 위를 바라봄으로 계시, 즉 외부의 개입으로 충격을 받고 그 이후 죽기까지 감사할 수 있다면 그
는 과연 뭔가 깊이 깨달은 자이다.
복음 안에 만사의 답이 있음을 안다면 누구든지 즉시 단번에 영원히 전혀 다른 삶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아멘.
세상은 본디 어리석고 악해서 구원자를 못 박는 곳이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과 하나님의 진리 외에 모두 허망한 것임을 깨닫는 기회는 대부분 힘든 일과 불행으로 찾아온다.
지혜로운 이는 이 불행을 성찰과 성장의 기회로 삼지만 미련한 자는 불행을 불평과 저항과 분노와 파괴의 주먹으로 마주선다.
어린 시절 부모를 향한 극심한 분노와 가난이 아니었다면 우리 4형제는 지금 이런 노후를 맞을 수 없었으리라.
배고파 웅켜 쥔 허리로 세상을 보았으니 낭비할 수 없었고 못 배우고 못나서 낮게 살았으니 모든 것이 감사 아닌 게 없다.
성지순례를 난 평생 가지 않을 것이다. 그날 거기 주님 뵈올 때 그 놀라운 감동을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다.
성지순례는 해묵은 흔적을 통해 진품인 천국과 그 약속의 나라를 연상하려는 시도인데 내게는 소용이 없다.
성지라고 정한 거기가 성지가 아니라
내 육체가 충분히 성지가 될 수 있고 밟는 모든 땅에 주의 통치가 머물러 어디든 성지일 수 있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에 마음을 두지 말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주권과 자비에 마음과 몸을 다함이 옳지 않은가?
비상을 먹어도 혹 살아날 수는 있으나 나이를 먹고는 살 수 없다는 말처럼
나이먹어 흙으로 돌아가게 하신 하나님의 은총은 만인에게 고루고루 내리셨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이렇게도 아름답고 행복한 줄 누가 알랴만 나는 그 기쁨가운데 주님만을 찬양하리로다.
늙으면서 자유로워지는 게 수도 없고 늙으면서 아름다워지는 것이 참 많고 풍성하다.
젊음은 치열하나 서툴고 늙음은 잔잔하나 어여쁘고 애잔하도다.
땡감은 힘 있지만 떫고 연시는 무력하고 물렁대도 달고 낡아서 뭇사람을 행복하게 한다.
이제 나도 남들이 가는 길, 늙어 죽는 길로 간다는 건 대단한 영광이다.
몇 년을 더 이 땅에 있을지는 몰라도 늙은이의 입에선 진리가 자연스럽게 흘러넘쳐야 한다.
복된 소식과 지혜가 번뜩여야 한다. 늙은이의 얼굴은 그의 명함이다.
어찌 살아왔는가를 또렷하게 말해주고 있다. 주여! 종의 늙음가운데 주의 영광을 드리우소서.
전능자의 그늘아래 주를 증거하며 안개처럼 사라지게 하옵소서. 안개가 걷히면 더욱 밝은 빛이 모두의 기쁨되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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